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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깨끗하고 살기 편하다며 너도나도 아파트로 몰려가더니, 다시 옛집의 추억이 그립다며 한옥을 찾아 나선다. 겨울의 차가움이 한결 부드러워져 여행하기 좋은 요즘, 지난 13일 주말을 맞아 한옥마을이 있는 종로에 가보니 맛집을 찾아온 미식가들과 풍경을 찾아온 사진가들이 인도에 가득하다.

봄날의 나들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는 종로의 삼청동과 인사동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발길을 돌리다 도착한 곳이 경복궁 돌담길의 영추문이 이정표처럼 서 있는 통의동이다. 양반들이 살던 북촌 한옥마을과 달리 평민과 중인들이 살던 서촌 한옥마을이 있는 동네로, 마치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맘에 와닿는다. 서울, 그것도 청와대 바로 앞에 있는 동네지만 외지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아 통의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문화와 역사의 힘이 느껴지는 동네 통의동
 문화와 역사의 힘이 느껴지는 동네 통의동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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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할 통(通), 뜻 의(意) - 통의동

수도권 전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경복궁 돌담과 함께 청와대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통의동이다. 앳된 얼굴의 의경들이 산책하듯이 시민들과 함께 걸어 다닌다. 죄지은 일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더구나 자전거를 탄 나 같은 사람은 왜 그리 더 유심히 관찰(?)하는지 모르겠다. 자전거 탄 테러리스트는 못 들어봤는데 말이다. 오랜 세월 권력의 기세에 눌려 산 탓일까. 통의동의 첫인상은 마치 숨죽이고 있는 듯 했다.

경복궁 돌담길을 걷다가 경복궁의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 앞에 섰다. 궁궐의 출입문에 계절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이다니, 우리 조상들의 낭만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아직 시민들에게 개방하지 않은 영추문 너머의 높은 기와지붕 위에 있는 서유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앙증맞은 모습에 긴장감이 풀린다.

통의동에는 이 영추문길을 중심으로 한옥마을, 미술관과 독특한 카페, 책방이 들어서 있다. 주민들 외엔 유동 인구가 거의 없던 동네에 문화, 예술인들의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 위로는 청와대를 두고 바로 옆으로는 경복궁을 두었으니 예로부터 권력과 가까웠던 동네인데, 그 동네의 이름이 '뜻이 통한다', '소통한다'는 의미의 통의동이니 현재의 정치 상황과도 결부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동네다.

통의동은 멋진 예술을 보여 주면서도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는 곳이 많아 고마운 동네이기도 하다.
 통의동은 멋진 예술을 보여 주면서도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는 곳이 많아 고마운 동네이기도 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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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 된 여관, 멤버십 헌책방

이 지역은 이웃 삼청동이나 가회동, 소격동처럼 화려하지 않다. 눈길을 끄는 큰 기와집이 없고, 사진에 담고 싶은 돌담도 경복궁 담을 제외하면 없다. 하지만 웅장하게 이어지는 경복궁 돌담과 청와대로 안내하는 효자동 길, 정부청사 별관이 묘한 긴장감을 뿜어내면서 오래된 한옥과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골목에서는 진한 소박함과 정겨움이 묻어난다. 언뜻 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분위기의 공존, 통의동의 가장 큰 매력이다.

동네 골목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다양하게도 꾸며놓은 미술관, 갤러리, 책방들은 통의동 나들이의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한때 서정주 시인이 묵으며 살았다는, 지금은 미술관이 된 보안여관, 앉아 쉬기 좋은 마당이 있는 한옥집에 만든 사진 갤러리 류가헌(流歌軒), 회원제로 운용 중인 독특한 헌책방 가가린, 멋진 미술 작품들을 보여주면서도 입장료를 여전히 안 받는 통의동의 터줏대감 진화랑 등, 이들의 특징이라면 어느 한 곳 소란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하고 야트막하다.

특히 보안여관은 광복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예술인들이 자리를 잡기 전 장기 투숙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곳으로, 이들은 신문사의 신춘문예를 준비하거나 출판사에 원고를 들고 기웃거렸다고 한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주고객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지금도 보안여관을 '청와대 기숙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이렇게 통의동엔 멀리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고,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예술가들이 살았다니 문화와 역사의 힘도 느껴지는 동네다.

봄 기운에 집 대문 밖에 나와 앉아 실을 감는 주민의 모습이 정겹다.
 봄 기운에 집 대문 밖에 나와 앉아 실을 감는 주민의 모습이 정겹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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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대신 사람에게 길을 묻는 동네

통의동의 가옥들은 하늘을 가리지 않는다. 골목에 서서 고개를 조금만 들면 저 앞 청와대 뒤 북악산의 풍모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훤히 보인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의외의 막다른 길을 만나도 답답하거나 당황스럽지 않은 이유다. 봄기운 덕분에 주민들도 집 밖으로 많이들 나와 계셔서 이정표를 보는 대신에 길을 물어보기도 했는데, 골목길 담장 위의 고양이들에게 안 됐다는 동정의 시선을 받기도 한다.

잰걸음으로 동네에서 가까운 통인시장에 가시는 할아버지가 계신가 하면, 집 대문 앞에 턱 앉아 양 다리에 칭칭 두른 실뭉치을 풀면서 실패에 감아 정리하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도 계시다. 어쩜 그리 내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과 똑같은지. 동네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아주머니 앞에 앉아 이것저것 실없이 말을 붙여보기도 하고, '실패란 실을 감는 것이구나' 하고 썰렁한 유머가 떠올라 혼자 실실 웃기도 한다.     

시간이 무척 느리게 가는 동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늦은 오후 시간이 되었다. 아까 구부정한 걸음으로 시장에 가신다던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나도 통인시장에 가보았다. 동네를 닮은 작고 아담한 시장통 길을 걸어가다 멈춘 곳은 바로 떡볶이집. 그것도 그냥 떡볶이가 아닌 간장 떡볶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재료가 할머니의 오랜 내공으로 말미암아 별미로 태어난다.

인근 효자동과 함께 통의동은, 옛건물은 무조건 죄다 흔적 없이 허물고 고층 아파트와 사무실로 바꿔 짓는 재개발만이 능사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문화와 역사를 살리는 동네가 도시 곳곳으로 번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재개발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을 잃고 눈물짓는 사람들이 줄어들 테니까.


태그:#통의동, #서촌,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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