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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의 예능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연일 화제다. 경연을 통한 서바이벌이라는 독특한 방식은 방송 내내 논란을 몰고 다녔지만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들려주는 최상의 노래와 공연은 매주 온 국민을 감동시키며 각종 음원차트를 석권하고 있다.

 

<나가수>에 참가했거나 참가하고 있는 가수들의 인기는 수직으로 상승한다. 방송 다음날에는 <나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룬 기사가 넘쳐나고, <나가수>를 분석하는 칼럼들도 줄을 잇는다. 이명박 대통령도 공직자들에게 <나가수>를 인용하면서 '나가수 정신'을 강조하기도 했다. 가히 나가수 신드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나가수>의 열렬한 팬인 나도 휴일 저녁시간에는 어김없이 TV 소리를 키워 놓고 방송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나는 대중음악 전문가가 아니어서 <나가수>가 아이돌 중심의 음악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새로운 역편향으로 작용할 것인지, 혹은 숨은 보석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될 것인지 가수에 대한 잘못된 평가 잣대를 대중에게 강요하게 될 것인지 가늠할 처지가 못 된다. 그저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좋은 가수들의 좋은 노래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돼 기쁠 뿐이다.

 

<나가수>가 이렇게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또 나름 성공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청중 평가단에 의한 탈락 시스템 때문이다. 예술을 혹은 가수를 점수로 매길 수 있느냐, 꼭 그렇게 가혹한 경쟁에 내몰아야만 하느냐는 의구심 뒤에는 바로 이 시스템 때문에 정상급 가수들조차도 매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현실도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안 그래도 치열한 경쟁사회인 한국에서 굳이 가수들을 그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아 경쟁을 시켜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나는 이 질문의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가수들이 살벌하게 경쟁하는 모습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마음을 갖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은 이미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생각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내뱉는 이 말은 반은 맞지만, 나머지 더욱 중요한 절반은 틀렸다. "한국은 치열한 경쟁사회가 아니다."

 

<나가수>의 메시지 "한국은 치열한 경쟁사회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절반'은 물론 열심히 경쟁한다. 유치원생과 초중고생들은 더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려고 말 그대로 피 튀기게 경쟁한다. 대학생들은 더 나은 스펙을 얻기 위해, 그리고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쟁에 내몰린다. 직장인들은 상사에게 까이지 않기 위해, 후배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본격적인 생존경쟁에 나선다. 기업은 기업대로 서로를 밟고 서기 위해 경쟁하고, 대학들은 한 단계라도 더 높은 평가순위를 얻으려고 경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살벌한 경쟁을 하도록 만든 사람들, 누구도 동의한 적이 없는 이 불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만든 사람들, 말하자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를 설계한 아키텍처 같은 사람들은 전혀 경쟁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커다란 파급력을 가진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분야보다 더 치열한 경쟁이 필요한 그런 사람들은 전혀 경쟁을 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한국 사회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면 더 이상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이다. 그렇게 경쟁이 필요 없는 수준 이상 올라간 사람들을 우리는 특권층이라고 부른다. 그 특권이란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다.

 

우리는 대개 무슨 일이 생기면 연줄부터 찾는다. 자식들 군대 보낼 때, 승진할 때, 억울한 일이 생길 때, 심지어 큰 병원에 갈 때에도 정해진 제도와 절차를 우선 따르기보다 윗선의 누군가 힘이 센 사람이 나의 요구를 들어줄 방법부터 먼저 찾는다. 왜냐하면 그 힘 센 특권층은 남들이 다 따라야만 하는 제도와 절차를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경쟁이란 없다.

 

경쟁하지 않는 특권이 광범위하게 보장된 사회는 봉건적인 신분제 사회이지만, 장관 자식이라는 이유로 외교통상부 특채에 쉽게 합격하는 것이 오늘날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대통령과 이런 저런 연줄이라도 하나 있을라치면 대형 국책사업을 따내는 것도 식은 죽 먹기요, 국가의 중요 요직에 감투 하나 쓰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더 쉽다. 그렇게 경쟁의 무풍지대가 되어버린 인의 장막을 우리는 '고소영' 사단이라고 불러왔다.

 

피 말리는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에서 경쟁이 불필요한 이런 집단이 존재한다는 이 기막힌 사실은 한국 사회의 모순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국민들에게 '어륀지'를 가르치며 영어 학습 경쟁에 불을 지른 정부는 정작 FTA 협정 문구하나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 국방의 의무와 준법정신을 강요하는 나리들은 대부분 자식까지 군대 면제이거나 위장전입 하나 정도는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있다. 사회정의의 최후의 보루라는 검찰은 떡값에 스폰서까지 오히려 불의를 향한 경쟁의 선두에 선 듯하다.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층, 고소영 사단 그리고

 

대학은 대학대로 좀 더 우수한 신입생들 뽑겠다면서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하지만, 최근 반값등록금 사태를 통해서 드러났듯이 정작 그렇게 뽑은 학생들을 위해서 대학이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입시철만 되면 평준화 교육이 학생들의 질을 낮췄다며 마치 대학경쟁력, 심지어 국가경쟁력이 떨어질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대학이나 국가의 경쟁력을 갓 스무 살 된 대학신입생에게 뒤집어씌우는 행태는 파렴치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대학들의 입장을 비호하는 <조선일보>조차도 자신이 대학평가를 할 때는 교수들의 경쟁력에 가장 큰 배점을 매긴다.

 

배우는 것이 유일한 임무인 학생들에게 핵폭탄 같은 등록금과 함께 대학경쟁력이니 국가경쟁력이니 하는 어마어마한 책무를 지워 경쟁시키면서도, 정작 대학 본연의 임무인 연구와 인재양성에는 소홀한 것이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최근 카이스트 사태에서도 봤듯이 '살인적인 경쟁'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레토릭이 아니라 가장 사실적인 묘사가 되었다.

 

요컨대 한국 사회는 가장 경쟁이 필요한 특권층이 자신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다른 보통 '평민'들에게 필요 이상의 무지막지한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착취에 다름 아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왜곡된 경쟁구도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은 가장 대표적인 특권층이다.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 관행은 이제 한국에서 당연한 상식이 되어 버렸다.

 

초일류기업이라는 삼성이 아이폰 같은 제품을 못 만드는 이유는 삼성이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모험과 경쟁의 길을 가지 않고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상품을 물량으로 승부하는 손쉬운 길을 가기 때문이다. 옴니아 같은 시간벌기용 '스마트폰'을 내놓아도 기꺼이 구매해 줄 수십만 명의 고객이 있고, 때가 되면 나 몰라라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회사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백혈병에 걸려도 하소연할 길이 없다.

 

재벌의 일족들은 덩달아 손쉽게 돈을 번다. 보도에 따르면 29개 재벌의 총수일가 190명이 이른바 계열사 몰아주기 방식으로 번 돈이 무려 10조에 이른다. 공정한 시장에서의 자유경쟁? 이 세계에서는 그런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경영난 핑계로 노동자 자른 한진중, <나가수>였다면?

 

그리고 한진중공업.

이 회사는 2009년부터 글로벌 경제위기와 영도조선소 수주량 부족 등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추진해 왔고 우여곡절 끝에 올 초 172명을 정리 해고했다. 회사가 내세운 이유는 긴박한 경영난이었다. 회사가 '경영난'에 처했으면 (적어도 그것이 뭐든 간에 '노동난'이라고는 하지 않으니까) '경영진'이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상식이다. 노동자들에게 고통분담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경영진이 응분의 책임을 진 뒤에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한진중공업은 경영진이 잘못한 일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에게 물었다. 더욱 기가 막한 사실은 공권력이 회사의 편에서 정리해고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잡아간다는 점이다. 더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회사가 말하는 경영난이 별로 미덥지 못하다는 점이다. 한진중공업이 운영하는 필리핀 수빅 조선소(100만 평 규모)는 2010년에만 23척을 수주했고 같은 해 연말 주식배당금으로 174억의 돈 잔치를 벌였다. 이 해 달성한 수주계약금이 1조 7천억 원, 같은 해 연말기준 수주 잔액이 5조원을 넘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진중공업이 8만 평 규모의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기 위해 일부러 수주물량을 수빅 조선소에 몰아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회사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기술력과 경영능력 확보? 한진도 다른 여느 재벌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경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치러야 할 그 대가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몫이 되었다. 경영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노동자들은 부당하게도 경영 부실의 책임까지 떠안고 필요 이상의 살벌한 생존경쟁에 내몰린 것이다. "대기업이 잘 되면 국민경제가 살아난다." 적어도 한진중공업에 대해서는 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해고노동자들의 가정과 삶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모 방송사의 부산 방송국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 지역의 한 교수는 한진 사태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다가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인터뷰 내용을 모니터링하면서 흐르는 눈물 때문에 일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그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흘렀다. (관련기사: "작가가 울고 카메라도 울고 나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적어도 '가정파괴범죄'에 관한 한 한진중공업에 필적할만한 흉악범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한진 사태를 <나가수> 식으로 표현하자면, 경연에 참가한 한 가수가 자신의 개그맨 매니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매니저를 잘라낼 구실을 찾기 위해 일부러 경연에서 꼴찌를 한 것과도 같다. 규칙대로라면 이 가수는 퇴출되어야 하지만, 이 가수는 자신이 꼴찌를 한 책임을 물어 개그맨 매니저를 교체해 달라고 요구했고, 놀랍게도 담당PD가 흔쾌히 이 요구를 받아들인 그런 상황이다.

 

프로그램 초기에 경연의 기회를 한 번 더 준 것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였던 기억을 되살려 봤을 때, 실제 <나가수>에서 꼴찌의 책임을 물어 매니저를 교체했다면 아마 그 다음 주에는 <나가수>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졌을 것이다. 172명의 해고노동자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의 실화 다큐멘터리에서는 안타깝게도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지켜지는 최소한의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일주일 내내 온갖 <나가수> 가십거리를 쏟아내는 언론 기사 속에서 '한진' 자체를 찾아볼 수가 없다.

 

7월 9일 이후, 김진숙이 <나가수> 볼 수 있길 희망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가수> 인기의 비결로 현실에서 공정한 경쟁이 실현되고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열망이 투영된 결과라고 한다. 내가 <나가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들이 스스로를 옥죄면서 최고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경쟁에 나서는 그 모습 자체가 보기 좋아서이다. 사실 가수들은 거기서 떨어진다고 해서 더 이상 가수생활을 못하는 그런 극한 경쟁에 내몰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청자들은 떨어진 가수들에게 더 큰 관심과 애정과 격려를 보낼 만큼 성숙해 있다.

 

적어도 한국 사회의 다른 곳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에 정치인들이, 검찰이, 공무원들이, 재벌이, 대학이, 언론사가, 무경쟁의 특권적 울타리를 벗어나 최소한의 필요한 경쟁에 나섰다면 아마 한국은 일찌감치 선진국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사회적 책임의식,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다른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만큼의 경쟁에 정정당당하게 나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말하자면, '노블레스 콩퀴랑시엘 (가진 자여, 경쟁하라! Noblesse Concurrentielle)'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35미터 차가운 85호 크레인 위에는 혼자 6개월 동안 정리해고에 반대해 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이 있다. 그곳은 몇 년 전에도 같은 이유로 이곳에 올라온 김주익이 목을 맨 곳이다. 지난 6월 27일 한차례 공권력이 투입된 뒤 85호 크레인에는 전기도 생필품도 차단되었다. 김진숙이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조치를 요청하고서야 국가인권위가 나서서 회사와 중재했고, 이틀 뒤인 29일 생필품과 의약품을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인질에게 생필품이나 의약품을 공급하기 위해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는 대테러 경찰의 모습이 익숙한데, 2011년 한국에서는 재벌기업과 대테러 경찰이 오히려 영화 속 테러리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김진숙은 말한다.

 

"7월 9일 날 2차 희망버스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 싸움 끝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185대가 와서 당신들이 얼마나 부도덕한 짓을 하고 있는지 당신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지금까지 해왔는지를 굳이 목청 높이지 않더라도 굳이 구호를 외치고 성명서를 낭독하지 않더라도 그냥 온 사람들의 면면들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로 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우리는 6월 11일 보여줬어요. 그래서 사측이 대노했다 합디다. 전 기뻐요. 그 사람들을 대노시킬 수 있어서."

 

7월 9일은 토요일이다. 김진숙이 그날 무사히 크레인을 내려와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다음날 저녁 <나가수>를 볼 수 있기를,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람들처럼 가는 일요일을 아쉬워하며 대한민국 최고 가수들의 감동적인 노래와 무대를 그 또한 편히 즐길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트위터: @ststnight)


태그:#한진중, #나가수,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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