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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우 변호사가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서 장일순씨가 써준 '수천심'이란 글씨 앞에 서 있다.
 홍성우 변호사가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서 장일순씨가 써준 '수천심'이란 글씨 앞에 서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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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종, 4만6천쪽의 변론자료가 100시간의 증언과 함께 되살아났다. 사법과 언론의 암흑기를 온몸으로 헤쳐온 한 인권변호사의 사법사와 민주화 역사의 살아있는 증거다. '홍성우 변호사의 증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인권변론 한 시대>(경인문화사)가 그것이다.

4만6천쪽의 이 원자료는 2007년도에 한인섭 교수가 센터장으로 있는 서울대 공익법센터에 다 넘겨진 후 해체되고 분류되어 2009년까지 CD에 담겨졌다. 그 다음에 한인섭 교수와 홍성우 변호사는 세 달 동안 무릎을 맞대고 자료를 근거로 박정희 유신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암울한 현대사를 복원해 냈다. 그렇게 해서 5년 만에 나온 책이 이 대담집이다.

지난 27일 서울 양재동의 호젓한 사무실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인 홍성우(73) 변호사를 만났다.

"막내인 내가 나서 단독판사-배석판사 집합에 총대 메"  

- 1971년 '사법파동' 당시 소장 판사로서 판사들의 항의사표를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대법원장 면담에서 검찰의 사법권 침해 사례를 제시했던데.
"그때 이범열 부장판사에 대해 영장이 청구되었는데, 검찰에선 더러 있었지만 현직 부장판사를 독직혐의로 영장청구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러니 법관들이 흥분했죠. 검찰에서 미행을 붙여서 판사들 재판업무 관련 출장 것에 대해 꼬치꼬치 뒷조사를 하고 다녔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치욕스러워서 법원 전체가 흥분했죠. 그래서 그때는 판사들 협의체가 없었기에 서울형사법원 단독판사 막내였던 내가 나서서 단독판사-배석판사들이 집합하는 데 총대를 멘 거고 일단 모이니까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전부 사표 내자고 결론이 난 거죠."

- 당시는 서울지방법원 소속이었나요?
"서울형사지방법원이었어요. 민사와 형사 단독이 따로 있었어요. 형사에 단독판사가 18명 있었는데 내가 18단독이었어요. 서열이나 기수로 가장 막내가 제일 설치고 다닌거죠. (웃음) 그런데도 계속 앞장서고 그러는 게 병이에요. (웃음)"

- 1971년 10월에 개업했는데, 가난해서 개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5남매의 맏이인데 딸린 식구가 많아서 사실은 배 고파서 그랬어요. 1년 전부터 72년 봄 즈음에 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선배인 김공식 판사하고 함께 개업하기로 계획했는데 사법파동을 겪고 나니까 이왕 나가려고 마음먹은 터에 일찍 나가자고 해서 같이 나왔죠."

- 그때도 전관예우가 있었나요?
"그때는 전관예우가 더 심했던 때입니다. 제가 형사단독판사를 했는데 형사단독을 지방법원의 꽃이라고 했죠. 합의사건에 가면 중범들을 재판하니까 판사가 봐주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재판관이 재량권을 발휘할 소지가 많을수록 말하자면 권한이 센 겁니다. 그래서 그때는 형사단독판사가 우스갯소리로 '서울시장과 맞먹는 자리다'는 말도 했죠."

- 개업한 후 얼마 안 되어서 아버님께 집도 사드렸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개업 초기에 사건이 가장 많이 들어옵니다. 그때 우리 식구가 영등포 신대방동의 스무 평 집에서 부모님과 동생네 식구가 같이 살았는데 1972년 여름이 될 무렵에, 개업하고 반 년 정도밖에 안되어 부모님께 갈현동에 스무 평 되는 집 한 채 사드려 그쪽으로 모셨죠."

- 그때 그만한 집 한 채 가격은 얼마 정도였습니까?
"당시 200만 원 정도였어요. 그때 작은 사건 하나 맡으면 수임료가 10만 원, 20만 원 하던 때였습니다."

"주범인 김현장이나 문부식은 노 변호사가 건드리지 않아"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는 홍성우 변호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이다.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는 홍성우 변호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이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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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이 판사를 잠깐 하고 개업했잖아요. 법조인 노무현과의 인연은 없었나요?
"거의 없어요. 부산 미문화원 방화(이하 부미방) 사건 때 이돈명, 황인철 변호사와 저, 이렇게 셋이서 서울에서 부산을 왔다 갔다 했는데 그때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봤어요."

- 일부 언론에서는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부미방 사건의 주범 중 한명이었던 김현장을 변호했다고 하는데.
"요즘 중앙-동아일보에서 그렇게 보도하는데 말이 안됩니다. 노무현 변호사는 김현장을 알지 못합니다. 부미방 사건 관련 대학생들이 10명이 됐어요. 노 변호사가 부산 부림 사건에서 처음 시국사건 변호를 맡은 것을 계기로 부미방 사건 변론에 가담해 부림 사건 관련자들과 가까운 대학생들을 맡아 변론을 했지요. 주범인 김현장이나 문부식은 노 변호사가 건드리지 않았어요."

- 직접 사건을 담당하지 않았어도 그 대학생을 맡아서 하다보면 김현장을 만나지 않았을까요?
"만난 적이 없었을 겁니다. 김현장과 문부식 등 주범은 우리(서울팀)가 만났어요. 재판 다 끝나고 후일에 김현장을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안 만났을 겁니다. 더구나 김현장은 광주 사람이어서 그 후에도 부산 쪽으로는 안 갔을 겁니다."

- 노 변호사가 변론을 맡은 학생들을 기억하시나요?
"노무현 대통령이 쓴 책에도 부림 사건과 부미방 사건을 수임한 기록이 나와요. (기록을 찾아보면서) 여기 보니, 김화석이네. 근데 김화석이는 방화행위에 직접 가담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 주변에 있었을 겁니다. 김화석이, 이 친구를 통해서 류승렬, 이미옥, 최인순, 김지희 이런 친구들이 노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했죠.

지금 노 대통령을 부산저축은행과 연계시키는 것 같은데, 김현장과의 관계는 잘못 짚은 거예요. 그 후의 일은 모르지만. 부산저축은행의 주류 인맥이 광주일고 쪽은 맞는데, 그 사람들이 노무현하고 어떤 연계를 가질 수 있다고는 봅니다. 그렇지만 김현장은 아녜요."

"박형선(부산저축은행 대주주)은 민청학련으로 광주에서 재판 받아" 

- 일부 언론에 따르면, 그 당시 노 변호사가 변론을 맡은 김현장의 친구인 박형선(현 부산저축은행 대주주)과 알게 되었다는 것이던데.
"김현장이랑 박형선이 친구인가요? 박형선은 나도 알지만, 윤한봉과 처남매부 사이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을 내가 했잖아요. 그 중 전남 지역 관련자가 윤한봉, 김정길, 이강 이렇게 세 명이에요. 그래서 윤한봉이는 내가 잘 압니다. 윤한봉의 누이동생이 박형선의 부인입니다."

- 박형선씨도 민청학련 사건 연루자던데 다른 전남지역 연루자는 없었나요.
"민청학련 사건 연루자가 100명이 넘어요. 1진이 서른두세 명 됐는데 2진에 가면 더 많아요. 근데 내가 1진은 이름을 다 기억하는데 2진 사람들은 다 기억은 못해요. 제정구다, 유홍준이다, 이런 사람들이 2진이에요."

- 그럼 박형선 회장은 그때는 몰랐고 나중에 아신 건가요.
"박형선이는 광주에서 민청학련 관계자로 재판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군법회의로 서울에서 재판받은 사람만 아니까 그때는 박형선을 몰랐어요."

- 1970년대 시국사건 중에서 "민청학련 사건은 내 운명을 바꾼 사건"이고 "1974년은 내가 한마디로 신세 망친(?) 해"라고 하셨는데 사건을 수임하시게 된 계기는?
"경기고-서울대 10년 후배 중에 고등법원장을 지낸 이우근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당시 (민청학련 사건 주범인) 이철과 경기고 동기동창이에요. 그때 사법연수원생이던 이 친구가 황인철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 실무수습을 할 때인데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니까 황인철 변호사한테 사건을 맡아달라고 통사정을 했어요. 당시는 이철이 마치 간첩의 수괴처럼 나올 때입니다. 이철이 공산주의자고 폭력혁명을 주동했다고 나오고 지명수배가 되어 체포되어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하는데, 사건을 맡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사정을 한 거죠. 그래서 3년밖에 안된 나같은 초짜들이 맡기에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지만, 황인철, 임광규 변호사와 내가 나선 거예요."

- 숱하게 많은 시국사건으로 인도한 '운명을 바꾼 사건'과의 인연으로는 평범하네요.
"사실 처음에는 깊은 뜻도 없이 맡았어요. 우리가 보기에도 학생들이 이렇게 몰린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당시 군사정권이 어땠습니까? 어마어마한 탄압정치를 하고, 보나마나 이거 사건 만들어서 잡는 것 같은데 워낙 서슬 퍼런 군부정권이니까 나설 용기는 없지만, 사건은 여하튼 이 학생들이 억울하게 몰려 있구나, 하고 짐작은 했죠. 그래서 맡자고 하기에 해보자 한 거죠."

"변호사가 직접 고발한 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처음"

 홍성우 변호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이다.
 홍성우 변호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이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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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이돈명, 조준희, 황인철과 함께 '인권 변호사 4인방'의 진용을 짠 홍성우 변호사는 이후 김지하 사건, 3.1민주구국선언 사건, NCC와 선교자금 사건, 리영희 교수 필화 사건,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 동일방직 노조탄압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남민전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오원춘 사건,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 서울대 학원프락치 사건, 민주화추진위 사건,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김근태 고문 사건, 대우자동차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민중교육 사건, 서노련 사건, 민미연 사건, 보도지침 사건, 사노맹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1970~1980년대의 거의 모든 공안-시국사건을 변호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1970년대에 이병린 변호사와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1980년대 들어서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 변호사 165인 명의로 재정신청을 내는 등 인권변론 역량의 최대치를 구현해 불의한 권력과 싸우고, '정법회'외 '민변'을 결성해 대표간사를 맡고, 마침내 전두환-노태우를 내란죄로 고소함으로써 고소시효에 대한 해석의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 1980년대 시국사건 중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김근태 고문, 박종철 고문치사와 함께 5공정권의 대표적 폭압 사건입니다. 변호사 9인이 직접 고발장을 내고, 165인이 재정신청한 사법사에서 유례없는 사건인데 김수환 추기경의 편지를 동원한 '언론플레이'가 있었더군요.
"그때는 정말 적극적으로 활동할 때였죠. 변호사가 고발한 건 저도 처음이었는데, 이건 소극적으로 대처할 사건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대처를 했죠. 그때 변호사를 고발인단으로 구성하는 것은 조영래, 이상수 변호사 등 젊은 변호사들이 아이디어를 냈던 걸로 기억돼요."

- 그때는 김상철 변호사도 같이 하지 않았나요?
"김상철 변호사가 김근태 고문 사건까지는 열심히 같이 했죠. 김수환 추기경을 동원한 '언론플레이'도 김 변호사 아이디어였죠. '권양한테 용기를 잃지 말라고 편지를 한 장 써주시면 우리가 전하겠습니다'라고 추기경께 말씀 드려 친필 편지를 받아 권양을 면회하기 전에 기자들한테 알려 처음으로 권양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었죠. 그걸로 촌철살인의 효과를 냈어요. 당국의 공작으로 여러 가지 말이 돌아다닐 때에, 누가 봐도 추기경이 권양의 손을 들어준 것이죠."

홍 변호사는 우리나라가 반공 이데올로기가 심하다보니 인권운동을 함께 했던 변호사들이 나중에 떨어져 나간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본다. 또 더러는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을 겪고선 '이게 아닌데'라며 돌아선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그런 진보적인 경향은 민청학련 때도 있었어요. 민청학련 강령을 읽어보면, 어떤 대목은 무시무시해요. 따지고 보면, 그 전에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도 학생들의 급진적 성향은 있었어요. 4·19 직후에 '가자 판문점으로' 그랬잖아요. 학생운동이 위험하다기보다는 당시의 건강한 운동정신의 하나라고 저는 이해를 합니다."

"공산주의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생각을 처벌하나?"


- 대담집과 대비되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책과 발언이 역시 화제입니다. 최근 출간한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에서 "(박정희 시대 좌익운동과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 발표된 대부분의 보도내용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다"면서 민주화운동 명분 하에 공산혁명을 지향했던 일부 좌파세력 이제는 인정하고 반성해야 좌우소통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논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분이 지적한 5개 사건 중에서 2차 인혁당 사건이 민청학련사건과 관련된 거예요. 대담집에도 언급했지만 이철 그룹의 학생운동과 대구의 인혁당 그룹은 검찰이 억지로 가져다붙인 것이어서 우리는 서로 떼는 작업을 했아요. 민청학련 지도부가 이철한테 경북대 학생회장 출신인 여정남을 통해서 대구 혁신세력의 지시를 받아 학생운동을 조직했다는 건 말도 안돼요. 자존심 문제입니다.

그래서 황인철 변호사와 나는 '여정남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붙여놓은 사건을 분리하는 작업을 했어요. 인혁당 사건 관계자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요. 지금도 나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같이 뒤집어쓰면 서울 학생들 쪽에도 여정남이와 같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었어요. 다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행동에 옮긴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게 사형까지 가나요? 그 속에 공산주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처벌합니까?

안병직씨가 그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회를 꿈꿨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단정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남민전' 사건인데, 남민전이 이중조직으로 돼 있었고 수뇌부는 종북주의나 사회주의 경향이 있었던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요. 문건이 나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운동방식이 우리의 민주화운동 방식과는 다르잖아요. 그걸 부인할 순 없어요."

- 재벌 집을 털어서 혁명자금을 조달하려던 방식을 말하는 거죠?
"(웃으며) 자금조달을 하지도 못했어요. 남민전 사건에 대해서는 안병직 교수가 그렇게 이야기 할 만한 소지가 있죠. 남민전 사건을 변론하면서도, 기본적인 자세는 이건 소위 '아류 운동권의 돌출적인 움직임이다' 그렇게 봤어요. 실제도 그렇고. 남민전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민주화운동 주류에 있던 사람은 아니에요. 경북지역 혁신계 사람들이 시작한 거고, 가담의 정도가 다릅니다.

다른 시국 사건은 변호할 때 '애국충정에서 나온 건데 학생들이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 이런 입장이었고,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용기나 신념을 보호해주고 북돋아주는 것이 변호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런 사건을 맡으면 굉장히 곤혹스럽죠. 하지만 이런 사건도 군부독재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돌출적인 운동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최대한 변론을 할 수밖에 없죠."

- 민청학련 사건부터 숱하게 많은 시국 사건을 맡아오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거나 인상적인 의뢰인을 꼽는다면?
"그런 질문이 참 곤혹스러운 건데 한두 사람을 꼽을 순 없고요. 사건을 꼽는다면 우리가 제일 공들여서 하고 열심히 하고, 힘들게 한 건 김지하 사건 같은 게 있고요. 부산미문화원방화 사건도 있어요. 그야말로 난이도가 높은 사건이에요. 반공법, 국보법 위반으로 몰린 사건을 변호하고 풀어내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힘도 많이 들였고 그랬죠.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부터는 학생운동이 상당히 과격해졌습니다. 1980년에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광주가 무참히 진압되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그러고 나니 자연스레 학생운동이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때는 미국까지 광주학살에 동조하고 미국의 협조와 묵인아래 이뤄졌다고 보았으니까 반미 성향이 그때 나타난 것이거든요. 군부정권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력도 배제할 수 없고, 혁명의 방법밖에 없다는 학생운동의 논리가 정립된 것이죠."

"1997년 이회창후보 중앙선대위원장 맡은 건 개인적 인간관계 작용"

 홍성우 변호사가 사무실로 걸려온 출판 축하전화를 받고 있다.
 홍성우 변호사가 사무실로 걸려온 출판 축하전화를 받고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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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집에서는 '외도'라고 표현했지만, 현실정치 참여해선 성공하질 못했는데 그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정치 이야기는 안 하려다가 한두 마디 한 거예요. 현실 정치판이 그리 만만한 판이 아니더라고. 우리같이 몸싸움 약한 사람은 가서 못 견뎌요."

- 그때가 1997년도죠?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참여한 것이.
"1996년에도 지역구 출마를 한 번 했고요. 1997년에 이회창후보 중앙선대위원장을 했죠."

- 그동안 걸어온 길에 비춰보면 의외였는데 이회창 후보와의 '학연'과 법조계 선후배 관계 때문인가요?
"학교와 법조계 선후배 관계여서 개인적 인간관계가 작용한 것도 많고요. 그때는 이회창씨가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하면서 그때까지의 소위 민주화세력, 개혁세력을 자기 정치 기반의 일부로 포용하려고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날 끌어들이려고 했지요. 그래서 내가 이회창 캠프에 합류하면서 '조그만 부대'를 같이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쪽에서도 그걸 기대한 것 같아요. 그때 들어간 사람(이부영, 김성식, 정태근 등) 중에 지금도 남아있는 사람이 있어요."

- 끝으로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들려 주시죠.
"한국이 눈부신 경제적 발전상을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건 좋지만 마치 박정희 독재가 닦아놓은 어마어마한 공적인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상대적으로 경제개발과 병행해서 이뤄진 민주화운동은, 그 공적이나 가치를 폄하하려는 보수적인 시각들이 짙게 깔려 있어요. 그건 크게 잘못된 것이고, 경제발전도 민주화와 동시에 이뤄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나라다워지려면 민족의 발전, 공동체의 발전이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이 함께 가야 진정한 소위 선진사회도 이룰 수 있는 거고. 경제적 성취라는 것도 민주화에서 이뤄지는 해방과 자유, 그리고 거기서 얻어지는 인간의 창의성 보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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