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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의 정문, 촉석문
 진주성의 정문, 촉석문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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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전남 여수에서 엑스포가 개최된다. 주최측에서는 엑스포의 홍보를 위해서 근교 지역들을 엑스포 추천 여행지로 선정했다. 그 중 한 지역인 진주로의 여행, 가장 먼저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사적지인 진주성을 찾았다.

사적 제 118호로 지정된 진주성은 남강변 절벽 위에 세워진 성으로 본래 흙으로 지어졌던 것을 고려 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592년 임진왜란 때 3,800여명의 적은 군사로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 첩지 중의 하나로 유명하며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성내에 산재해 있다.

 진주 제1경으로 불리는 촉석루
 진주 제1경으로 불리는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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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는 진주성의 정문인 촉석문 앞쪽에 자리하고 있다. 어른 1,000원 | 청소년, 군인 500원 | 어린이 300원의 요금으로 일반 관광지에 비해 입장료가 착한 편이다. 오후 10시까지 개방되는 진주성은 야간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야간 산책코스로 애용하는 진주시민들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촉석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촉석루가 보인다. 원래는 국보 276호로 지정되었던 촉석루는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 새로 증축되고 나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등급이 하향조정되었다. 남강변 벼랑 위에 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촉석루는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불린다. 남강과 의암, 진주성과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며 진주 8경 중 제 1경을 자랑한다. 벼랑 위에 촉수처럼 솟아 있다고 하여 촉석루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전쟁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활용되었다.

촉석루에 올라 바라본 남강의 전경, 그야말로 압권

 촉석루 위에서 보이는 진주 남강주변의 전경
 촉석루 위에서 보이는 진주 남강주변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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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벗고 촉석루에 올라 바라본 남강의 전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마침 화창한 날씨가 눈에 거슬림 없이 진주의 시내를 보여준다. 동행한 동생은 이런 전망과 강변을 끼고 사는 시민들이 부럽다고 한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도 이런 탁 트인 강변 산책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살포시 터뜨린다. 그런 동생의 마음이 나 역시 십분 이해가 간다.

밤에는 야경을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아쉽게도 촉석루는 야간 개방을 하지 않는다. 진주성은 밤 10시까지 개방을 하지만,  촉석루는 하절기에는 6시 30분, 동절기에는 6시까지만 관람이 가능하다.

촉석루의 뒤쪽으로 이동하면 의암으로 가는 계단이 이어진다. 계단을 내려가면 남강변 벼랑 위에 오를 수 있다. 오랜만에 깊고 푸른 강물을 만난 듯 하다. 그동안 바닥이 훤히 드러나는 얕은 강물에 익숙해져서인지 이 강물이 조금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푸른 강물 위에 떠 있는 조각배는 풍경과 잘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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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가 왜장을 끌어 안고 강물로 뛰어 들어 순국한 바위로 알려진 '의암'은 원래 위험하다 하여 '위암'으로 불렸었다. 그녀의 의기를 기리기 위해 '의암'이라는 이름으로 고쳐부르기 시작했으며 바위에는 진주의 선비 정대룡이 새긴 '의암'이라는 글씨가 있다.

푸른 하늘과 강물, 햇살이 좋아 바위 위에 철퍼덕 앉았다. 함께한 동생도 앉게 하고는 사진도 찍어주고, 이런 저런 메모도 끄적 거리며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차갑던 바람도 잦아들어 마음같아서는 신선놀음을 즐기고 싶었지만 갈 길이 바빠 일찍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의암이 있는 자리 위쪽으로는 의암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의암사적비는 의기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광해군 때 유몽인이 떠도는 이야기들을 엮어서 쓴 「어우야담(於于野談)」을 통해 논개의 순국 사실이 알려지자 진주의 백성들이 비와 비각을 세워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는데, 그 구절이 아련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색기가 가득한 얼굴을 상상한 걸까, 얼굴이 생각과 다르네

 의기사에 모셔진 논개의 영정
 의기사에 모셔진 논개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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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의 왼편으로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가 있다. 처마 밑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 및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 있다.

논개의 이름과 업적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영정을 본 것은 처음이다. 아니, 언젠가 봤지만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내 기억에는 처음. 살아오며 자주 접한 이름이건만, 기생이라고 자주 들어서였을까, 은연중에 박힌 이미지가 있었나 보다(논개는 장수현감 최경회의 후처라고 전해진다. 왜장 자축연에는 기생으로 위장해 참석했다고 한다).

영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생각했던 생김새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색기가 가득한 얼굴을 상상했던 걸까? 그녀의 단아하고 모성이 느껴지는 외모가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녀의 꾹 다문 입매에서 느껴지는 다부짐은 상상속의 논개와 같은 모습이다.

의기사를 나오는 길, 담장 옆에 심어진 대나무가 유독 푸르게 보인다. 논개의 의로움을 닮은 곧은 줄기가 그녀가 모셔진 사당과 잘 어우러져서일까?

1천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10만 대군 물리쳐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촉석정 충단비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촉석정 충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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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를 나와 앞 쪽 계단을 오르면 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이 광장에는 각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2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촉석정 충단비'가 세워져 있다.

먼저 김시민장군 전공비는 임진왜란 3대첨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공을 새긴 비이다. 비문에는 1천명이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명의 대군을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 장군은 터무니 없는 숫자의 군사로 왜적을 꺾고 승전고를 울렸을 뿐만 아니라 영남과 호남 사이의 길목인 진주성을 사수해내며 왜병의 호남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 직후 진주 고을 백성들에 의해 세워졌다.

촉석정 충단비는 제 2차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 김천일, 황진, 최경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간 왜적이 보복전을 시도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고, 이 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용감하게 맞서 싸우다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었다. 이에 숙종 12년,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 촉석정 충단비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촉석루 앞쪽 담장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으로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쪽문이 보인다. 문이 잠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혹시나 하고 문고리를 돌리니 다행히 문이 열린다. 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의기사의 뒤쪽으로 쌍충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3호로 지정된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공이 새겨진 비석이다. 정조 16년에 촉석루의 옆에 세워졌던 것인데 일제 때 일본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만 남아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수령 이하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으라

 공북문 근처 언덕길에 세워진 영남포정사 문루
 공북문 근처 언덕길에 세워진 영남포정사 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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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을 따라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멀리 진주성의 북문인 공북문이 보인다. 공복문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3시와 4시 2회에 걸쳐 수성중군영 교대의식이 펼쳐진다. 멋진 의식을 관람하고 싶다면 시간을 맞춰 다녀가는 것이 좋겠다.

공북문 쪽으로 향하다 왼쪽 언덕길로 올라서면 영남 포정사 문루와 맞닿는다. 영남 포정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3호로 조선조말 경남 관찰사의 선화당(관찰사가 정무를 처리하던 정청 건물) 관문으로 망미루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조선조 광해군 10년, 병사 남이흥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집무청인 관덕당 내동문으로 건립한 이래 경상도우병영의 관문으로도 활용되었다.

고정 32년,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제로 시행함으로서 이곳에는 진주부가 설립되어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다음해인 건양원년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경상도 관찰사의 선화당 관문이 된 이래 1925년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갈 때까지 문루로서 영남포정사라 이름하였다. 이 건물을 본딴 영남포정사가 창원시 용지공원에도 세워져 있다.

영남포정사 입구에는 '수령이하개하마비'라고 적힌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수령 이하의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라는 뜻이다.

군수의 딸을 사랑한 머슴

 진주성 한켠에 흐트러져 있는 돌무더기들은 용다리의 전설을 담고 있다.
 진주성 한켠에 흐트러져 있는 돌무더기들은 용다리의 전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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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포정사를 지나 오른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진주성 비석군이 있다. 조선조 선조 37년 지금의 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해서 총 30여개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 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아 옮겨놓은 것들이다.

비석군의 왼편으로는 용의 모양을 한 돌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동성동 삼성화재 부근에 놓여 있던 '용다리'라 불리던 돌다리의 흔적들이다. 어디를 가나 슬픈 사랑에 관한 전설은 하나씩 있는 법, 이 돌다리 역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 군수 이씨에게 세 명의 딸이 있었다. 그 중 둘째 딸은 출가하자마자 남편이 죽어 친정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이 집의 머슴인 돌쇠가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함과 충직함에 끌리게 된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로 인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고, 아씨는 상사병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 용다리 위에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죽은 아씨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아씨"하고 소리를 지르다 미쳐버리고 만다.

이후, 군수는 딸을 잃은 이 지역을 떠나기 위해 막 용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따라오던 돌쇠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살펴보니 다리 옆 고목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된다. 그 때 갑자기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마리나 될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이 마치 죽은 돌쇠의 울음 소리와 같았다. 그 뒤로부터 용다리 밑은 진주에서 개구리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커플이나 부부가 지나가면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끊기고,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다리를 두 번 왔다 갔다 하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라도 이루게 하려는 돌쇠의 지성이라고들 말했다고 한다.

전설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얼토당토 않고 유치하지만 그래서 전설이 아닐까? 미신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용다리가 남아 있었다면 한번쯤 건너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다.

눈 앞에 진주국립박물관, 다시 힘 내 전진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던 북장대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던 북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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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다리의 돌무더기를 지나 걷다보면 성벽 가장자리에 북장대가 자리하고 있다. 북장대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4호로 조선 중기에 건축된 건물로서 내성과 외성에 포진한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일명 진남루라 부르며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18년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촉석루에 올랐을 때는 남강을 낀 진주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면, 북장대에서는 진주의 중심 상권을 이루는 시가지의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다. 하지만 촉석루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야간에는 개방을 제한하고 있다. 엄격한 제재는 없지만, 앞 쪽 표지판에 야간에는 위험하오니 올라가지 마라는 경고 문구가 적혀 있다. 

북장대까지 걷다보니 생각보다 훨씬 넓은 면적의 진주성에 점점 체력이 소진되어 가고 있다. 호젓하게 걸으면 참 멋스러운 길들이지만, 스스로 계획한 다음 일정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빨리 움직인 것도 한몫한다. 지난 밤 한숨도 못 자고 날을 새고 출발한 동생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힘들어? 힘들지?"라는 물음만 반복해 내뱉는다.

원래는 밤에 야경을 찍기 위해 답사식으로 걸어보자고 생각했던 코스가 생각보다 길어져 포기할까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눈 앞에 진주국립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국립박물관이 눈에 보인다면 이제는 거의 끝나간다는 것이다. 다시 힘을 내서 전진.

매점 아저씨 이야기가 현실로, 허탈!

 우리나라 목탑의 모양을 형상화한 진주국립박물관
 우리나라 목탑의 모양을 형상화한 진주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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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들어선 길 가에 청계서원과 경절사가 있다. 청계서원은 고려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관전 정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년 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 심어 씨아와 물레, 베틀을 창제한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 조선 순조 33년에 영호남 유림들이 선생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의 서쪽 대평면 남강변에 서원을 세웠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진 후 1961년 이곳에 복원을 한 것이다.

경절사는 고려조 충절신 하공진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항례를 올리는 곳이다.
이 두 건물은 방문객을 허락하지 않는 눈치다.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음이 아쉽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진주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설립된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으로 임진왜란실, 역사문화실, 두암관, 특별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람객을 위하여 진주대첩을 그린 3D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강좌와 박물관 체험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목탑을 형상화하여 설계했다는 건물이 인상적이다. 평일에는 09:00부터 18:00까지, 주말에는 19:00까지 운영하며 1월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다. 관람료는 무료.

진주성을 둘러보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 다시 한번 남강 주변의 경관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안내책자에서 보았던 남강 주변의 야경이 떠올라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그날 밤, 나의 기대감은 처참히 부서졌다. 다음 행선지인 진양호에서 매점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현실이 돼버린 순간에 말이다.

에너지 절감을 위해 조명을 밝히는 것을 국가에서 제재를 한다고 한다. 좋은 의도로 행하는 제재이니 그것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관광과에서 보내주는 안내책자도 그 부분은 제외하고 보내줬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멋진 야경을 담아보겠다고 무거운 삼각대까지 챙겨가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허무하지도 않았을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dandyjihye.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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