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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3월 19일 오후 2시 서울 수색 군 사격장에서 육군 일등병이 상사 살해죄로 총살형을 당했다. 비운의 주인공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천문기상학과 4학년 재학 중 입대한 최영오(21)였다. 최영오는 처형 직전 "내 가슴에 붙은 죄수번호를 떼어달라"고 부탁했고 "내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랄뿐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그러나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군부대 내 폭력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비극은 그로부터 약 8개월 전인 1962년 7월 8일 아침 8시 육군 모부대 내무반(생활관)에서 시작되었다. 애인이 보내온 12통의 편지를 병장과 상병이 먼저 뜯어보고 놀리자 최일병은 항의했다. 그러자 두 선임자들은 사과는커녕 최일병을 구타했다. 순간 격분한 최일병은 자기 총으로 두 선임자를 사살했다.

최일병은 상사 살해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고 대법원도 이를 확인했다. 서울대 학우들은 물론 많은 학생들과 각계 각층 인사들의 구명운동도 허사였다. 당시는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직후여서 군의 서슬이 시퍼런 시절이었다.
 
최일병의 사형집행은 예상보다 일찍 단행되었다. 처형 3시간 전에 동생을 면회한 최일병의 형 최영수씨에 의하면 "동생이 다음 면회 올 때는 어머니와 조카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말한 것으로 당시 서울대 신문 <대학신문>은 전하고 있다.

처형 두어 시간 후 당국으로부터 전보를 받고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홀어머니(61)는 그날 저녁 무렵 마포 전차종점 근처 한강변 둑에 올라가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의 모친은 아들이 처형되기 전에 이미 써놓은 호소문에서"이 애미가 대신 죽을테니 제발 영오는 살려주시오"라고 절규했다. 

최영오 처형을 보도한 1963년 3월 21일자 서울대 대학신문
 최영오 처형을 보도한 1963년 3월 21일자 서울대 대학신문
ⓒ 조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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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63년 3월21일자 서울대의 "대학신문"3면인데, 최영오 학우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로 거의 전면을 채우고 있다. 가운데 위쪽에는 학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시(弔詩)가 한편 실려 있다. 당시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3학년생이던 필자(조화유)가 쓴 것이다. 그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떤 에필로그
                  조화유(문리대 사회학과)

태초에 실수가 있었다.
천지창조 닷새 동안
신(神)은 과로하였다.
엿새째의 신
피로에 지친 나머지
아무렇게나 인간을 만들어버렸다.
이로부터 영겁에 이르는 인간 희극의 막이 올려졌다.
도대체가 역사는 모두 희극이었다.
전쟁도 희극이고
군대도 희극이었다.
갈라진 민족도 희극이고
그어진 휴전선도 희극이었다.
학도병 최영오!
그에 대한 두 상사(上司)의 희롱도 희극이고
그가 겨눈 분노의 총부리도 희극이었다.
이윽고 그에게 겨우어진 세 개의 총부리
그것도 희극이었다.
도대체가 모두 희극이었다.
어쩔 수 없는 신(神)의 엉터리 각본이었다.
이제 그 희극의 일장(一場)이 끝났다.
인간희극의 숙명이 낳은 또 하나의 인간희극
최영오 희극의 제5막이 내린 것이다.
바보들아 박수를 쳐라.
그리고 울어라!
계면쩍은 신이
헤벌쭉 웃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조화유 기자는 재미작가이며 영어교재저술가 입니다. 최신간 문학작품집 <전쟁과 사랑>은 국내서점에서도 구할수 있습니다.



태그:#군부대폭력, #최영오일병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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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후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 중 대한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흉일"당선. 미국 Western Michigan University 대학원 역사학과 연구조교로 유학, 한국과 미국 관계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사 연구 후 미국에 정착, "미국생활영어" 전10권을 출판. 중국, 일본서도 번역출간됨. 소설집 "전쟁과 사랑" 등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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