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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준표 신임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홍준표 신임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 정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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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왔다. 독고다이, 돈키호테, 촌놈, 홍두깨 같은 변방 혹은 비주류 이미지에 갇혀 있던 그였다. 그래서 완벽한 '품절남' 정치인이 되기엔 늘 2% 부족해 보였던 그가 집권여당 당 대표가 되었다. 비주류에서 주류로, 변방에서 중심으로 특유의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들어온 그의 수락연설 일성은 이랬다.

"한나라당은 오늘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줬다. 현대조선소에서 일당 800원을 받던 경비원의 아들, 고리 사채로 머리채 잡혀 길거리 끌려다니던 어머니의 아들이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에게 보여줬다."

오세훈(50) 서울시장에게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부드러운 도시 남자'(부도남)다. 그 대척점에 '강한 촌놈' 이미지의 홍준표(57)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이 있다. 강한 남자에게도 아픈 상처는 있다. 대중은 쉽게 잊지만 당사자는 절대 잊지 못하는 그런 상처 말이다.

'강촌남' 홍준표는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서민 정치인'

2006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던 '강촌남' 홍준표는 강금실 전 법무장관 '대항마'로 긴급 차출된 '부도남' 오세훈에 밀려 쓴잔을 마셨다. 당시 3선 의원으로서 오랫동안 서울시정을 준비해온 홍준표로서는 억울할 법했다. 형용모순인지 모르지만 '순정 마초 기질의 강촌남'은 솔직 담백하다. 홍준표는 당시 오세훈과의 '이미지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했다.

"강금실 전 장관의 보랏빛 카드(스카프)와 오세훈 전 의원의 녹색 카드(넥타이)가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부터 서울시장 선거는 '이미지 대 이미지' 전쟁으로 급변했다. 다른 후보가 강남 헬스클럽에서 썬텐하면서 이미지 가꿀 때 나는 밤새워 서울시정을 연구했고, 피눈물 흘리며 대여투쟁을 해왔다."

사실 대중 정치는 이미지 정치로 변한 지 오래다. 홍준표 자신도 '거악과 싸우는 모래시계 검사' 이미지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게 어디 정치뿐이던가.

"경제와 사회, 문화 등 여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거나 여론을 공략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영역에서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이미지와의 전쟁이다. 여론이 곧 이미지 게임이기 때문이다." - 강준만, <이미지와의 전쟁>

그러나 정치인의 이미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더러는 대중매체를 통해 하루아침에 생성 또는 조작되지만, 대개는 그 정치인이 밟아온 여정을 통해 형성된다. 강금실의 참신한 반(反)정치 이미지와 오세훈의 깨끗한 클린(clean) 이미지는 각각 법무부장관과 국회의원 시절에 취한 정치적 결단을 통해 대중에 각인된 것이다. 단지 보랏빛 스카프와 녹색 넥타이가 상징하는 대중의 판타지가 만들어낸 허상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부자당'에서 서민 '속풀이 법안' 많이 발의한 서민 정치인

그렇다면 홍준표의 이미지는?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서민 정치인'이다. 그럴 만하다. 그는 한나라당 의원 중에서 유일한 '인(in) 서울 4선 의원'이다. 부자 동네 송파에서 한 번, 서민 동네 동대문에서 내리 세 번이다. 탄핵 역풍이 불었던 17대 총선에서도 서울 동북부 17개 선거구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한나라당 의석을 지켰다.

그런 자존감 때문인지 4선 의원 홍준표는 '때와 자리를 가리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통한다. 그는 '용산참사', '대운하' 등 민감한 현안에서 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사석에선 형님이라고 부르는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 이상득·박근혜 등 당의 거물급 인사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부자당' 이미지의 한나라당에서 답답한 서민들의 '속풀이 법안'도 많이 발의했다. 17대 국회 당시 '반값 아파트'(토지임대부 주택정책) 법안을 발의했고, 이중국적 보유자의 병역 회피를 금지한 '국적법'과 '재외동포법' 개정을 이끌었다. 또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추진할 때도 당과는 다른 목소리를 냈으며 '등록금 차등제'도 주장했다. 출신 성분을 배반하지 않은 이런 우직함이 홍준표의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정치인'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이다.

홍준표는 경남 창녕군에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변방에서 늘 중심을 꿈꿨다. 어릴 적에 가족과 함께 리어카에 보리쌀 두 말을 싣고 대구로 이사했으며, 대학(고려대)에 가기 위해 1만4천 원을 쥐고 서울로 갔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그는 사법시험에서 떨어진 어느 겨울밤, 아버지가 계신 울산에 내려갔다가 바닷가 모래밭에 모닥불 피워놓고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에 앉아 있는 일당 800원짜리 현대조선 경비원 아버지의 등판을 보고서 속으로 피눈물 흘리며 불공평한 세상을 바꿀 결심을 했다.

판검사 시험에 합격한 그의 '모래시계 검사' 이야기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검사 시절 그의 이름은 '판관(判官)의 표상'이라는 뜻의 판표(判杓)였다. 그러나 판사에게 어울릴 법한 판표라는 이름이 검사인 그의 출세에 지장 있다는 말을 듣고, '세인의 표상'이라는 뜻을 지닌 '준표(準杓)'로 개명했다. 개명한 덕분인지, <모래시계> 드라마가 뜬 덕분이지 몰라도 그는 1996년 이재오·김문수 등과 함께 정계에 입문한 뒤 비교적 탄탄대로를 걸었다. 

"지난번 대선후보 출마는 '페이스 메이커'로 연습한 것"

시련과 좌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2006년 서울시장 경선에서 그가 '강남 오렌지'라고 부르던 오세훈에게 쓴잔을 마셨다(그는 솔직담백하지만 당시의 패배는 별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뒤끝 없는 정치인으로 유명하지만, 당 대표 당선 직후 자신의 역할과 관련한 언급에서 박근혜 전 대표뿐 아니라 정몽준·김문수 같은 유력 대선주자들이 상처 입지 않도록 보호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오세훈은 거명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시장 경선에서 떨어지고서도 '엉뚱하게' 2007년 대선 후보에 도전했다가 '예상대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그는 이때의 고배와 관련 "지난번엔 페이스 메이커로 연습한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경선 후 박근혜당과 이명박당으로 깨질 듯 보여 '화합하는 작업' 차원에서 출마했다는 변이다. 아무튼 그는 지난 대선에서 MB의 약점인 BBK 사건을 방어하는 등 정권교체에 제 역할을 했다. 그는 내심 법무부 장관을 원했으나 노동부 장관을 제안받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2008년 정권교체 뒤 첫 여당 원내대표를 맡은 그는 지난해 7월 전대에서 친이계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안상수에게 462표 차로 패했다. 이후 그는 서민정책특별위원장을 맡아 '진보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며 '여당 속의 야당' '부자당의 서민 정치인'이라는 독특한 정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정계입문 15년 만에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되어 변방에서 중심 중의 중심, 당 중앙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당원·대의원 앞에 약속한 당선 일성은 "홍준표는 이제 변방에서 중심으로 왔다. 그러나 변방에서의 치열했던 정신을 잊지 않고 내년 총선·대선에서 압승하겠다"는 거였다. 정치인 홍준표는 로맨티스트로 남고 싶어하지만, 내년은 모든 것을 다 걸어 '올인'해야 하는 총선·대선이 있는 해이다. 그 또한 당원들에게 한나라당의 총·대선 승리를 위해 '원조 저격수'이자 BBK를 막아낸 자신이 대표가 되어야 대야 전투력이 강화된다는 전사론(戰士論)을 앞세웠다.

당장 그 앞에는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구하고, '박근혜 공주'를 야당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책무가 놓여 있다. 그는 우선 위기의 한나라당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검사 시절부터 즐겨 써온 '척당불기'(倜儻不羈,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남에게 얽매이거나 굽히지 않음)의 정신과 자신의 색깔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계파 타파'와 '친서민' 정책을 제시했다. 탈 계파를 통한 당 화합과 친서민 정책을 선도하는 당 역할을 통해 '당당한 한나라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자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자"

사실 이번 전대에서 홍 대표를 포함해 나경원·남경필 등 '무계파' 성향 정치인들이 지도부에 입성함으로써 '친이계'라는 한나라당 최대계파는 사실상 해체된 거나 다름없다. 문제는 '친박'이라는 새로운 미래권력 계파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계파 타파 해법은 총선 전까지의 한시적 '헤쳐 모여'다. 총선 승리 후에는 대선주자 계파별로 흩어져 대선레이스를 펼치자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계파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총선 공천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거나 총선에서 패배할 경우, 그는 다시 '독고다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민주당을 '얼치기 좌파'로 공격하면서 "부자들에게는 자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자"는 그의 정치적 신념이 정책으로 구현되고 대중의 지지를 얻을 경우, "지난번엔 '페이스 메이커'로 연습한 것이고 기회가 오면 진짜로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그의 꿈도 한층 가까워질 것이다. 그는 그 '기회'를 "한 10년 본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내년 4월 총선은 "안티팬도 팬이다"면서 늘 반전을 꿈꾸는 로맨티스트로 남고 싶어하는 독고다이 홍준표의 '화관'이 가시면류관이 될지, 월계관이 될지 미리 가늠해볼 수 있는 시험대다. 참, 당 대표가 '보온상수'에서 '독고준표'로 바뀜에 따라 한나라당 대표의 계급은 '면제'에서 '일병'으로 2계급이나 올라갔다. 그는 처가가 있는 전북 부안의 해안초소에서 단기사병(방위병)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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