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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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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 울산지역에서 보도연맹원이라 불리던 민간인들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지서 등으로 출두하였다가 유치장·창고 등에 구금되었다. 그 후 이들은 등급으로 분리·구금되어 과거 경력에 대해 조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이 수시로 자행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두 달 후인 1950년 8월 5일부터 26일까지 군인과 경찰은 10여 차례에 걸쳐 이들의 손목을 묶은 채 트럭에 태워 산골짜기 등으로 데려가 집단학살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실위)는 2007년과 2009년 이 희생자 870명 중 412명의 신분을 확인하였다. 이 사건이 울산보도연맹사건이다.

나는 김동춘 교수의 저서 <전쟁과 사회>를 2001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라는 '아름다운 이 강산'의 얇은 표피를 한 장 들어내고 나타난 우리의 추악하고 어두운 잔인한 모습에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국가폭력이 무려 반세기동안이나 이 땅에서 감추어 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은폐된 껍질을 벗겨낸 한학자의 창의적 연구와 정의감에 나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그렇게 김동춘과 나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출판사에서 내게 요청이 왔다. 그의 책 <전쟁과 사회>를 영어로 번역 해 줄 수 있느냐고? 물론 나는 하고 싶고 영광이라고 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제시한 번역마감일이 너무 촉박했고 그래서 부득이 나는 그 제의를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김동춘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은 내가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근무할 때였다. 한 콘퍼런스가 끝나고 집 방향이 같은 우리는 지하철 안에서 한국현대사와 함석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우리는 어떤 세미나에서 만났고, 결국 진실위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학자로서의 감동춘 교수의 끈질김과 집요함을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의감을 존경한다. 이달 말엔 울산보도연맹사건에 대한 대법원 최종판결이 내린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보도연맹사건의 권위자인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래서 1950년 그날 그 구덩이에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학살된 분들의 유족들에게 행여나 판결이 유리하게 내려졌으면 하는 한 가닥 염원을 갖고 말이다. 다음은 지난 26일 김동춘 교수와 성공회대학교에서 나눈 일문일답이다.

 경산유해발굴 기자회견 중
 경산유해발굴 기자회견 중
ⓒ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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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보도연맹 사건이 한국현대사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평가하나?
"울산은 다른 경남 인민군 미점령 지역과 유사하게 보도연맹원들의 희생자 규모가 대단히 큰 지역이었다. 울산은 다른 지역처럼 해방직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남로당이나 좌익단체에 가입했던 농민들, 그리고 자신이 이러한 단체에 가입했는지도 모르는 농민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농민들이, 왜 자기가 죽어야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국가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울산보도연맹사건이다.

1960년 4.19 직후 유족회가 주도하여 유해발굴도 했고 가해자에 대한 고발사건도 있었다. 특히 울산 경찰서에서 관련 자료가 거의 남아있어서 진실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다른 보도연맹 사건 규명의 모델이자 지표가 된다고 판단하여 조사관을 대거투입하고 장기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조사했다."

- 진실위에서 이 사건을 규명한 후 국가에서 공식 사과했다. 이어서 2009년 2월 법원은 "이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심 고법에서는 '소멸시효'라는 이유로 유족이 오히려 패소했다. 대법원에서 이달 말 최종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이 시점에서 최종판결 전에 사법부에 드리고 싶은 조언이 있는가?
"지금까지 국가가 유족들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입도 벙긋 못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유족들이 권리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철면피한 것이다. 고법 판결문에서는 '민주정부수립 이후에는 소송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유족입장에서 보면 가해자의 주체, 가해의 날짜와 장소 등 형사적인 사실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사상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없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부모의 피학살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해야하는 정치적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2005년 진실위가 설립된 이후에도 유족들이 신청을 기피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한 사람이라도 손배소송을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러한 정황을 무시하고 고법에서 시효종결을 주장하는 것은 상식과 크게 배치된다. 따라서 대법원은 이들 유족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유족들이 소를 제기하기 않는 것은 객관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주관적인 판단의 결과였다는 고법의 비상식적인 결론을 뒤집었으면 한다."

-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지 왜 사회에 분열과 갈등을 불러오는 과거사에 매달리는가?"라고 비난하는 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나?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가해자와 그들과 한편인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 편에선 수구언론의 시각이다. 그들은 과거 공권력이 저지른 범죄가 영원히 땅에 묻혀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망자의 시체를 태워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하고, 발설자를 구속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피해자들도 자신의 상처를 건드리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침묵한 점이 있다. 제3자인 우리가 피해자의 상처를 덧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그리고 향후 이러한 일로 인한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이것은 국민의 알권리의 문제다. 만약 국민들이 과거의 잘못된 국가폭력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왜 어떤 조건에서 누가 그러한 일을 저질렀는지를 모른다면, 국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인물들을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잘못알고 선출할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이라도 무고한 민간인학살을 가능하게 했던 법, 제도, 관행을 없애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자신도 그러한 잘못된 법, 제도, 관행 때문에 제2, 제3의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

- 진실위 근무하시면서 느꼈던 보람과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가장 큰 보람은 유족들이 진실규명결정서를 받아보고 매우 행복해 하고 한을 풀었다고 위원회에 대해 감사해 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어려움은 정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한시적 위원회, 반민반관의 특이한 형태의 조직을 처음으로 만들어 아무런 전례를 참고할 수 없는 없는 상태에서 각종 규정을 새로 만들고 운영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다. 유족의 기대치와 국가행정조직으로서의 현실적 한계에서 오는 딜레마도 있었다. 또 다양한 경력과 지향을 가진 조사관들을 지휘하는데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세상의 무관심도 그 중의 하나였다. 과거사 진실규명을 과거의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수구언론과 시민사회의 무관심이 위원회 활동을 고립화시켰다."

 울산보도연맹 기자회견
 울산보도연맹 기자회견
ⓒ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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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사정리와 관련하여 대통령과 국회에 권고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우리가 권고한 것들 중에서 국회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추가 유해발굴과 안치시설마련, 전국적 위령시설 설치, 배보상관련특별법, 과거사재단 설립을 위한 법적인 근거마련이 그것이다. 이러한 조치를 시행하지 않는 것은 국회의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 몇 몇 외국 언론인들은 내게 "왜 민간인학살 피해자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숫자를 제공해 주지 못 하는가" 라고 불평을 토로한 적이 있다. 한국 민간인학살에 대한 권위자로서 이러한 외국 언론인들의 불만에 대해 어떻게 답변해 주시겠는가?
"보도연맹관련 피학살자 수를 산정하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원래 모든 학살사건에서 희생자 수를 정확히 추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더구나 60년 전의 사건에 대한 피해규모 추정은 매우 어렵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지역 피해는 신청자도 없었고 공동체가 유지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조사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1960년 4.19 직후 이 조사 작업을 할 수 있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보도연맹의 경우 전국적으로 보면 군단위로 최소 100 여명에서 최대 800명 정도 희생된 것은 확실하다. 형무소 수형자(기미결수 포함)들이 2만 명 내외 학살되었다. 이후 수복과정에서 부역혐의로 학살된 사람이 보도연맹 희생자 수와 엇비슷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람의 수는 대략 15만에서 20만 명 사이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물론 미군폭격에 의한 희생은 제외한 것이다. 6.25 이전 제주나 남부지방에서도 대략 10만 정도 학살되었다."
 
- 80년대는 노동운동을 연구하셨는데 민간인학살로 전공을 바꾸시게(?) 된 계기나 동기가 있었나?
"원래 노동문제 하다가 한국전쟁, 그리고 인권침해 등 학살문제로 전공을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다. 여전히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장차 논문도 쓸 것이다. 2000년부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위원회에 4년 동안 몸담았기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노동문제에 대해 논문을 쓰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한국노동자의 사회적 처지, 노동현장 폭력의 뿌리를 캐는 과정에서 한국전쟁까지 간 것이다. 나는 이 두 주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소재만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것 같다."

- 해외에서도 한국의 과거사정리와 관련하여 발표 할 기회가 많으셨는데 당시 외국인들의 반응이 어땠나?
"참 안타까운 것은 외국학자들이 한국학자들보다 이 문제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위원회 활동종료 이후 미국 등 외국 대학 10여 곳 이상에서 이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런데 한국대학에서는 전남대 로스쿨을 제외하고는 한 곳에서도 과거사정리 관련 강연이나 특강을 요청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외국의 학위과정에 있는 학생들로부터는 많은 서면 인터뷰 요청을 받았고, 최근에는 아예 이 주제로 공부를 하겠다고 성공회대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낸 외국인 학생도 있다."

- 얼마 전 부산에서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 또 독재자 박정희의 인기는 지금도 하늘을 찌를 정도다.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는가? 또 과거사정리와 관련하여 향후 바람직한 한국사회의 모습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
"이승만과 박정희가 영웅이 되어야 친일, 친독재, 반민주, 부패로 얼룩진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사회 지배층의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이승만 동상세우기는 식민지침략을 정당화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기도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희생당했고, 역사에서 잊혀갔다. 왜 우리라고 자랑스러운 과거를 부각시키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승만과 박정희는 아니다.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천대하지 않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국가라야 국민의 애국심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미약한 한 개인이라도 국가폭력과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피해를 입는 일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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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