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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애앵."

확성기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건물 옥상의 확성기를 든 사람이 구호를 몇 차례 외치더니 곧 12미터 아래로 머리부터 떨어지기 시작한다. '쿵'. 사람의 몸뚱이가 땅바닥과 전속력으로 부딪힐 때 나는 둔탁한 소리가 옥상까지 울려퍼진다.

88서울올림픽을 두어 달 앞둔 지난 1988년 5월 15일. 한 젊은이가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칼로 배를 가르고 뛰어내려 숨진다. 할복도 아니고 투신도 아닌 할복 투신. 완벽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스물 네 살 대학생 조성만의 유서에는 한반도 통일, 미군 철수, 군사정권 퇴진,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가톨릭 신부를 꿈꾸던 스물 네 살 젊은이가 명동성당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마이북(오마이뉴스 출판 브랜드)에서는 요셉 조성만의 일생을 다룬 평전 <사랑 때문이다>(저자 송기역)를 출간했다. 책 속에는 조성만 열사의 삶과 죽음, 그리고 열사와 함께 1980년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모습들이 밀도있게 그려지고 있다.

1980년대 세대의 삶과 사랑, 투쟁의 청춘 보고서 

요셉 조성만 평전 <사랑 때문이다>
 요셉 조성만 평전 <사랑 때문이다>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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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한 조성만은 지하서클과 명동성당 가톨릭 민속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전주 해성고에 입학한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조성만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무엇이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며 그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고교 시절 다니던 성당에서 만난 문정현 신부의 영향으로 신부가 되기를 꿈꾸던 조성만에게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며 보수화 되어가는 교회의 모습과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은 보고만 있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조성만은 여느 대학생들과 같이 1987년 6월 항쟁시기에 서울 거리와 명동성당을 오가며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고,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는 부정선거를 목격하고 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구로구청에서 경찰에 저항하다 연행된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던 시대였다는 점에서 80년대 젊은이들 중 조성만의 삶이 아주 유별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젊은이들도 자신들을 둘러싼 1980년대 한국의 풍경에 분노하고 그를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불특정 다수 민중에 대한 사랑의 정도였다. 조성만은 유서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우리의 형제들이 고통 받고 있다"며 "더 이상 자책만 계속 할 수는 없었다"고 토로했다. 

조성만은 자신의 존재하는 이유가 인간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평전의 제목인 <사랑 때문이다>는 조성만이 평소 쓴 일기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체제가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많이 변화시키는 과정이 너무나 화가 나고 그 인간에 대하여는 너무나 불쌍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민중'이 그러한 모습을 보일 때는 미칠 지경이다. (중략) 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 이어지고 이 땅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 사랑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1988년 5월 15일 조성만이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투신하는 장면. 당시 서강학보 기자 최순호가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1988년 5월 15일 조성만이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투신하는 장면. 당시 서강학보 기자 최순호가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 서강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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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만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그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만큼이나 날카로운 출발선을 그어놓았다. 그가 꿈꾸었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려는 '인간을 향한' 길은 80년대 후반 군사정권 반대와 미군 철수 등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의 죽음 이후로 대중적인 통일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1989년에는 대학생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가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하기도 했다.

문규현 신부의 형인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는 책에서 두 사람의 방북에 대해 "성만이가 그렇게 꿈꾸던 일이 두 사람을 통해 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1989년 문규현 신부가 방북하게 된 것은 조성만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미 1975년 인혁당 사건부터 활발한 사회참여 활동을 해온 문정현 신부지만, 그는 평전의 여는 글에서 자신이 통일운동에 뛰어들고 매향리, 대추리, 용산참사 현장으로 찾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조성만의 죽음과 유서였다고 고백한다. 조성만이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길은 여전히 멀다. 유서를 남기며 그가 간절히 해결되기를 원했던 '진정한 언론자유의 활성화', '노동형제들의 민중생존권 싸움', '농민형제들의 뿌리 뽑힌 삶의 회복', 등등의 문제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약 2년에 걸친 취재를 통해 지인들과 함께 조성만의 생을 입체적으로 복원해 낸 저자 송기역씨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혁명의 길을 모색한 80년대 세대를 조명함으로써, 체제내적 삶에 포박된 1990년대, 2000년대 세대를 극복하려는 촛불세대들이 찾으려는 길과 희망에 단서를 제시하고 싶다"고 말한다.

문정현 신부는 왜 23년 동안 이 청년의 사진을 품고 살았나

1970년 전태일, 1986년 김세진·이재호, 1988년 조성만, 1991년 강경대... 한국의 현대사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지며 작은 울림을 남겼던 열사들에 대한 기록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들이 목숨을 던진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렇게 해야만 사회가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때로는 분신으로, 때로는 단식으로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내놓고 한국 사회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자신도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인간임을 인정해주기를 간청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이젠 여의치가 않다.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로 사랑받기에는 모자란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 사후 23년 만에 출간된 조성만 열사의 평전 제목이 주는 울림이 더욱 묘하게 다가온다. <사랑 때문이다>.

나는 매일 명동성당을 걷는다.
본당을 지나 교육관 앞 한 청년이 떨어져 죽은 자리를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다.
지난 세월 나는 그가 옥상 위에 서 있던 순간을 숱하게 떠올리곤 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조성만이다.

그는 누구인가? 나의 신앙의 스승이다.
내 방엔 그의 사진이 23년째 걸려 있다.
나는 성만이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지난 23년을 돌아보면 단 하루도 피 터지게 살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온통 세상에 바치는 자의 심정을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래서 성만이를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눈물이 난다.

성만이가 떠난 지 23년이 지났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 근본을 잊은 채 살고 있다. 돈이 하느님이다.
4대강 사업, 재개발, 구조조정, 이게 다 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종교는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웃을 보듬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많은 종교인들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다.

하지만 예수의 사랑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 사랑은 누구도 덮을 수 없다.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 성만이도 그렇다.
그 사랑을 이 책을 통해 만났으면 좋겠다.

- '길 위의 신부' 문정현(<사랑 때문이다> 여는 글 중에서)


사랑 때문이다 - 요셉 조성만 평전

송기역 지음, 오마이북(2011)


태그:#문정현, #문규현, #조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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