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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은 빵 조각이나 시리얼로 대충 때우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집에 돌아오는 건 밤이 까매진 뒤. 익숙해진 고단함이라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냥 쉬고 싶을뿐. 여기저기 TV 채널을 돌리다 잠든다. 아, 금세 또 아침 알람이 울린다. 애써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다시 또 하루의 시작. 하루가 또, 반복된다.

직장생활의 보람, 의미? 뭐 있다고 하면 있겠다만 없다고 하면 없는, 사실 그리 또렷하지 않은 것. 좀 더 솔직하자면, 남들 다 다니니까 돈 벌어야 되니까 먹고 살아야 되니까 참고 다니지. 그렇다면 이 반복의 반복을 언제까지? 결혼하고, 애 낳고, 아이가 다 클 때까지는 버티고, 견뎌야지.

 책 <촌놈, 쉼표를 찍다> 표지. 송성영 저.
 책 <촌놈, 쉼표를 찍다> 표지. 송성영 저.
ⓒ 삶이보이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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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나눈 대화이다. 그런데 친구 하나, 둘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셋, 넷, 다섯이 되다보니 '아니, 어쩌면 거의 모든 우리의 얘기일 수 있겠다'란 생각도 든다. 이것이 법칙이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열심히, 열심히 쳇바퀴를 굴리며 살아보지만 쓰라린 한숨까지 숨길 순 없다. 친구야, 행복하니? 우린, 행복한걸까? 묻는다. 혹시 우리의 행복은, 계속 유예중인 건 아닐까.

혹 사는 게 팍팍하게 느껴진다면 잠시 눈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 "자본의 노름판에서 쥐뿔도 가진 게 없"으면서 "똥배짱 하나로" 느릿느릿 행복을 맛보며 사는 이도 있음을, 놀랍지만, 그런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여기 글 쓰는 농부, "촌놈" 송성영이 있다. 그도 한때는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다. 허나 결혼과 함께 돈 버느라 행복할 시간이 없던 그. 그래서 10여 년 전, 덜 벌고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에 도시 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내려가 촌놈이 되었다. 그런 그가 그동안의 일상글을 모아 책 한 권을 꾸려냈다.

"빈틈없는 세상에 던지는 진짜 촌놈들의 쉼표 같은 일상"이 담긴 <촌놈, 쉼표를 찍다>(송성영 저, 삶이보이는창 펴냄). 빈틈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쉼표가 간절하다. 촌놈의 쉼표란 어떠한 것인지, 한번 엿보자.

"해코지 안하고 뱃속 편히 살 수 있다면 빵점도 괜찮아"

 송성영씨와 그의 두 아들 인상, 인효.
 송성영씨와 그의 두 아들 인상, 인효.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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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입시)교육으로 시작해서 자녀 (입시)교육으로 끝나는 나라, 대한민국. 촌놈 송성영에게도 아들 두 녀석이 있다. 그는 과연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을까.

"애들은 역시 냅둬두 공부헐 때가 되믄 다 하는 거 같유. 빵점짜리 우리 인상이가 말입니다. 요즘은 백점도 받아 온다니께유."

허허, 웃으며 말하는 그. 그는 아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백점보다 빵점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 황당한(?) 아빠다. "백점은 더 이상 갈 곳 없어 힘든 것이고, 빵점은 어느 때고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해준다고. 그의 "빵점에 대한 묘한 논리"이다. 어느 날 막상 아들이 백점을 받아왔지만 아빠도 아들도 그다지 연연해하질 않는다.

"빵점 맞던 인상이가 백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이며 나무며 풀이며 세상 만물들이 다 스스로 생명 살이를 터득하는데 사람인들 그걸 못하겠습니까?

'너무 어려서, 어리석어서 할 수 없다. 일으켜 세워줘야만 한다'는 그 어떤 두려움 때문에 강압적인 힘의 필요성을 느끼는 게 아니가 싶습니다. 대부분의 어른들 또한 그런 강압적인 힘의 논리에 의존해 살아왔기에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여기고 있고, 또한 그 논리를 아이들에게까지 주입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자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묻는다고 한다. 대다수의 우리들 또한 묻지 않을까. "당신,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는 거 아냐? 애들이 부모를 원망하는 거 아냐?" 그런 우리들에게 그는 답한다.

"남들에게 해코지 않고 자기 뱃속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빵점이 아니라 마이너스 백점을 맞는다해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끈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기 때문이며, 또한 미래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의' 빵점 논리'가 아이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이들이 과연 어떤 어른이 될지는 긴 시간이 흘러봐야만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분명한 건, 지금 그의 아이들은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의 아이들은 "미래를 위해"라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며 살고 있다는 것.

'현실감'있다는 우리는 그를 걱정하지만, '현실감'없어 보이는 그는 앞니 빠진 이를 드러내며 그저 허허 웃고 있다. 무엇이 진짜 현실감인가?

시골에선 문화생활 못 누린다고? 천만의 말씀

흔히들 시골에 살면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시골엔 과연 무엇이 있는가, 대체 극장이 있나 영화관이 있나 미술관이 있나? 그런데 촌놈 송성영은 "단지 도시에서만 문화생활이 가능하다"고 규정짓는 건 "사람들의 단편적인 생각"이라며 자신의 시골 문화생활을 이야기해준다.

"문화생활이라는 게 근사한 음악당에서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도취하거나 화제의 연극이나 영화를 감상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단지 정해놓은 틀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시골에서도 이미 문화생활의 혜택을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도시의 문화생활자들은 예술인들이 창조해 놓은 창조물을 감상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시골의 문화생활자들은 예술인들이 창조를 위해 모방하는 본래의 창조물을 그대로 감상하게 됩니다. 감상의 차원을 넘어 대자연이라는 거대한 '문화생활권'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감상자가 보고 느끼기에 따라서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에서 음악과 미술과 문학을 접할 수 있고 또한 보이지 않는 그 어떤 대자연의 경외감에 푹 빠질 수도 있습니다."

대자연으로부터 문화생활을 향유한다! 누군가는 다소 뜬구름 잡는 도인의 말처럼 여길지도 모르겠다. 허나, 보려는 자에게는 보이고 들으려 하는 자에겐 들리지 않을까. 우리 또한 엄연히 하나의 생명, 대자연의 하나이니까. 그도 처음부터 대자연의 경외감에 빠져들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모두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단지 한가로운 시간만 투자하면 거저 얻게 되는 것이니까요. 내가 돈벌이에 목을 매고 있다면, 아마 시간에 쫓겨 이러한 자연의 영상물들을 즐기기는 커녕 당장 눈과 귀, 가슴팍으로 받아들이기조차 힘들 것입니다."

궁금하고, 기대 된다, 그가 말해준 '문화생활'이란 것이.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가든 최신 3D영화를 감상하든 어찌됐든 우린 의자에 엉덩이를 꼭 붙인 문화의 소비자일 수밖에 없다. 허나 대자연의 문화생활에선 창조자로서 참여할 수도 있다니, 어떤 느낌일까. 돈 한 푼 필요치 않다 하지 않는가.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가로운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나와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건 자본이 아닌 자연"

 밭작업 중인 송성영씨. 그는 2002년부터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글을 올리고 있다.
 밭작업 중인 송성영씨. 그는 2002년부터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글을 올리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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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급자족의 깃발을 내걸고 미련스럽게 돈도 안 되는 자연농을 고집"하고 있다. 유기농이라 칭하든 자연농이라 칭하든 거기에도 미련의 급이 있을 터인데, 그는 미련 중에서도 참 미련한 농부다. 요즘 세상에 배추씨를 직접 받아서 심고, 쭉정이들도 감싸 안고, 밭도 죄다 손으로 일구고, 모내기도 추수도 손수 손으로 한단다. 그는 대체 왜 이런 '사서고생'을 하는 걸까? 결국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 삶으로써 그 길을 벗어나기 위함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쭉정이는 그냥 버려야 할 쭉정이에 불과하지만 사실 내겐 쭉정이도 쓸모가 있다. 일찌감치 김장 김치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쭉정이들은 배춧국에 배추무침으로 특별대우를 받아가며 요즘 우리 식탁에 자주 오른다. 배추도 무도 아닌 것들은 닭들에게 환대를 받고 있다. 그것들은 질 좋은 계란으로 변신하고 계분이 되어 마찬가지로 질 좋은 거름이 되고 있다. 우리가 먹을거리로 착취하게 될 땅의 양분으로 되돌려놓고 있다.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생각하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자본은 노름판처럼 막판에는 한 곳으로 쏠리기 마련이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골고루 분배된다."

"내가 자급자족의 깃발을 내걸고 미련스럽게 돈도 안 되는 자연농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는 먹고 먹히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이 아니라 자연에 의지하여 먹고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주겠다는 것이다. 내 가족과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은 엄격히 따지고 보면 자본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비순환성과 파괴성은 너무도 뚜렷이 현실로 나타난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파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보여준 재앙, 누군가의 기름진 뱃가죽을 위해 누군가는 배를 곯고, 자녀의 찢겨진 주검을 부여잡아야 하는 극도의 부조리. 이런 파괴의 양상은 비단 해외토픽감에만 적용되는 건 아닐 게다. 나 자신의 구체적이고 소소한 삶, 우리 가족의 일상과 표정까지도 이미 자본의 논리에 포섭돼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그는 자본을 떠나 자연을 따랐고, 지금도 계속해서 떠나고 따르고자 하기에 이렇게 미련한 농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적게 벌어 적게 먹어가며 소박한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을 살리고 사람살이를 살릴 수 있게 되리라, 그러다 보면 두루두루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지만 가난한 삶은 때때로 아내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고통을 제대로 감싸주지 못하고 티격태격하기 일쑤였습니다. 내 안의 평화조차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하늘 땅 사람을 통한 깨우침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내게 평화로운 기운이 일어나면 당장 내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표정부터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생명력 가득한 밭을 일궈나가면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들의 흔적인 흙... 나 또한 흙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 대지", "흙은 어머니의 젖가슴"이란 말들이 있다. 그는 이 말들을 거의 체화한 듯싶다. 자본을 떠나 자연을 따르며 그렇게 손수 논과 밭을 일구며 농(農)적인 삶을 살아가며 그는 참말 흙 속에 파묻혔나보다.

"흙을 만지고 있노라면 내가 흙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흙이 나를 어루만져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생명덩어리 흙은 나를 일깨웁니다. 나는 흙을 파헤치고 흙은 내 뼛속 깊숙한 곳까지 부드럽게 애무해줍니다. 흙을 어루만질수록 굳어 있던 몸이 풀려갑니다. 하지만 흙과 함께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온종일 흙과 함께 하다보면 몸이 아픕니다. 그 아픔을 견뎌내는 순간, 흙은 온갖 잡스러운 것으로 채워져 있던 머릿속까지 비워줍니다."

그런데 그의 흙 사랑은 단지 위와 같은 감상적 차원만이 다가 아니다. 그 이상으로 치고 나아간다. 그는 흙에서 바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뭇생명들의 현존을 발견한다. 물론 이는 '과학적'으로도 엄연한 사실이다.

"흙을 만졌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은 그것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흔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흙이 되었거나 되어가고 있을 사람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입니다. 일찌감치 떠난 선배며 얼마 전에 떠난 처형 또한 흙이 될 것입니다."

"흙은 내게 피와 살입니다. 흙은 나를 먹여 살리고 나 또한 흙이 될 것입니다. 영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살과 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흙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처자식들 또한 언젠가는 흙과 한 몸이 될 것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살다 간 모든 생명들은 그렇게 흙이 되었고 흙이 되어 내 앞에 있습니다."

이는 필시 놀라운 발언이다. 시적 감수성, 생태적 감수성. 그 어떤 학자도, 교수도, 지식인도 결코 이런 지혜의 말을 꺼내들 순 없을 것이다. 바로 그가 촌놈이기에, 너무도 미련한 소농이기에, 땅에 뿌리박고 살고 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말이리라.

흙을 더럽다 여기며, 흙을 죄다 아스팔트로 덮어 버리고, 흙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농업을 끌어가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에게 그 흙이 바로 나의 할머니라고, 나의 아버지라고, 바로 나라고, 나의 아이들이라고, 나아가 이 지구를 거쳐 간 모든 생명들이라고, 촌놈은 말하고 있다.

촌놈 송성영과 나의 친구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나, 또한 수많은 사람들. 우린 모두 같은 시대, 같은 세상, 같은 24시간을 살고 있다. 허나 촌놈의 삶을 엿보며 느낄 수 있듯, 그 삶의 속도와 향취, 결은 너무도, 확연히 다르다.

다시금 묻는다. 친구야, 행복하니? 우린 행복한걸까? 혹시 우리의 행복은, 계속 유예중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결단을 내릴텐가? 어떤 삶을 살아갈텐가?


촌놈, 쉼표를 찍다 -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명랑 가족 시트콤

송성영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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