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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유단자로, 품새를 선보이는 그 당당한 자세로 이 세상 잘 헤쳐나가길 소망한다. "세진아, 파이팅!"
▲ 승단시험장의 세진이 모습 태권도 유단자로, 품새를 선보이는 그 당당한 자세로 이 세상 잘 헤쳐나가길 소망한다. "세진아, 파이팅!"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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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세진(가명)이라는 여학생이 있다. 착하고, 순하고, 늘 웃고, 인사 잘하는, 그야말로 '순둥이'다. 또, 워낙 아이들과 놀아 주는 것을 좋아해 우리 집 막내조차 친언니처럼 잘 따르는 아이다. 이웃 어른들에게 유난히 깍듯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발아래 뒹구는 쓰레기를 스스로 치울 줄 아는 '범생이'이기도 하다.

집에서는 그 또래 여느 아이들처럼 두세 살 터울의 여동생과 티격태격 다툴 법도 하건만 늘 손을 잡고 다닐 만큼 자상한 언니이기도 하다. 또, 태권도 유단자로 같은 도장에 다니는 아이들로부터도 인기 '짱'이라고 한다. 아무튼, 내 아이가 저렇게만 자라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러워할 정도다. 얼마 전 오후 퇴근길에 세진이를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났다.

"세진이, 이제 어엿한 숙녀 다 됐네. 중3이지?"
"올해 고1이에요."
"고등학생이 벌써 집에 와? 학교가 빨리 끝났나 보네?"
"아, 예…."

평소 활달한 세진이의 모습답지 않게 주저하며 쑥스럽다는 듯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느 고등학교 다니는데?"
"그게… 아저씨, 실은 저 '실업계' 다녀요."

말이 끝나게 무섭게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도망치듯 올라가 버렸다. 아뿔싸. 아무런 생각 없이 툭 던진 질문이었는데, 세진이에게는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오후 이맘때쯤 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을 본 적도 있고, 등하교 때 교복을 입고 있지 않은 모습에서 짐작했을 법도 한데, 자상하지 못했던 탓에 실수한 셈이다.

학교 명칭이 바뀐 지가 언젠데, 요즘 말로 '특성화고'도, '전문계고'도 아닌, 스스로를 '실업계' 학생이라고 답한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따지듯 묻지만 않았어도 그가 느끼는 열패감이 덜 했을 텐데, 굳이 '실업계'라는 말을 꺼내게 한 내 질문은 그에게 어쩌면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흔히들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통성명하면서 맨 먼저 묻는 게 '학번'이고, 자녀뻘 되는 아이들에게는 다니는 '학교 이름'을 묻곤 한다. 딱히 그것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것일 뿐이지만, 자칫 상대방에게는 그 어떤 질문보다 대답하기 껄끄러운 것일 수 있다.

지나치게 둔감한 우리사회

언제부턴가 내 머릿속에 '고졸'과 '전문계고'라는 단어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말인 양 시나브로 지워졌다. 이웃으로 엄연히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영원한 '타자'로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이들이다. 더욱이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인식이 보편화되어, 그들을 아예 경쟁사회의 낙오자로 낙인찍는 실정에 이르렀다.

하긴, 요즘 들어 고등학생 열 명 중 여덟이나 아홉이 대학에 진학하고, 전문계고 중 적지 않은 수가 인문계고로 전환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의 '소수'임에 틀림없다.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대학에 갈 수 없는 한, 또 전문계고 제도가 폐지되고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인문계고로 전환되지 않는 한, 그들 '소수'는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설령 인문계고와 대학 진학률이 100%가 되는 상황이 온다 해도 내부적으로 '소수'는 생겨날 수밖에 없다. 지방대학을 '스카이(SKY)'와 '인(IN)-서울'에 견줘 '지잡대'로 비하하는 것처럼. 특목고와 자사고 학생들이 전문계고를 '소년원'이라고 조롱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둔감하다. 엘리트를 위해 낙오자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거칠게 말해 우리 사회는 제도적으로 그들의 자존감을 철저히 짓밟고 있다. 그들이 지닌 숨겨진 재능을 아예 포기하는 셈이며, 나아가 어릴 적부터 자존감이 훼손된 아이가 과연 우리 사회를 공정하고 정의로운 곳, 더불어 살 만한 곳으로 여기게 될까. 그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은 우리 사회를 위해 진정 시급하고도 절실하다.

항간에 대학 등록금을 반값으로 하자는 요구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해마다 학년 초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제기된 과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한두 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단체는 물론 정치권에조차 불똥이 튀겼고, 심지어 내년 총선과 대선 공약으로 다시 한 번 이슈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 꺼내기조차 새삼스럽지만,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대학 등록금이 비싼 나라라는 오명을 씻고, 대학 운영을 오로지 학생과 학부모가 호주머니를 털어 내는 등록금에 의존하는 비정상적 행태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왜 굳이 '개나 소나' 모두 대학을 가야만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볼 때가 됐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학 진학률은 기형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세계적인 '교육열'이라는 말로조차 다 설명해낼 수 없는 수치다. 과거에는 '교육열'이 우리나라의 발전을 이끌어왔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학력 인플레'는 거꾸로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저해한다.

과연 세진이는 그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무리 남들 다 가니 안 갈 수 없고 체면 깎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지만, 주민자치센터(과거 동사무소)와 은행의 창구 직원은 이미 거의 100% 대졸자이고, 환경미화원과 운전직조차 대졸자로 채워지고 있다. 이런 업무 수행에 대학의 '학문'이 얼마나 쓰일까도 의문이지만, 더 큰 문제는 고졸자의 취업 자리를 잠식한다는 데 있다.

중학교 때 단지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놀림 받고, 성적에 밀려 전문계고로 진학하고 나서는 교복조차 입고 다니지 않을 정도로 주변의 시선을 피하며 살아가다가, 졸업해서는 주위로부터 고졸자라며 무시당하기 십상인 우리 사회의 소외된 청년들을 다시 떠올린다. '청년백수'로 살거나 어렵사리 취업해봐야 고작 '88만 원'짜리 비정규직으로 전전할 그들의 미래는 온통 잿빛일 수밖에 없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수줍어하며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특히 가엾은 어린아이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착한 세진이. 모르긴 해도,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라면 그렇게 '시시하게' 대답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의사, 판사, 검사, 교수에다 유엔 사무총장, 노벨상을 들먹이는 또래 다른 아이들보다 세진이의 꿈이 훨씬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러한 소박하지만 가슴 따뜻한 꿈들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정녕 자신이 바라는 꿈인지, 남이 만들어준 꿈인지도 분간 못한 채, 오로지 '최고'가 되겠다며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는 아이들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세진이들'이 훨씬 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과연 세진이는 그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못할 말을 한 건 분명 아니지만, 적어도 세진이에게는 적잖은 스트레스를 안겨준 질문이었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써 볼 생각이다. 직접 집에 찾아가 사과하는 건 외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다 뭐라고 적을까. 그에게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덕담'이 어디 없을까?

다만, 주위 시선 굴하지 말고 용기를 갖고 네 능력으로 당당히 세상에 맞서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입에 발린' 얘기는 차마 못 할 것 같다. 그가 맞닥뜨릴 우리 사회가 '순둥이' 세진이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 그냥 이 한마디만 적을까 싶다. 내가 아는 세진이라면 편지에 담긴 내 진심을 읽고 흔쾌히 웃어줄 것이다.

"세진아!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힘들고 괴로운 일이 많을 테지만, 아저씨는 언제 어디서든 널 응원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살레시오수녀회 영성사목지 <새벽별> 2011년 상반기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특성화고, #학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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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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