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에 일어난 사건은 정당하지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먼저 시위대에 총을 쏜 것은 영국군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군의 행동에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정부를 대신해 그리고 이 나라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지난 2010년 데이비드 캐머론 영국총리가 하원에서 '영국판 광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피의 일요일'에 대해 공식 사과한 대목 중 일부입니다. 이후 당시 영국 공수부대 여단장이 사과하면서 무장폭도들의 폭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피의 일요일'은 38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보고문학적 관점에서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충실히 재현한 영화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블러디 선데이>입니다.

침략과 저항의 역사가 서로 빼닮은 한국과 북아일랜드에서 공교롭게 같은 일요일에 일어난 5·18 광주항쟁과 '피의 일요일'. 하지만 북아일랜드와 달리 오월 광주는 발포 명령자와 행방불명자, 미국의 역할 등 가장 핵심적인 사실들이 1980년 5월 18일 그 날에 여전히 밀봉되어 있습니다. 핏빛 진실로 역사를 기록했던 광주의 그 날을 '주먹밥'과 '공동체'로 재현하며 가장 낮은 곳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다큐멘터리 <오월愛>를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씨'들을 위한 영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양동시장 한 켠에서 과일행상을 하는 이영애 어머니는 시민군들이 모시고 자리를 함께 하고픈 ‘광주의 주먹밥 아주머니’를 상징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양동시장 한 켠에서 과일행상을 하는 이영애 어머니는 시민군들이 모시고 자리를 함께 하고픈 ‘광주의 주먹밥 아주머니’를 상징한다. ⓒ 시네마 달


<오월愛>는 광주의 안과 밖에 있었던 두 사람, 김태일 감독의 아내와 항쟁 당시 시민방위군으로 활동했던 김춘국(관광버스 기사)씨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이름 없이 참가했던 분들의 기억과 지금의 모습을 통해 30년이 지난 현재 5월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김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씨'들을 통해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띄웁니다.  

<오월愛>의 사람들은 정치인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그리고 행세깨나 하는 민주투사도 아닙니다. 역사가 시민군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전남도청 취사조 여고생, 구두닦이 총각, 과일행상 아줌마, 자장면집 아저씨, 택시운전사, 전파상 주인, 시장통 할머니 등 말 그대로 '무명씨'들입니다.

얄팍한 머리보다 일상의 노동으로 오월 광주를 기억하는 무명씨들의 증언은 생생합니다.

"전남방직 어린 여공들이 거리로 나서는데 내 가슴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해서 들어갔제"
"정의를 외치다 피 흘리는 걸 보면 사람은 강해져"
"동네 사람들이 죽어나가니까 이래선 안 되겠다…"
"아이고 말도 못해 사람들이 다쳐가꼬. 그라니까 아줌마들이 열이 바치는 거예요. 어느 아줌마는 물통을 가져다주고…"
"어린 학생들이 배고파 죽겠다고 난리야"
"솥단지 걸어 놓고 금남로에 나갔당께. 주먹밥을 뭉쳐갔고…"
"전두환이 TV에 나올 때마다 울화통이 터져. 속이 뒤집어진다니까."

하지만 기억할수록 오월 광주의 상처가 덧나 고통스러운 것도 그들입니다. "엄마 쪼금만 고생해. 돈 벌어 행복하게 해줄게. 통금 때까지 집에 갈게"하던 아들을 잃은 김길학 어머니는 "제일 마음 아픈 게 도청철거와 (광주가) 잊혀지는 거예요"라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시민군의 시체를 부모들에게 확인시켜주던 당시 기동타격대원은 "저녁이면 한 번씩 기억이 떠올라. 나이 어린 학생들의 주검이 지금도…"라며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증언합니다. 그렇게 광주는 오월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가난한 삶이지만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다부집니다. '5월의 꽃' 기동타격대원으로 망월동 구 묘역 앞에서 '5월 화원'을 하는 이세영씨는 "그런(주먹밥 공동체를 꾸렸던 5·18 항쟁 10일간의) 세상이 있을까? 우리 가족 묘 같아"라며 그 날의 기억을 가슴에 담은 채 광주에서 살고 있으며, 중국집 주인 양인화씨는 "무엇이 민주주의고 무엇이 독재라는 것을 5·18 항쟁을 겪고 알았다는 거요. 그래서 내 인생이 완전히 디 바뀌었지요"라며 5월 광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5·18 31주년인 올해 주제는 '관심'입니다. 이 대목과 관련해 김 감독은 양동시장에서 과일노점상을 하는 이영애 어머니를 통해 세상과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아무 씨잘데기 없어.  씨잘데기 없는 소리 때레치고 언능 가브러야. 너도 똑같은 놈이니 다시 오지 마!"

시민군의 존재조차 가물거리며 박제가 되어가는 5월 광주와 우리들의 무관심을 향한 어머니의 일갈은 서슬 퍼런 비수가 되어 아프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가장 완벽한 세상'이었던 5·18항쟁의 주먹밥 공동체

 십시일반 내 놓은 쌀로 아줌마들이 지은 주먹밥은 저항과 나눔과 자치의 오월 공동체를 상징하는 표상이자 대동 세상의 구현이었다.

십시일반 내 놓은 쌀로 아줌마들이 지은 주먹밥은 저항과 나눔과 자치의 오월 공동체를 상징하는 표상이자 대동 세상의 구현이었다. ⓒ 시네마 달


<오월愛>는 5월 광주를 '주먹밥 공동체'로 재조명합니다. "워디 전쟁이 있난는데 지기집 쌀퍼다가 밥해 갖고 밖에다가 뿌리는 놈들이 어디가 있어요. 세계적인 역사를 봐도 그런 데가 없잖아?" 나명관씨가 들려주는 이 말은 학살의 한복판에서도 땀과 피와 웃음으로 희망의 공동체를 일구던 그날의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공수부대에 의해 고립무원의 지대로 전락한 광주에서 폭력과 공포와 죽음의 아가리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던 때에, 영화는 무명씨들의 증언을 통해 '주먹밥 공동체'의 실체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시민들 스스로 주머니를 털어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상점 주인들은 팔 물건을 나눠주고, 쌀이 있는 집은 쌀을 가져와 주먹밥을 만들고, 심지어 자동차까지 자발적으로 동원하는 등 양인화씨의 말처럼 "니꺼 내꺼가 없"이 '우리 것'만 있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도둑도 강도도 항쟁기간 동안은 한 마음"이어서 단 한 건의 범죄사고도 없었으며,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신음하면서도 더 위급한 이들을 위해 병상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거리에 내놓으면 청년들이 그 주먹밥을 먹고 싸웠으며, 양동이째 길어 온 물로 타는 목마름을 적셨습니다. 그 주먹밥은 아들만 같았던 청년들이 무사하기만 바랐던 어머니들의 애간장과 눈물이 녹아있는 밥이었고, 1980년 5월 27일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마지막 결사항전을 벌이던 전남도청에서 여고생(영화는 김영희라는 가명으로 대신했고, 그녀는 "살아 나왔다는 죄책감, 미안함에 견딜 수가 없더"라며 하염없이 오열했다)들이 핏물로 지어 시민군들에게 나르던 밥이었습니다.

그 낱알 하나하나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건네던 밥이 주먹밥입니다. 주먹밥은 군홧발에 맞선 무명씨들이 생명과 상생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밥이었으며, 저항과 나눔과 자치의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대동 세상을 상징하는 밥이었습니다. 무명씨들의 곁에서 모든 두려움과 분노와 소망을 한데 모아 한솥밥을 지어먹으며 5월 광주를 사수하려던 공동체의 표상이 그 주먹밥이었습니다. 항쟁 다시 문화선전대원으로 활동했던 5월의 화가 홍성담 선배가 보았다던 "가장 완벽한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철거 앞둔 역사의 현장 '전남도청 별관'... "시민의 힘으로 지켜주십시오"

 1980년 5월 22일 낮 12시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5만 여명의 시민들이 집결해 시민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그 광장 뒤 ‘별관’은 항전 마지막 날인 27일 윤상원 등 150여구의 시민군 사체가 나온 역사의 현장이다.

1980년 5월 22일 낮 12시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5만 여명의 시민들이 집결해 시민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그 광장 뒤 ‘별관’은 항전 마지막 날인 27일 윤상원 등 150여구의 시민군 사체가 나온 역사의 현장이다. ⓒ 5·18 기념재단


올해 초 수원지법 안양지원에서는 희한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5월 광주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했다가 5·18 단체에 의해 명예훼손 등으로 고발된 지만원씨가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법리해석을 떠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이 판결은 극우세력들이 5·18 광주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입니다.

최근에는 5·18 기록물 3만 5000여 건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가운데 한미우호증진협의회 한국지부가 "탈북자들이 600여 명의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광주시민을 칼빈으로 죽였다고 진술했는데, 5·18 자료가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광주사건의 진실이 은폐된다"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토록 광주를 훼손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을 희석시키기 위한 물타기로 읽힙니다.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미국이 훼손되는 것만큼 이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화에서 유일하게 계엄군 증인으로 나온 당시 20사단 소대장 출신의 이은재 산돌학교 교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광주를 알면 알수록 죄의식이 더 커지고 나는 역사에 빚진 자다, 죄송하고 고마워요. 광주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줬어. 이분들 대신해 열심히 사는 게 역사적으로 속죄하는 길이에요."

"언제부턴가 광주가 우리 안에 고립되어 있다"는 시민군의 말은 우리 안의 광주에 대해서도 톺아보게 합니다. 영화는 "우리 동지들이 우울증에 밤에 악몽을 꾸다 자살하는 것이 사는 게 아니야. 이게 잊는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거든"이라는 시민군들과 함께 옛 전남도청 별관 철거를 놓고 5월 단체들 간에 막말과 욕설이 난무하고 있는 5월 광주를 동시에 비춥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5월의 '주먹밥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겠냐고.

망자들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기 위해 하나로 뭉쳐야 할 5월 단체들이 스스로 공동체 정신을 파괴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광주로부터 멀어진 우리들의 '무관심한 일상'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 무관심은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별관'을 철거한 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건설해 '주먹밥 공동체'를 붕괴시키려는 이명박 정부의 들러리 노릇을 해왔으니까요.

시민들의 광장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촛불을 드는데도 연행을 각오해야 하고, 4대강으로 국토가 도륙당하며 민주주의가 신음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별관'은 원형 보존돼야 합니다. 윤상원과 150여 구의 시민군 사체가 나온 그 별관은 주먹밥을 먹고 치켜들었던 민주주의의 횃불이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1987년 6월 항쟁으로 되살아났고 2008년 촛불대행진으로 타오른 5월의 정신이며,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철거 직전의 '별관'을 지키고 있는 무명씨들이 내건 펼침막을 한동안 클로즈업합니다.

'이곳을 철거한답니다. 1980년 5월 그 날의 핏빛 절규를 기억하십시오. 이제 시민의 힘으로 지켜주십시오.'

늙은 어머니들의 노래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을 거부하고 망월동 구 묘역에 잠든 아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늙은 어머니가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을 거부하고 망월동 구 묘역에 잠든 아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늙은 어머니가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 시네마 달


영화의 후반부에서 내레이터는 "배운 사람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10일간 모두들 평등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늙은 어머니들은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처연히 부릅니다. 30년의 세월도 가로막지 못한 모정의 노래는 "5월의 기억이 우리 안에서 계속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럴 때, 망자에 대한 추모를 넘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다시 광장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다고. 그럴 때, 승자의 역사가 패자의 역사가 되고, 패자의 역사가 사실은 승자의 역사이자 진보의 역사가 된다고.

깨인 새벽 눈 비비고 일어나 잊혀진 이름을 다시 세우는 <오월愛>가 광주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으며, 광주를 넘어 '5·18 정신'의 전국화를 다시금 요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5.18 오월愛 주먹밥 전남도청 별관 시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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