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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짝패>의 천둥(천정명 분).
 드라마 <짝패>의 천둥(천정명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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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출도요!"

한국인들에게 이만큼 짜릿하고 시원스러운 표현도 드물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남루한 차림으로 암행하던 이몽룡이 병졸들을 데리고 나타나 악질 변 사또의 생일상을 뒤엎고 옥에 갇힌 애인을 구하는 <춘향전>의 명장면은, 보고 또 봐도 지루하지 않다.

지난 3일 방영된 MBC 드라마 <짝패> 제26회에서도 암행어사가 등장했다. 아니, 여기에 나온 어사는 진짜가 아닌 가짜어사였다. 의적단체인 아래적(我來賊)은 암행어사를 가장해서 전북 고창 관아를 습격하고자 대장인 천둥(천정명 분)을 포함해서 조직원들을 현지에 잠입시켰다.

천둥은 현지인들이 자신을 '신분을 숨긴 암행어사'로 착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불우한 선비 행세를 한 뒤, 어스름한 저녁에 전격적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재물을 몽땅 털어 지역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 어사들뿐만 아니라 실제의 어사들도 반드시 준수하고자 했던 암행(暗行). 암행어사의 생명은 '암행'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제대로 지켜졌을까?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데 성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어사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그것을 수행했다. '암행어사가 뜰 것이다'는 첩보를 입수한 지방관들이 사전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암행어사가 임명장을 받고 현지로 떠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들이 신분을 숨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년) 때 처음 파견된 암행어사는 주로 종3품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임명되었다. 종3품은 요즘으로 말하면 중앙행정기관 국장과 과장의 중간 정도였다. 학자 스타일의 관료들이 많이 포진한 사헌부(검찰청), 사간원(감사원), 홍문관(문서관리 및 자문담당 부서)에서 암행어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암행어사 파견은 은밀히 이루어져야 했지만, 100% 비밀유지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경우 총리급 즉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추천에 따라 주상이 임명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부터 일정 정도는 비밀이 샐 수밖에 없었다. 주상(왕의 공식 명칭)이 추천 없이 단독으로 임명하는 경우에도 비서실(승정원) 직원들이 파견 업무를 주관했기 때문에, 정보가 누설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암행어사가 된 관료는 마패 외에 봉서(임명장)니 사목(지시사항)이니 유척(놋쇠로 만든 자)이니 하는 것들을 휴대했다. 유척(遊尺)을 왜 갖고 다녔냐 하면, 그것을 갖고 다니면서 도량형 등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봉서나 사목은 지방 관청에 가서 자신의 출도(出道) 즉 '직무집행 개시'를 선언할 때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왕궁에서 주상을 알현하고 나온 암행어사는 집에 들르지 않고 그 길로 한성을 나서야 했다. 그는 한성을 벗어나기 전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받은 봉서(封書)의 겉면에는 "숭례문(남대문) 밖에 가서 개봉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왕궁을 나오자마자 궁금해서 몰래 뜯어봤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어사들이 명령을 준수했을 것이라고 신뢰해도 될 만한 이유가 있다. 임금을 아버지나 스승처럼 떠받들던 선비들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선비들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 포진해 있었고 주로 그들이 암행어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행어사가 숭례문 밖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신원과 미션을 알아낸 누군가가 말을 타고 지방을 향해 미리 출발했다면 어떨까? 이런 경우에는 가장 빨리 미션을 알아야 할 암행어사가 가장 늦게 미션을 알아차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을까? 아주 많았다. 뒤에서 설명된다.

암행어사의 '암행', 절대 불가능한 임무

1900년대 숭례문의 모습.
 1900년대 숭례문의 모습.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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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나온 암행어사는 폐포파립(弊袍破笠)으로 불우한 선비 행세를 하고 임지로 출발했다. 폐포파립이란 해진 옷과 부서진 갓을 가리키고, 불우한 선비 행세란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세상 구경이나 하러 다니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철저히 위장을 하기는 했지만, 상당수의 어사들은 임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신분이 노출되었다. 현지 관아에서 관련 첩보는 물론 어사의 인상착의까지 확보해두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갓 임명된 어사가 숭례문을 나서기도 전에 그의 신원과 미션이 누설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점을 증명하는 사례들은 많다.

중종 20년 1월 23일자(1525.2.14) <중종실록>에 따르면, 암행어사 조종경이 임지인 황해도 강령현에 당도했더니, 성문을 열어둘 시간인데도 경비병들이 문을 꽁꽁 걸어두고 있었다. 조종경이 "성문을 열라!"고 말해도 그들은 들은 척도 안했다. "어사가 떴다!"가 아니라 "어사가 뜰 것이다!"란 첩보를 입수한 강령현에서 미리 조치를 취해놓았던 것이다.

경비병들이 조종경을 알아보고 일부러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걸 보면, 강령현에서 그의 인상착의를 사전에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에 있는 누군가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난 조종경은 결국 성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의 신분이 행인들에게까지 노출됐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성문을 부수는데도 경비병들이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은 것은, 그가 성문 입구에서 "나 암행어사야! 문 열어!"라며 이미 신분을 밝혔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방 관청에서 어사의 인상착의까지 사전에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중종실록>에 실린 또 다른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중종 29년 5월 14일(1534.6.25) 조정에 올라온 암행어사 오세우의 감찰보고에 따르면, 오세우가 경상도 옥포에 당도하자 그의 얼굴을 확인한 경비병들이 즉각 성문을 닫아걸었다고 한다.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경비병들 사이에서 "걔 온다!", "문 닫아!"라는 대화가 오고갔을 것이다.

오세우의 보고에 따르면, 그가 "제발 문 좀 열라"며 온갖 방법으로 타일러도 경비병들이 들은 척도 안 했다고 한다. 경비병들은 시간이 한참 지난 연후에야 겨우 성문을 열어주었다. "어사가 떴다!"는 첩보를 관아에 전달하고 관아에서 관련 자료를 숨기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오세우는 성문 입구에서 대기해야 했을 것이다. 

조종경과 오세우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실록에 보고된 또 다른 사례들에 따르면, 어사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성문을 꽁꽁 닫아두고 열어주지 않은 고을이 많았다. 그런 경우 암행어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포기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암행어사 같았으면 병졸들을 데리고 성벽을 넘어서라도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춘향전>의 이몽룡 같았으면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행세를 해서라도 성문을 통과했을 것이고, <짝패>의 천둥 같았으면 공중을 붕 날라서라도 성벽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암행어사들은 그렇게 전투적이지 못했다. 선비 중에서도 진짜배기 선비인 사람들이 암행어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들이 양반 체면을 무릅쓰고 적극성을 보이는 데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당신 암행어사 맞지? 문 안 열어줄래

조선시대의 성문. 사진은 김해읍성의 북문. 경남 김해시 동상동 소재.
 조선시대의 성문. 사진은 김해읍성의 북문. 경남 김해시 동상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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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암행'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암행어사의 신원과 미션, 심지어는 인상착의까지 사전에 누설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설령 사전에 누설되지 않는다 해도 임지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신분이 노출되는 경우도 많았다. 폐포파립의 이방인이 나타나면, 암행어사가 아닌가 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민담집인 장한종의 <어수신화>에는, 폐포파립 행색의 거지가 관아 앞에서 구걸했다는 보고만 들어도, 혹은 관용 말과 시종 몇 명을 거느린 서울 사람이 나타났다는 보고만 들어도 얼굴이 잿빛이 되면서 "이건 필시 암행어사!"라며 긴장하는 지방 수령의 모습이 나온다. 이 정도로 지방관들이 어사의 존재에 대해 항상 긴장하고 경계했기 때문에, 어사가 은밀히 임무를 수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년 고시생이라며 서울에서 내려온 청년이 "이곳 사또는 청렴합니까?", "세금을 과하게 걷지는 않습니까?"라고 탐문하고 다닌다면,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신분을 감출 수 있었을까? 상당수의 지방관들은 "암행어사가 뜰 것이다"란 첩보를 입수했고, 그 외 대부분은 적어도 "암행어사가 떴다"는 첩보 정도는 입수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 제도에 관한 학술논문들에서도 어사들의 신분이 대부분 노출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전에 신분이 노출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고 하여 이 제도가 실효성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방관들이 어사의 출현 가능성을 항상 의식하고 경계했다는 점은 이 제도가 지방 수령들을 어느 정도는 견제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암행어사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지방 수령들의 부정부패를 어느 정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중종 때부터 실시된 이 제도가 구한말까지 계속 유지된 사실만 보더라도, 이 제도가 일정 정도는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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