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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
▲ 세계유산 창덕궁 돈화문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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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돈화문(敦化門)에 들어서면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창덕궁과 종묘를 갈라놓은 도로에는 하루종일 수많은 차량들이 오고간다. 외국인 관광객을 실은 대형버스를 비롯해서 일반 승용차와 시내버스 등.

이 도로에서는 차량과 행인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소음을 접하게 된다. 대신에 창덕궁 돈화문으로 한걸음 들어서면 그런 소음과 소란은 사라진다. 일년 내내 수많은 방문객들이 모여드는 창덕궁이지만, 궁이 워낙 넓다보니 사람들의 모습도 작아지고 그들이 내는 말소리도 어디론가 묻혀진다.

창덕궁에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60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서 조선의 임금들이 살던 구중궁궐(九重宮闕)을 둘러보는 것이다. 창덕궁도 그동안 여러차례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기는 했다. 그래도 조선왕조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 창덕궁 아닌가.

창덕궁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작년 5월부터 경희궁을 제외한 '4대궁과 종묘 통합관람제'가 실시되었다. 만원짜리 통합관람권을 구입하면 유효기간 1개월 이내에 종묘와 4대궁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개별적으로 입장권을 구입하려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비용도 4천원 가량을 더 들여야 한다.

우리도 창덕궁을 관람하기 위해서 통합관람권을 구입했다. 예전에는 종묘에서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개방해두었는데 통합관람제 때문인지 그 다리는 이용하지 못한다. 종묘 관람도 예전같은 자유관람이 아니라 지정된 시간에 문화해설사를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듣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소요시간은 약 한 시간.

그러니 종묘를 보고나서 창덕궁을 보려면 종묘 정문으로 나와 빙돌아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가야한다. 예전보다 많은 발품을 팔아야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것이니 이정도 걸음은 해주어야 할 것이다. 창덕궁-종묘다리를 폐쇄시킨 관계자들에게도 그런 깊은 뜻이 있었을지 모른다.

창덕궁 관람형식도 바뀌었다. 건물군은 자유관람이 가능하지만, 예전에 비원(秘苑)으로 불렸던 후원구역은 역시 정해진 시간에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형식이다. 자유관람이나 안내를 받는 것이나 그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복원한 창덕궁

진선문
▲ 세계유산 창덕궁 진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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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
▲ 세계유산 창덕궁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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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궐이니만큼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을테지만, 개인적으로 창덕궁하면 광해군이 떠오른다. 15세기 초 태종이 창덕궁을 지었고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탄다. 그렇게 소실된 창덕궁을 재건한 것이 광해군이다. 광해군이 재건한 창덕궁도 오래가지 못했다.

재건 뒤 10여년 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仁祖反正)이 터지면서 창덕궁의 전각 대부분이 다시 소실된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했지만, 자신 때문에 창덕궁이 다시 불타오르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반정군이 몰려오던 그날 밤, 담장을 넘어서 창덕궁을 빠져나가던 광해군의 심정도 참담했을 것이다. 자신이 재건한 아름다운 궁궐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때의 비참함, 그것은 권력을 잃은 허망함 못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표를 내고 광해군이 드나들었을 돈화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인조반정이 있던 날 반정군들이 도끼로 찍어서 열어제낀 문도 바로 이 돈화문이다.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금천교(錦川橋)와 진선문(進善門)이 나타난다. 금천교 밑에는 원래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물길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진선문을 지나면 사각형의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그 왼쪽으로는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가는 인정문(仁政門)이 나온다.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행사를 치렀던 전각이다.

그런 행사를 치르기에 적합할 만큼 커다란 전각이고 그 앞의 넓은 마당에는 품계석(品階石)이 놓여있다. 벼슬아치들의 높낮이 순으로 품을 세겨둔 돌이다. 공식행사가 있을 때는 정1품부터 종9품까지의 신하들이 자신의 '끗발'에 맞는 품계석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인정전의 앞에는 '드므'가 여러개 놓여있다. 외국어처럼 들리는 '드므'란 순 우리말로 넓적한 독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언제 생길지 모르는 화재에 대비해서 드므에 물을 항상 담아두었다고 한다.

다른 이유도 있다. 불의 귀신이 궁궐에 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나게 하기 위해 드므에 물을 담아두었다고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불조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이 드므는 텅 비어있다. 대신에 창덕궁의 곳곳에는 소화기와 소화전이 배치되어 있다. 불의 귀신이 찾아오면 놀라서 도망가는 대신에 소화액을 뒤집어쓰고 달아나게 생겼다.

인정전 앞에 놓인 드므
▲ 세계유산 창덕궁 인정전 앞에 놓인 드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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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뒷동산, 후원으로 들어서다

대조전
▲ 세계유산 창덕궁 대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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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 세계유산 창덕궁 낙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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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업무공간인 선정전(宣政殿), 침전인 대조전(大造殿), 낙선재(樂善齋)를 거쳐서 후원으로 향한다. 창덕궁 건물들도 아름답지만 많은 왕들이 창덕궁을 좋아했던 것은 역시 후원 때문일 것이다. 후원 입구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정해진 시간에 문화해설사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후원으로 들어갔다.

"창덕궁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후원의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후원에서는 음료를 제외한 다른 음식을 드시면 안 됩니다."

젊은 문화해설사가 사람들에게 말한다. 인정전과 선정전이 업무공간이라면 이 후원은 휴식처였을 것이다. 지금의 대통령처럼 당시 왕의 하루일과도 무지 빡빡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돈화문으로 들어서면서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고 느낀 것처럼, 당시 왕도 후원으로 들어서면서 왕의 자리가 주는 온갖 스트레스를 잊지 않았을까.

문화해설사를 따라서 연경당(演慶堂)으로 들어갔다. 연경당은 사대부의 집을 모방해서 만든 민가형식의 가옥이다. 연경당 주위에는 넓은 빈터가 하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자리에 어수당(魚水堂)이란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인조반정이 있던 날, 광해군은 이 어수당에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반정의 기미를 알아차린 신하가 광해군에게 관련보고를 했지만 광해군은 무시했다. 얼큰하게 취한 광해군에게 그런 보고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후원의 넓이는 건물군의 넓이를 다 합친 것 보다도 더 넓다. 왕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거한 술자리를 벌이기도 하고, 호랑이같은 맹수를 사냥하기도 했다. 사냥은 지금도 종로 일대에서 가끔 한다.

그 대상이 맹수가 아니라 야생멧돼지라는 차이가 있을 뿐. 청와대 뒷산에서 영역싸움에 패한 멧돼지들이 시내로 내려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한바탕의 사냥이 시작된다. 오래전에 창덕궁 후원에서 활과 창으로 맹수를 잡았다면, 지금은 가스총과 올가미로 무장한 구조대원들이 멧돼지를 잡으러 뛰어다닌다.

연경당
▲ 세계유산 창덕궁 연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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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과 잔치, 휴식의 공간 후원

영화당
▲ 세계유산 창덕궁 영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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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당에서 내려다본 부용지
▲ 세계유산 창덕궁 영화당에서 내려다본 부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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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당(暎花堂)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셔도 됩니다. 대신에 눕지는 마세요."

우리도 신발을 벗고 영화당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눈앞에는 후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용지(芙蓉池) 일대가 펼쳐진다. 이대로 누우면 그냥 잠이 들 것만 같다. 그래서 해설사가 눕지 말라고 한 건지도.

이 위에서 술 한 잔을 한다면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을 것만 같다. 선선한 바람이 술의 취기까지 날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왕이 아니라서 그런 호사를 누리지는 못한다. 영화당에서 부용지를 내려다보면 왼쪽에 부용정(芙蓉亭)이 있고 네모난 부용지 가운데에는 동그란 섬이 있다. 땅은 사각형이고 하늘은 원형이라는 믿음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후원에 들어오면 창경궁 식물원이 보인다. 내가 어렸을 때는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불렀었다. 당시 나는 창경원이 식물원, 동물원인 줄만 알았지 그곳이 조선시대 왕의 궁궐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부는 '궁'을 '원'으로 둔갑시키고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한 나라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궁궐이 한낱 유원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몇 개의 정자를 더 거치고 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옥류천(玉流川)을 지나 일행은 돈화문으로 향했다. 창덕궁 후원을 한바퀴 돌아나오는 것이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6시경, 돈화문은 굳게 닫혀있고, 우리는 그 옆에 있는 금호문(金虎門)을 통과해야한다. 금호문은 신하들이 드나들었던 문이다. 우리는 왕의 문으로 들어와서 신하의 문으로 나가는 셈이다. 왕으로 즉위했지만 결국 쫓겨나고만 광해군처럼.

후원을 포함한 창덕궁의 면적은 약 14만5천여 평이다. 축구장 넓이의 65배 가까운 면적이다. 불과 몇 시간 돌아다닌 것만으로 이 넓은 창덕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풍스러운 전각들을 보면 이곳에서 며칠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관람객들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낮에는 조용히 책도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 밤에는 후원 정자에 앉아서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보며 술 한 잔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만 같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그런 상상도 창덕궁을 나와서 복잡한 서울 시내 거리로 들어서는 순간 깨지고 만다.

옥류천
▲ 세계유산 창덕궁 옥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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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개요

* 등재 대상
창덕궁 전각 및 후원일대

* 등재 사유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 등재 기준
세계유산 기준 II, III, IV
II :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III :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IV :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 등재연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21차 회의


태그:#창덕궁,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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