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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로 절반 이상이 타버린 포이동
 화재로 절반 이상이 타버린 포이동
ⓒ 대학생사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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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씨만으로도 마을 전체가 홀라당 타버릴 것이다."


포이동 266번지 화재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판자촌 '포이동 266번지'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날 화재로 96가구 중 72가구가 전소됐고, 주민 180여 명이 집을 잃었다. 화재의 원인은 한 초등학생의 불장난으로 밝혀졌다.

2005년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서울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를 찾았을 때 들었던 말이다. 어렴풋하게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던 나는 '포이동 266번지'를 보는 순간,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타워팰리스 맞은편의 판자촌'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포이동에는 극적인 그림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내가 반드시 들어야 할 삶이 있었다.

슬레이트와 나무판자, 천막을 얼기설기 쌓아서 만들어진 집이 빽빽하게 들어 찬 곳, 포이동 266번지. 판자촌은 온통 타기 쉬운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집 사이 간격이 좁다. 게다가 좁은 면적에 200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어, 불이 날 경우 참혹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포이동을 찾은 학생들은 누구나 "불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워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담배 한 대조차 맘 편히 피울 수 없었다.

마을을 찾아온 이에게는 낡고 허름해 보일지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안식처였기에. 주민들은 화재감시를 위해 마을 곳곳에 CCTV를 설치했고 비상벨을 설치했으며,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는 등 자체 방화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강남구청의 철거압력이 작용한 것이기도 했다. 철거촌에 사는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 용역깡패들이 곧잘 쓰는 방법이 '방화'였기 때문이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잡은 판자촌의 '짐승 같은' 역사

지난 12일 판자촌이 밀집해 있는 강남구 포이동 재건마을 화재로 인해 판자촌 건물 96가구 중 70가구가 불에 타 수십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가운데, 13일 오전 한 이재민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화재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지난 12일 판자촌이 밀집해 있는 강남구 포이동 재건마을 화재로 인해 판자촌 건물 96가구 중 70가구가 불에 타 수십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가운데, 13일 오전 한 이재민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화재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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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은 그 전에는 '부와 명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주거지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다. 2000년대 초, 양재천 가에 건설된 타워팰리스의 호화로운 시설과 가격이 주간지 메인을 장식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워팰리스 앞을 지나, 양재천을 건너자마자 그 바로 앞에 판자촌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대한민국 빈곤문제의 한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구청에 의해 '불법점유자'로 분류되고 있던 그들은 놀랍게도 국가정책에 의해 그곳에 강제이주된 사람들이었다.

포이동 강제이주의 역사는 197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정부는 자활근로대를 결성하여 넝마주이 등을 집단수용했다. 자활근로대 중 일부는 당시 서울 도심지로부터 떨어져 있는 허허벌판으로 이주됐는데 그곳이 바로 양재천 유역, 지금의 포이동 266번지이다. 홍수기면 하천이 범람하는 '생야생' 지역에 길을 만들고 비닐하우스를 짓는 일까지가 모두 강제이주된 주민들의 몫이었다.

주민들은 이 시기를 회상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짐승처럼 살았다"고 증언한다. 대부분이 고물을 주워서 생계를 이어나갔는데, 경찰이 상주하며 주민들의 고물 수거량을 측정하고 수입을 착복하는 등의 일이 관습적으로 이어져나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좋은 고물을 주워오면 "훔쳐온 것"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고문을 하는 등의 일도 서슴지 않았고,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때는 "(외국 손님에게 부끄러우니) 낮에는 마을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경찰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바보 같은 일이었어요."

포이동사수대책위원회의 조철순 위원장이 '그때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마다 덧붙이는 말이다.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 주민들도 학생들도 울었다

1988년 강남구는 당시 하천부지로 등록돼 있던 포이동 주민들의 주거지를 주민들 모르게 도서관부지로 용도변경처리 한다. 이때 포이동 200-1번지로 주민등록 등재돼 있던 주민들의 주소지를 전환하지 않아, 포이동 주민들의 마을은 "지도에도 행정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마을"이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사복경찰 등 경찰관이 와서 주민들에게 자활근로대 사표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요. 좋아서 마을잔치를 벌였어요."

하지만 이는 포이동 주민들의 법적 거주 권한을 말소하기 위한 절차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 1989년에는 개포4동사무소 신축을 위해 원주민을 강제이주했으며, 상이용사 16가구에 이어 공공주차장을 짓기 위해 주차장 부지에 살고 있던 이들을 강제이주시키기도 했다. 모두 강남구청이 추진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주민들에게 토지변상금이 부과되기 시작한다.

"'너희가 이거 한 번만 내라, 성의를 보여라'라고 (지도관이 얘기)해서 힘들게 냈습니다. 그런데 9년 뒤에 내 앞으로 또…."(주민 박동식씨 증언)

첫 변상금은 가까스로 어떻게든 낼 수 있을 정도였지만, 9년 뒤 누적돼 날아온 변상금 앞에 주민들은 망연자실했다. 고물을 더 많이 옮기려 샀던 트럭도, 결혼한 딸에게 마련해준 셋방도 압류당했다. 그렇게 1990년부터 부과된 토지변상금의 총합은 2011년 현재 25억 원에 이른다.

2009년 겨울 강남구청 앞 유령 퍼포먼스
 2009년 겨울 강남구청 앞 유령 퍼포먼스
ⓒ 대학생사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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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주민들의 거주지가 또 다시 일방적으로 용도변경돼 '학교부지'가 됐다. 2007년엔 서울시 장기전세주택 시프트(SHift) 부지로 용도변경돼 일방적으로 발표됐다. 이후 이 계획은 추진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철회되지도 않은 상태다.

드디어 주민들의 분노가 터져나왔으며, 이 일을 계기로 '포이동266번지사수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이후 포이동의 현실이 MBC <PD수첩> 등을 통해 방영되고,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 국가의 강제이주 사실을 인정할 것 ▲ 빼앗아간 주민등록을 복원할 것 ▲ 토지변상금을 철회할 것 ▲ 무단점유자라는 오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강남구와 서울시를 상대로 싸움을 전개해나갔다.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유령옷을 입은 채 포이동 주민들은 강남구청을 찾았다. 서울시청을 찾아가 오세훈 시장과 만나기도 했다. 강남구청을 찾아가 당당히 주민등록 등재를 요구하고 유령옷 퍼포먼스를 펼친 날, 주민들은 유령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였다. 지켜보던 대학생들도 함께 울었다.

"우리 애랑 놀지 마라"던 친구 엄마 말에 상처

2009년, 드디어 강남구청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의 거주사실을 인정하고 주소지로 인정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주민등록이 등재됐고, 강남구청 주도로 마을 내에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됐다. 2011년엔 토지변상금 철회에 대해 지침을 강구하기로 했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뤄나가고 있는 포이동의 싸움. 하지만 보다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들이 남아있다. 바로 열악한 주거환경과 주민들의 건강, 그리고 가난의 대물림이다. 이 근본적 문제들 속에서 가장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포이동의 아이들일 것이다.

2006년, 이런 문제의식 하에 '포이동인연공부방'이 문을 열고, 대학생 자원교사들이 꾸준히 이 공간을 찾아왔다.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매일같이 열리는 포이동인연공부방. 그 공간에서 아이들은 선생님을 얻었고, 대학생들은 세상을 배우고 아이들과 친구가 됐다.

그리고 포이동을 다녀갔던 전국의 대학생들은 각각의 지역에서 공부방과 장애아동 주말학교 등을 만들기도 했다. 이곳은 현재 '평화캠프'라는 이름의 비영리 민간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포이동인연공부방'의 교사들의 따뜻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은 그대로이다. 포이동 266번지 구석구석에 "고물을 줍는 아버지가 창피해 모른 척 지나쳤던 딸"과 "친구들이 집을 알아챌까 두려워 멀리 돌아서 집에 왔다는 아들", "우리 애랑 놀지 마라던 친구엄마의 말에 상처를 입고 돌아온 아이"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게다가 사교육의 중심지 강남에서, 포이동 266번지 아이들만은 대학에 거의 진학하지 않는다. 포이동에서 2년제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는 단 17%. 강남 전체 평균 53%에 훨씬 못 미친다.

이런 현실을 보고 견딜 수 없었던 선생님들 중 일부와 포이동을 다녀갔던 대학생들이 사회변화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연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이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사람연대라는 학생단체다.

포이동 주민 모두를 위한 '벽돌집'을 지금 그 자리에 지어라

국가권력의 강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것이 포이동 이주의 역사다. 그 매듭을 짓는 것 또한 정부당국이 되어야 한다. 우선, 화재의 위험과 열악한 주거환경이 문제로서 꾸준히 제기돼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수방관해온 강남구청이 이번 화재에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지는 방법은 물론 근본적인 주거대책을 마련해,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지금 살던 그 자리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게끔 하는 일이다.

포이동 주민들은 기쁠 때 함께 즐기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도우며 '공동체'를 실현하며 살아왔지만, 그들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은 인간 이하의 것이었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다. 국가권력의 탄압과 위협 속에서 오랜 세월을 견뎌온 포이동 주민들에게, 이제 서울시와 강남구청이 나서서 '따뜻한 집, 비가 새지 않는 집, 곰팡이가 슬지 않는 집, 쥐가 다니지 않는 집'을 마련해야 되지 않을까?

포이동의 화재는 오래 전부터 예고되었고, 화재의 원인은 초등학생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다.


태그:#포이동, #266번지, #화재, #대학생사람연대, #포이동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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