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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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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무거운 잿빛이었고, 바람은 가볍게 불었다. 공기는 눅눅한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땅은 어제 내린 비로 푹 젖어 있었다. 빗줄기가 이룬 물살 때문에 움푹 팬 곳도 더러 있었다. 멀리 보이는 능선을 따라 산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안개는 능선 아래로 소리 없이 퍼져 내려가고, 그걸 길 끄트머리에서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설렌다.

다시 길 위에 섰다. 길은 외줄기로 산허리를 굽이쳐 돌면서 끝없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한꺼번에 앞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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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화대리 오뚜기령 임도를 걸었다. 임도는 끝도 없이 길만 이어진 곳이 대부분인데, 오뚜기령은 다르다. 걷다 보면 작은 시내부터 물 깊은 계곡까지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길이다. 그래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에 걷기 딱 좋다. 걷다가 더위에, 갈증에 지칠 무렵에 만나는 계곡은 세찬 물소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쉬었다 가라고, 땀을 식히고 가라고, 마음을 물속에 풀어놓고 가라고. 그 길을 걸었다.

이 길은 혼자 걷기보다는 길 친구들과 어울려 걸어야 제 맛이 난다.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사정없이 불어난 계곡을 건널 때,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주는 친구가 있어야 든든하지 않겠나. 걷기에 지쳤을 때, 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 들어가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어야 든든하지 않겠나.

그래서 오랜만에 길 친구들과 함께 걸었다. 도보모임 '숲길도보여행' 회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전날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지만 여행 당일, 비는 그쳤다. 그것도 우리가 오뚜기령 입구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면 오랜만에 비를 맞으면서 걸으리라, 했는데 '우중도보'는 하늘이 바라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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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봉 입구부터 비오듯 땀이 주르륵

도보여행 출발지는 강씨봉 입구. 이곳에 등산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강씨봉은 포천과 가평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산으로, 궁예의 부인 강씨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높이 830미터이며 수려한 경관이 펼쳐지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등산이 목적이 아니므로 강씨봉 입구에서 출발해 오뚜기령을 넘어 임도를 따라 걸을 예정이다. 도보 거리는 22km.

출발하기 전에 신발을 갈아 신었다. 이 길은 임도만 이어진 것이 아니라 곳곳에 복병처럼 크고 작은 계곡이 숨어 있어 길이 끊기곤 한다. 계곡에 돌이 징검다리처럼 놓인 곳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않은 곳도 있으니, 발을 적시면서 건널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예 물에 젖어도 괜찮은 등산용 샌들을 신는 게 좋다. 아니면 구멍이 숭숭 뚫린 여름용 등산화도 괜찮다. 스틱도 있으면 좋다. 스틱은 계곡을 건널 때 지지대가 되어준다.

강씨봉 입구를 출발한 것은 오전 10시가 훌쩍 넘은 뒤였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었지만, 습기를 잔뜩 머금은 날씨 탓일까, 걷기 시작하자마자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목에 질끈 동여맨 손수건이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땀으로 흠뻑 젖고 말았다. 임도는 승용차 한 대가 너끈히 지나다닐 정도로 넓었지만, 일부 구간은 땅이 심하게 팬 곳도 있었다. 힘찬 물살이 스쳐 지나간 자국처럼 보였다. 예년보다 갑절 이상 쏟아진 장맛비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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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 위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잔뜩 깔렸다. 돌들을 밟으면서 걷는데 화사하게 피어난 꽃이 눈길을 끈다. 까치수염이다. 군락을 이루면서 피어 있다. 요즘 길을 걸으면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꽃은 단연 망초다. 가까이서 보거나 무리지어 피어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지만 외래종에 질긴 생명력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는 꽃이다.

한 여름의 숲은 무성한 나뭇잎을 자랑하는 활엽수로 가득 찼다. 하늘은 흐릿하게나마 개었지만 나뭇잎에는 탄력 있는 물방울들이 점점이 맺혀 있다. 푸르디푸른 나뭇잎들은 물기를 머금어 더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공기를 거쳐 온몸으로 쏙쏙 스며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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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느낌을 개구리도 받을까? 돌 위를 폴짝거리면서 뛰어다니는 개구리를 보니,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무당개구리였다. 말을 걸을 사이도 없이 무당개구리는 무리지어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하더니 도망치기 바쁘다. 돌 위에서 공처럼 미끄러져 굴러 붉은 뱃살을 드러낸 개구리는 얼른 정신을 차려 돌 틈으로 숨어 버린다.

녀석이 달아나기 전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넌, 나한테 찍혔어. 흐흐.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이따금 가파른 오르막이 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경사는 심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몸은 기가 막히게 오르막이라는 걸 안다. 호흡이 가빠지고, 저절로 발에 힘이 들어간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땀, 땀, 땀. 그래도 기분은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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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오뚜기령이라고?

숲길 사이로 이따금 굽은 길을 알려주는 도로표지판이 툭 튀어나온다. 걷는 사람들에게야 도로표지판이 필요없지만,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이 길,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산악오토바이, 그리고 사륜구동차량을 타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단다. 그렇지 않아도 사륜구동차량 동호회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걸으면서 본 차량은 열 대도 넘는다.

오뚜기령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오뚜기령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름이 왜 오뚜기령이여? 궁금했다. 강씨봉 입구에서 오뚜기령까지 오르는 길은 군사작전도로였단다. 이 길을 닦은 이들은 오뚜기부대원들. 그들을 길이(?) 기리려고 오뚜기령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란다. 오뚜기령 표지석 뒤에 그 사연이 짧게 새겨져 있다. 삼일만에 이 길을 뚫었단다. 정말?

오뚜기령 표지석 뒤
 오뚜기령 표지석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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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의 날짜는 1983년 6월 25일. 사단장, 연대장 등 여러 사람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길을 뚫느라 삽을 들었을 젊은이들의 이름은 없었다. 폐허가 되었던 길을 뚫느라 피땀을 흘렸을 젊은이들은 이제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겠구나, 싶었다. 그들도 이따금 이 길을 찾아와 그 때의 고생을 돌이킬까? 그들 덕분에 이 길을 걸을 수 있어 감사하다.

오뚜기령에서 길은 갈라진다. 강씨봉으로 가기도 하고, 청계산으로 가기도 한다. 우리가 택한 길은 적목리 임도. 이제 습기를 잔뜩 머금은 길은 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발밑을 간밤에 내린 비가 물줄기가 되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곡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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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라 했던가. 거칠게 거품을 뿜어내면서 아래로, 아래로 거침없이 흘러가는 물은 이따금 길을 삼키고, 바위를 삼켰다. 물속으로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어야 하는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풍덩, 발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지는 감탄사. 으메, 시원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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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긴 바지자락을 무릎까지 걷어 올렸지만, 그걸로 물을 피하기에는 어림없었다. 바지자락이 푹 젖어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허벅지 부근까지 젖어든 바지. 시원한 계곡의 기운이 바지자락을 타고 온몸으로 모세혈관이 피를 섬세하게 옮기는 것처럼 퍼진다.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도 물은 바지자락 사이를 빠져나가 거침없이 흘러, 강을 찾아 떠났다.

물이, 흐르는 계곡 물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끔 만들었다. 환한 웃음을 머금고 마음껏 물을 즐기는 길 친구들을 보니, 나 역시도 저절로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마음을 온통 채운 것은 기쁨이었고, 행복감이었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까치수염
 까치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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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해서 먹는 도시락의 맛, 그 각별함

차량 2대가 비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자리를 잡았다.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도시락은 어디서 먹어도 맛나지만, 이렇게 길 위에서 먹는 맛은 각별하다. 소박한 반찬이 진수성찬으로 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도시락 뚜껑을 열기 전부터 침이 꿀꺽 넘어간다. 밥 두어 숟갈을 입안에 우겨넣고 나니 이런, 오프로드 차량 한 대가 지나가겠다고 모습을 나타낸다. 도시락을 들고 엉거주춤 일어나는 길 친구들. 길 위에서는 이런 재미도 있다.

물을 몇 번이나 건넜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계곡은 이따금 깊어지기도 했지만, 허벅지 위를 적시지는 않았다. 걷다가 물을 건너고, 물을 건넌 뒤 다시 걷기를 반복하는 길. 22km를 걸었으면 적게 걸은 건 아니었지만, 피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울창한 숲과 거침없이 흘러가던 계곡 물 때문이었으리라.

계곡이 끝나고 다시 임도가 이어졌다. 무거운 잿빛으로 가라앉았던 하늘에 햇살이 번지고 있엇다. 날이 개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일 것이다, 뱀이 모습을 드러낸 건. 누군가 짧게 외쳤다.

"뱀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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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어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밀었을 때는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혼비백산한 뱀이 황급히 머리를 바위틈에 처박은 다음이었다. 뱀은 눈 깜짝 사이에 꼬랑지마저 감추고 사라졌다. 녀석은 비가 그치니 젖은 몸을 말리려고 나타난 모양이었다.

용수목 마을에 도착한 것은 5시 반 즈음이었다. 오전 10시 반이 채 안 되어 출발했으니, 꼬박 7시간을 길 위에 있었던 셈이다. 용수목 마을에 도착해서 다리 계곡을 내려다보려니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무연히 흐르는 물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물과 더불어 흘러온 것 같았다. 이런 느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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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보여행, #오뚜기령, #강씨봉, #숲길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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