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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화려한 방학

시골 중학교의 2학년이던 1980년 5월 어느 날, 우리에겐 아무런 조건 없는 열흘간의 꿈같은 휴가가 찾아왔다. 선생님들이 하루아침에 광주에서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지 이틀이 지난날이었다. 뜻하지 않은 교사들의 공백 상태가 빚은 부득이한 휴교령이었는데, 사춘기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방학이었다.

평소 선생님들은 광주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하나같이 출퇴근하셨다.

'옥련봉 머리 위에 해가 솟으면 시냇물 기름진 땅 금빛이 나네. 굳세게 슬기롭게 커가-는 형제 모여서 오순도순 꽃밭 이루세.'

애국조회에서, 애향심 짙은 교가를 제창할 때면 교직원 일동도 우리랑 같이 한 하모니를 이루지만 선생님들 중 누구도, 수려한 옥련봉 발치의 맑은 물이 흐르는 기름진 고장의 원주민과 더불어 후진 문화를 공유하려는 하심을 내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선생님들은 편도 두 시간가량이 소요되는 그 먼 거리를 기차로 통근하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했다. 학생들이 골짜기 동네에서 버스로 자전거로 또는 도보로 등교를 완료하고 한참 지난, 수업이 임박한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얀 도회지 얼굴의 선생님들이 학교 앞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1980년 5월 어느 날 어김없이 기차는 도착지인 이양역에 도착했는데, 광주발 승객을 단 한 명도 싣고 오지 않았다. 그 전날부터 기차와 버스를 비롯한 모든 교통수단은 광주로 진입하지 못한 채 군내 구간만 하릴없이 반복 운행하고 있었다. 광주는 고립되었고(당시는 반대로 우리가 고립된 줄 알았다) 광주에서 출근해야 할 선생님들은 한 명도 오지 못했다.

그나마 인근 옆면에 사는 체육교사 한 분만 출근했다. 하지만 전교 학생이 군내에서 가장 많은 공립학교 학생들을 혼자서 감당하기엔, 학생들 군기 몰이로 악명 높던 그 체육선생에게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교장도 교감도 없는 학교에 한 명 남은 유일한 교직원 재량으로, 그는 기약 없는 방학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영화 <화려한 휴가> 중 한 장면.
 영화 <화려한 휴가> 중 한 장면.
ⓒ ㈜기획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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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광주가 지금 심각하다. 그런고로 선생님들께서도 오시지 못하고 그러니, 당분간 방학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여러분들 괜히 어수선한 틈을 타 몰려다닌다거나 장터를 기웃거리거나 하지 말고 가정에서 해당 단원별 학습, 착실히 자습하기 바란다. 각 부락별로 별도의 지시가 갈 때까지 모두 얌전하게 보내도록, 알겠나!"

가정에서도 꾸준하게 학생의 본분을 유지하며 근신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었다. 우리는 화창한 봄날에 얻어걸린, 예정에 없던 방학을 맞았다. 그리고 이 방학을 유익하게 보내느라 시골 면소재지 내에서 허용하는 물리적, 인위적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화려한 휴가를 즐기는 데 전력했다.

만약 정상수업이 진행되었다면 꼼짝없이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때문에 시험의 압박에서 해방된 안도감까지 더해져 우리의 임시 방학에 대한 행복감은 배가 되었다. 때맞춰 광주에서 폭도들이 난동을 일으킨 덕에 우리에겐 정말이지 뜻하지 않게 즐거운 방학이 주어진 셈이었다.

죽을 고비를 무릅쓰고, 꼬박 이틀을 걸어서 광주를 빠져나왔다는 이웃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의 유언비어는 결코 믿을 바가 못 되었다. 뉴스에서는 미리 불순세력들이 유포하는 유언비어에 절대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지 않았던가. 화창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봄날 어디에도 심각하다는 광주 상황을 짐작할 만한 징후는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이 봉행되고, 미인들은 화려한 비키니 몸매를 뽐내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환각제에 고무된 공수부대 아저씨들이 화려한 휴가를 자행하고 있을 무렵에 시골 중학생인 우리도 못지않게 화려한 방학을 즐겼다. 그래서 우리는 내친김에 간절히 기원했던 것이다. '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폭도들이 한, 한 달간만 더 데모를 해부러라!'

꿈같은 휴가가 열흘쯤 흘렀을까, 동네 마이크에서 중학생들은 방학이 끝났으니 다음날 등교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노처녀 영어 선생님의 히스테리컬한 영어발음과 찬란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구분 짓느라 열변을 토하던 사회 선생님의 큰 눈망울이 슬그머니 그리워지려던 무렵이었다. 가정 과목을 가르치던 초임 담임선생님은 마침 여성의 신체구조가 그려진 도면을 토대로 우리에게 성의 신비를 이야기하시느라 자주 붉히셨는데…, 이제 선생님도 오셔서 다음 단원 임신과 출산의 경위를 추적해가는 심화학습으로 나아가야 할 참이다.

[# 장면 ①] 1995년 가을의 5월 <꽃잎>

"광주시민 여러분 그때 그 복장으로 금남로로 모여 주십시오!"

그런 방이 붙은 것은 1995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광주시민들은 15년 전 5월 봄날에 입었음 직한 그 시절 그 복장을 하고 금남로에 모여 달라는 호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처절한 목소리의 여성 가두방송이 아닌 지방의 언론매체를 동원한 당당한 모집 공고였다. 80년 5월 봄날을 그린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은 가을에 촬영되었다. 

"나도 시민군으로 나가봐야지. 그때요 직접 싸운 건 아니지만 동네 아저씨들 하는 것 본 대로 한다면 나도 자신 있거든요."
"영화에 나오고 싶은 마음은 아는데 아서라. 그때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네가 뭘 안다고. 그리고 넌 한다면 시민군보다는 계엄군이 어울려 인마."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무슨 공부를 하는 모임의 회원들이었다. 그날은 공부는 뒷전이고 조만간 있을 <꽃잎> 촬영 이야기로 흥분된 상태였다. 남자 회원들은 출연 문제를 놓고 서로 옥신각신했다.

"예에? 형은 뭔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어디로 봐서 계엄군이라는 거예요? 재수 없게 시리."
"야, 다 시민군 역만 하면 어떡하나. 이번 영화는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연할 거라니까 계엄군도 많이 필요할 거 아니냐. 그날의 진실을 밝힌다는 차원에서 누군가는 악역도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넌 인마 딱 적격이다. 누가 봐도 너 계엄군 스타일이지 시민군은 절대 아니다. 어어? 째려보니까 정말 똑같다야."
"아이 씨! 기분 나쁘게 계엄군이 뭐예요. 형은 평소에도 나 은근히 무시하죠? 형님이 오히려 딱 공수부대원이네요. 배부른 임산부 대검으로 찌르는 잔인한 역할, 형이 그 역할 하면 감독이 엄청 칭찬할 겁니다."

촬영 당일 금남로는 교통이 통제되고 그날처럼 '부처님오신날' 봉축탑이 세워지고 '새 전남 새 광주' 아치 모형이 가로놓였다. 내가 촬영장을 찾은 시간은 오전 11시 무렵이었는데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으로 도시가 초토화된 뒤였다. 도로 가득 시체가 널려 있고 부상자들이 쓰러져 있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주인공은 당시 16살 배우 이정현이었다. 자줏빛 원피스의 주인공 소녀는 죽거나 쓰러진 시민들 사이에서 죽은 엄마와 몇 미터 간격으로 쓰러져 있었다. 촬영 과정은 지루하리만치 더디게 진행되고 같은 신을 몇 번씩 되풀이했다.

영화 <꽃잎> 중 한 장면.
 영화 <꽃잎> 중 한 장면.
ⓒ 미라신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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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엄마!, 똑바로 못해! 왜 그렇게 몰입이 안 돼!"
감독이 지적하자 주인공 엄마 역을 맡은 배우는 좀 더 처참한 모습으로 꼬꾸라진 체위를 연출하느라 고심한다. 가녀린 몸매의 주인공 소녀는 고등학생 오빠의 발목을 베고 쓰러져 있다.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 가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당시 계엄군과 총 들고 직접 싸웠거나 가까이에서 목격한 사람들이다. 시민 사이에 실제 배우들이 중간 중간 섞여 있다. 엑스트라로 참여한 사람들 못지않게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다. 구경꾼들은 주로 주인공 소녀의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소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이 다리를 베고 있는 조연 배우에게 속삭인다.

"오빠, 다리 저리지."
"아니, 괜찮아."

괜찮다는데도 소녀는 남자배우의 다리를 미안한 듯 몇 번 비벼 주고서 고쳐 베고 눕는다. 멀리 광주은행 본점 골목에선 한 떼의 계엄군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태세로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눈 채 감독 사인을 기다리고 있다. 광주상업고등학교 학생 전원이 계엄군 역할로 차출되었다.

"자자, 점심 먹고 오후에 다시 촬영 재개합니다. 협조해주신 시민여러분 감사합니다. 점심 식사 후 지금부터 한 시간 후에 여러분들이 현재 쓰러졌거나 죽었던 지점 잘 봐뒀다가 그대로 누워 주십시오."

스태프가 메가폰을 쥐고 촬영 군중을 향해 점심시간임을 알렸다. 누워 있던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요, 시체들! 밥 먹고 허라고 안 허요. 일어들 나시오."

잠이 들었는지 어수선한 도로 한복판에 아직도 누워 있는 일부 사람들을 향해 구경하던 시민들이 큰 소리로 깨운다. 그제야 하나둘씩 피범벅이 된 사람들이 부스스 일어나는데 그중에 K가 누워 있었다. 죽어도 계엄군 역할은 안 한다고 E에게 눈을 부라렸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운 듯 피묻은 얼굴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무슨 배우가 촬영하다 잠이 드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한나절 시민군 역할하기도 이렇게 힘들구만…, 그때 총칼에 맞서 싸운 사람들 얼마나 무섭고 억울했을까… 누워서 그 생각만 들대요."

영화 <꽃잎> 중 한 장면.
 영화 <꽃잎> 중 한 장면.
ⓒ 미라신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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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배우에게 쏠리는 호기심으로 우리는 나란히 이정현 뒤를 따라 걸었다. 자줏빛 원피스 밑으로 보이는 소녀의 다리가 무척 가늘다.

"아까 촬영하며 E형 봤는데. 나더러 계엄 하라고 놀려놓고 자기는 완전 극렬분자로 머리에 띠 두르고 맨 앞장서서 기동타격대 행세하고 있더라니까. 진즉 죽었을 걸요."
"넌 아직 안 죽었어? 너도 시체들 사이에 뒤엉켜 있었잖아."
"아직요. 원래는 내 주위로 몇 명 남고 첫 사격 다 죽으라고 했는데 히히, 제가 빨리 죽기 아쉬워서 몰래 산 사람들 틈에 끼어 달렸어요. 근데 또 도망가다가 총탄세례 받아서 쓰러진 상태예요 지금. 이따가 촬영 들어가면 그땐 이제 꼼짝없이 죽어야죠." 

배우 이정현은 제작진들의 점심이 마련된 YMCA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시민들은 알아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금남로 옆 충장로 식당들마다 촬영 군중들이 몰려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엑스트라 아니면 구경꾼으로 몰려나왔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식당도 이미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정말 웃으면 안 되는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진 가운데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쳐다봤다. 허름한 당시의 복장을 갖춰 입고 피 물감을 훔치며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은 서로의 분장한 모습에서 당시 쓰러져간 사람들의 모습을 또 보았을 것이다. 1995년 가을 금남로에서 1980년 5월을 완벽하게 체험하는 게 그래서 가능했다.

[# 장면 ②] 2011년... 31년 지난 망월동

긴 세월 국민들의 간절한 의문이었던, 80년 당시 '학살 주체'들의 실체를 모 보수단체 세력들이 실로 30여 년 만에 확신에 찬 어조로 천명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소속 600명 병력이 비밀리에 광주에 침투해서 저지른 만행이란다. 그들은 추진 중인 5.18의 유네스코 등재를 막기 위해 프랑스 본부까지 원정을 가서 탄원을 했단다. 5.18이 북한군의 소행이므로 유네스코 등재는 불가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 보수단체는 국가보조금을 수령하는 단체 중 하나다.

이명박 대통령은 연 3년째 애정 없는 국가기념일 행사에 불참의사를 통보해 왔고, 보훈처는 각고의 고심 끝에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윤허해줬다.

만장, 깃발, 시, 휘호 등으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 2011년 망월묘역 입구의 모습 만장, 깃발, 시, 휘호 등으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 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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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지진, 해일만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범죄나 재난은 다 북한 소행이구만. 참 편리하네."
"아녀, 홍수도 북한 소행이여. 옛날에 우리 평화의 댐 모금운동 생각 안나? 혹시 홍수가 나도 북한이 일으켰고 과거 미래의 모든 미제사건은 싹 북한소행으로 씌우면 돼."
"그 보수단체 말이지, 학살 책임자 밝혀낸 김에 시신 암매장 장소도 좀 찾아줬으면 고맙겠어, 행불자 가족들 유골 모시고 제사라도 한번 모셔보게. 참말로 전 세계가 비웃을 일이네"
"아휴, 부끄러워. 국가 망신이지,"

망월동 묘역 5.18 유족회가 마련한 부스 앞에서 참배객들이 나누는 대화에 유족 분들도 덩달아 한숨을 내쉰다. 망월동 묘역은 전국 각지에서 온 참배객들의 행렬로 모처럼 흥분되면서 숙연한 분위기다. 자료 전시실과 영상 홍보 관에는 외국인들과 외지 관람객들이 진지한 자세로 화면에 눈을 주고 있다. 당시 상황을 담은 흐린 화면에서는 철저히 고립된 광주에 계엄군들의 소탕작전이 무서운 폭발음과 함께 전개되고 있다.

화면에서 나는 게르니카 폭격을 연상했다. 80년 5월의 광주는 스페인의 게르니카 폭격의 데자뷰 격이다. 악명 높은 프랑코 장군과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선량한 시민들을 외부와 철저히 고립시킨 채 무차별 학살을 가했다는 점도 너무나 비슷하다. 다만 게르니카 학살이 외부 세력인 독일의 수고를 빌려 우회적으로 자행된 행위인 반면 광주학살은 든든한 우방 미국의 묵인 아래 자국 군인의 병력으로 손수 해치운 점이 다를 뿐이다.

망월묘역 입구 수많은 만장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역사의 길 앞에서 그대 걷고 있는가 망월묘역 입구 수많은 만장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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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18 주제어는 '관심'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지만 오늘 찾은 망월동 묘역은 기억해야 할 역사를 되새기기 위한 발길들로 붐볐다.

여기에 망월묘역으로 향하는 길에 펄럭이는 추모 만장의 물결을 펼쳐 놓는다. 잠깐이라도 관심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5.18은 관심이다"
"그대 걷고 있는가, 5.18은 현재 진행형"
"5.18은 대한민국 헌법의 눈물이다"
"왔는가 이 사람아"
"약자들이 행복한 세상"
"찬란한 오월 숭고한 나눔"


태그:#5.18, #망월동, #북한, #광주,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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