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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의 봄은 광주만이 아닌 전국적 물결이었습니다. 신군부에 의해 광주가 아닌 전주가 목표가 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북을 포함한 모든 지역 운동사가 정리돼야 5·18은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980년 봄,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주와 전북의 청년들 역시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사명감에 현실로 뛰어들었고, 그래서 기어이 상처를 입어야 했다. 전북지역 유일의 5·18관련 민간단체 '5·18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 회장을 맡고 있는 이송재(54)씨도 마찬가지다.

 

이씨는 1976년 전북대 생물학과에 입학 후 1979년 4·19와 관련돼 1차 제적을 당한다. 그해 10월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으나,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가 12·12사태를 일으켜 다시 독재가 시작된다.

 

1980년 3월 이씨를 포함해 제적됐던 대학생들이 대거 복학하고, 총학생회가 부활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해 5월은 서울과 광주, 전주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가두시위와 농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18일 0시를 기해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1시간 뒤 제7공수여단은 농성 중이던 전북대에 진입해 무자비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연행해 가기 시작했다. 광주가 주요 목표물이었지만 전주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때 이세종 열사가 사망했다. 이씨는 "유인물을 담당했던 세종이는 굉장히 성실하고 착했다"고 회고한다.

 

다행히 이씨는 그 자리에 없어 연행을 면했으나 곧바로 지명수배가 내려져 붙들리고, 2개월여를 갇힌 뒤 풀려나지만 다시 제적생이 되고 만다.

 

"얼마 동안은 세종이가 죽었다는 것도 몰랐어요. 모든게 혼란스러운 시대였거든요. 끌려갔을 때는 꼭 내일 죽을 것만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어요. 신체적 학대도 그랬지만, 심리적 공포가 정말 컸던 것 같아요."

 

31년이 지난 지금, 이씨를 포함한 5·18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는 동시대 동일한 아픔을 겪으며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던 지역민들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최초 희생자인 이세종 열사를 비롯해 그 당시 희생당한 학생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상징물이 전북대에 세워져 있고, 매년 5월 기념식 등이 펼쳐지지만 민주화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광주에 가려 전북의 운동사는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복원된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전주, 전북의 운동사가 뿌리를 복원했을 때 한국민주화운동사도 완성될 것으로 봅니다. 제 삶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죠."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518, #민주화운동, #광주민주화운동, #전주민주화운동, #이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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