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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 중 리어카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이 점점 많아진다.
▲ 리어카 서민들 중 리어카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이 점점 많아진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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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 수목장으로 모신 지 엊그제(7일)로 한 달이 됐습니다. 어느 선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두 달 뒤에 우울증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문득문득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모든 자식들처럼 생전에 아버지께 잘 해드리지 못한 죄송함 때문에 그러리라 생각되면서도 아버지가 평생 말씀 못한 한을 담고 사셨기에 자식된 입장에서 더더욱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 아버지 별명은 '두꺼비'입니다. 아버지가 일하셨던 청량리 시장에서 아버지는 '두꺼비 이씨'로 통했습니다. 젊은 시절 야유회 놀이 중 뛰는 모습이 꼭 두꺼비처럼 엉금엉금 거린다고 해서 지어진 별명입니다. 아마도 두꺼비가 그려진 술을 너무도 좋아하신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시장에서 리어카 배달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다르지만 예전 청량리 시장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 많아 리어카 배달일로도 4남매를 키울 만큼의 벌이가 됐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5~6학년이었을 때부터 리어카 배달일에 저와 작은 형을 동원시켰습니다. 특히 새벽에 젓갈 등이 대량으로 들어올 때는 항상 일을 같이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힘든 것은 둘째치고라도 냄새 고약한 젓갈이 싫었고, 아는 사람이 볼 것만 같아 불안했습니다. 더욱이 재밌는 TV 프로가 많은 토·일요일에 아버지를 돕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싫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그날도 툴툴거리며 아버지 리어카를 밀고 있는데, 교회 마치고 나오는 같은 반 친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주 어색하게 아는 척을 하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왜 당신의 일을 자식에게까지 시킬까를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왜 그리 폭음하시고 번번이 주사를 벌이는지를…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고 대학 첫 방학 때 한 달 동안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고된 몸을 달래기 위해 술 한 잔하면 좋아질까 싶어 그렇게도 해봤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이 마흔이 돼서야 아버지의 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됐습니다. 지난 2010년, 10여 년간 활동했던 환경연합에서 안식년을 얻어 '걸어서 마흔 여행'을 다녔습니다. 서른 즈음에 백두대간을 종주했고 워낙 걷는 걸 좋아했기에 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평상시 음주와 과로 등으로 몸 상태가 불량한 탓도 있었지만, 남자 나이 마흔이 되면 육체적 근력이 확연히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야 왜 우리 아버지가 자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깨웠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평생 노동일로 자식 키워낸 아버지... '화장' 부탁한 이유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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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청량리 시장 리어카 배달일을 예순 아홉까지 하시다 2004년 위암 수술을 받은 후 당신의 분신과도 같은 리어카를 팔았습니다. 별다른 일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큰 수술 이후 크고 작은 병치레가 계속됐고, 그때마다 느는 것은 각종 약이었습니다. 특히 수면제는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을 매일 수면제에 의존한 탓인지 아버지는 지난해 초부터는 수면제 두 알을 드셔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잠시 다녀온 시골에서 술 한 잔을 드셨더니 소변도 잘 나오고 잠도 잘 잤다고 합니다. 위암 수술 후 7년을 끊었던 술입니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수면제 대신 술을 찾으셨습니다.

과하면 독이라고 아버지는 눈을 뜨면 술부터 찾았습니다. 어머니 부탁으로 집 앞 슈퍼에서 술을 못 사게 하자 다른 곳에서 술을 사와 집 뒷켠에 숨겨두고 드셨습니다. 못 드시게 말려도 봤지만 잠시만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아버지는 어느새 나가 술을 드셨습니다. 그렇게 술과 잠을 반복하다 2010년 말 치매가 왔습니다. 그리고 올 초, 과하게 술을 드신 이후부터는 아예 몸을 가누지 못하셨습니다.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떠날 준비를 하셨습니다.

지난 3월, 출장으로 며칠 만에 집에 들어가니 잠깐 정신이 드신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보고 싶었다"고, "짝을 찾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40년을 살아오면서 저와 아버지 사이에는 유년기와 군 시절을 제외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 표현이 없었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삶이 조금씩 이해됐지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 죄송해서, 평생 노동일로 자식들 키워낸 아버지가 한없이 불쌍해서, 그리고 30년 후 내 모습일 수 있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이 처량해서 힘없이 잡힌 아버지 손을 놓고 제 방으로 왔습니다. 그 날 한참을 소리죽여 울었습니다.

한 달 후 아버지는 그렇게 하늘로 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성남 승화원으로 갔던 어린 조카는 '화장장'을 '분장'하는 곳으로 생각한 탓에 화장 후 뼈만 남은 할아버지를 보고 놀라고 슬퍼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평소 약주를 드시면, 당신 죽은 뒤 꼭 화장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장묘 문화가 많이 변한 탓도 있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는 평생 말할 수 없었던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그 이야기는 제 할머니의 젊은 시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9살부터 머슴 산 아버지가 평생 그리워 한 '최씨 할아버지'

추석, 밤 9시 33분, 보름달 환한데 리어카 주인은 없다.
▲ 텅 빈 거리, 주인 없는 리어카 추석, 밤 9시 33분, 보름달 환한데 리어카 주인은 없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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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할머니의 남편은 집안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인물이 제법 있었던 남편은 돈 있는 여자들을 찾아 다녀 평생 9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딸을 얻을 때부터 할머니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런 남편을 소개한 친정집을 무척이나 원망했을 것입니다. 둘째가 생겼을 때 남편은 몇 년이 지나도록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서울로 식모살이를 가려 했습니다. 경기도 양평에서 두 아이를 모두 먹여 살리기 위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한편 할머니 친정집에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남편을 잊으라 종용했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애들을 위해서라도 다른 남자를 소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당시 철도 터널 공사 인부로 일하던, 아들 하나 딸린 최씨 성의 홀아비가 있었고 여차여차 해서 할머니와 최씨 할아버지는 같이 살게 됐습니다. 6~7년을 같이 살면서 둘 사이에 아들과 딸 둘이 생겼습니다. 철도 터널 공사가 끝난 후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강원도 철원의 금광 광산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최씨 할아버지는 억울하게 매를 맞아 돌아가셨고, 최씨 할아버지의 큰 아들도 오래 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비명횡사한 최씨 할아버지는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 없는 궁핍한 삶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과 딸들을 호적에 올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예전 남편을 찾았고, 그렇게 다시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 남편의 분탕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9살부터 머슴 살아 마련한 소를 팔아 계집질에 탕진했습니다. 집안일과 농사일 등 생계 역시 여전히 할머니 몫이었습니다.

9살부터 머슴 살던 둘째 아들이 바로 우리 아버지입니다.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버지는 최씨 할아버지를 가슴에 품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적 당신이 최씨 성을 갖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는 최씨 할아버지의 비명횡사와 뿌리에 대한 한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최씨 할아버지처럼 화장을 부탁하신 겁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누나가 병원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를 꿈에서 봤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꿈에서 아버지는 어머니 머리맡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다 가셨다고 합니다. 누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모는 병원에 누워계신 아버지가 보여 다음날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보고 싶었던 자식들과 손자, 손녀, 지인들 모두를 꿈속에서 찾아 가셨을 것입니다.

지난 어버이날, 홀로 남은 어머니와 함께 4남매 그리고 조카들이 모여 식사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또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번엔 좋은 옷을 입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며, 아버지가 좋은 곳에 가신 듯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 제 꿈에서도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깔끔한 옷을 입고 현관문을 들어오시기에 "아버지"라고 부르며 달려가 팔을 잡았습니다.

여전히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의 존재감을 확인한 어리석음에 그저 죄송하고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아버지! 하늘에서 최씨 할아버지 만나셨나요? 그렇게 그립던 할아버지 만나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어리광도 좀 부리세요. 막내 아들이 어머니 잘 챙기고 모실게요. 요즘 왜 이리 아버지 생각이 날까요. 보고싶습니다, 아버지.


태그:#아버지, #리어카, #수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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