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구 전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왼쪽)와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왼쪽 두 번째)가 지난 3월 31일 오후 경남 창원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9구단 창단승인식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치권의 입김 없이 뽑혔던 유 전 총재는 프로야구 흥행과 제9구단 창단에 큰 힘을 보탰다.

유영구 전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왼쪽)와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왼쪽 두 번째)가 지난 3월 31일 오후 경남 창원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9구단 창단승인식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치권의 입김 없이 뽑혔던 유 전 총재는 프로야구 흥행과 제9구단 창단에 큰 힘을 보탰다. ⓒ 엔씨소프트


국내 프로야구계가 또 시끄럽다. 지난 4일 유영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전격 사퇴하면서 후임을 놓고 뒷말이 많기 때문이다. 검찰은 유 전 총재가 2006년 명지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학교 돈을 빼돌려 명지건설의 빚을 갚았다며 횡령과 배임 혐의로 구속수사하고 있다.

KBO 총재의 임기는 3년이지만 이번과 같이 중도 사퇴하면 정관에 따라 한 달 이내에 다시 뽑아야 한다. 당분간은 이상일 KBO 사무총장이 총재 대행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유 총재가 사퇴하자 다수 매체들은 빈 총재 자리를 노리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들어 공기업과 방송국 임원직 일부를 두고 '낙하산' 보은 인사 논란이 거세다. 체육계도 예외는 아닌 셈이다.

규정상 '낙하산' 못 편다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총재는 KBO의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 최종 결재자가 된다. KBO의 지시, 재정, 재결 및 제재가 다 총재의 손에 달렸다. 하는 일이 중요하다 보니 언론에도 자주 이름을 올린다. 덕분에 총재는 짧은 시간에 자신을 널리 알릴 수 있다. 인지도를 높이는 게 유리한 정치인이 그래서 자주 총재 후보로 거론된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내려오는 낙하산 총재에 대한 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낙하산 총재 중에 야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낙하산 총재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게 된 많은 야구인은 곧바로 반대 성명을 냈다.

전·현직 야구 지도자와 은퇴 선수가 주축이 된 사단법인 일구회는 9일 보도자료를 내고 "KBO 총재 인선과 관련해 또다시 정치계 입김이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며 "한국야구의 백년대계를 세울 중요한 시기에 명패만의 총재는 야구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KBO 총재 자리는 휴식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낙하산 총재에 대해 확실히 선을 긋겠다는 자세로 풀이된다.

야구규약에 따르면 낙하산 총재는 나올 수 없다. 총재는 8개 구단 사장과 KBO 사무총장이 모인 이사회에서 재적이사 4분의 3이상 동의를 얻어 추천하며, 구단주가 모인 총회에서 재적회원 4분의 3 이상 찬성을 받아 선출한다. 총회에서 뽑은 총재는 감독청인 문화체육관광부에 보고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2년 전만 하더라도 KBO는 총재와 사무총장 선임을 위해 문광부에 꼬박꼬박 허락을 받아야 했다. KBO에 그동안 낙하산 총재가 유독 많았던 이유다. 프로야구 출범 30년 동안 정치권의 입김 없이 뽑힌 이는 12~14대 박용오 총재와 17대 유영구 총재 둘 뿐이다. 특히 유 전 총재는 문광부로부터 한 차례 거부를 당해 취임이 두 달 미뤄지기도 했다.

세월 흘러 '낙하산' 펼 자리도 없다

프로야구의 출발은 불순했다. 1982년 제5공화국 정권이 스포츠를 통한 우민화 정책을 펴기 위해 프로야구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연고가 나뉜 프로야구는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기폭제였고,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관계 낙하산 인사가 프로야구를 관장하는 KBO 총재가 되는 건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출범 30년째인 2011년 프로야구는 그때와 확연히 다르다. 프로야구는 전보다 양과 질 모두 크게 성장해 국민이 부담 없이 즐길 만한 건전한 여가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색도 거의 다 사라졌다. 원래 KBO는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가 아닌 사단법인이다. 따라서 정치권의 지나친 간섭은 부당하다. 이제 사실상 프로야구에 낙하산 총재가 설 자리는 없다.

국내 최고의 인기스포츠인 프로야구는 요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초창기 6개던 프로야구단은 신생구단 엔씨소프트를 포함해 9개로 늘었고, 관중도 연 60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경기 수준도 높아졌다.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이 주축이 된 한국 야구대표팀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국제 대회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뒀다.

유 전 총재는 임기 중 국제 대회를 착실히 지원하면서 프로야구의 흥행을 돕고 제9구단의 창단까지 이끌어 내는 등 큰 성과를 냈다. 그동안 정치권이 밀어붙인 낙하산 총재가 민감한 현안을 지혜롭게 풀지 못한 것과 비교된다. 2008년 재정이 불안한 히어로즈를 끌어들여 현대 유니콘스의 공중분해라는 최악의 상황을 간신히 막았던 게 낙하산 총재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또 KBO 이사회에선 8개 구단의 이익이 자주 부딪쳐 총재가 중심을 잡고 중재를 잘해야 갈등이 커지지 않는다. 현재 프로야구는 제10구단 창단이라는 큰 과제를 앞두고 있어 유능하고 원만한 총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사회에서 추천해 뽑은 사람이 아니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거나 잡음이 나오기 쉽다.

유인촌 전 문광부 장관은 2009년 6월 15일 체육기자간담회에서 "현재 KBO 총재 선출 시 '장관 승인'으로 명시된 규정을 '장관 보고'로 고쳐 총재를 자율적으로 뽑은 뒤 사후 보고만 하면 되도록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이 약속이 만 2년도 되지 않아 위태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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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동작구위원장. 전 스포츠2.0 프로야구 담당기자. 잡다한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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