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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법을) 고치긴 고쳐야할 텐데…."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입법로비를 허용하는 정치자금법(이하 정자법) 개정안이 '동료 의원 감싸기', ' 정치인 밥그릇 챙기기' 등의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는 "정자법 개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 반개혁으로 몰리는 분위기가 돼 버렸다"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현행 정자법은 부자만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라는 지적이 오래 전부터 나왔다"며 "'검은 돈' 유입을 차단하고 대신 소액 후원금을 활성화하자는 법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관련 규정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비난 여론에 숨죽이는 정치권

 

이처럼 여론의 뭇매를 의식해 상당수 국회의원들이 숨을 죽이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정치권에는 정자법 개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큰 편이다. 물리적 충돌을 마다 않던 여야가 이번 정자법 개정 작업에는 쉽게 의견 접근을 이룬 것에는 이 같은 정치권의 기류가 반영됐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현행 정치자금법은 돈 있는 사람 말고는 정치하지 말라는 법"이라며 "과거 오세훈 시장이 만든 법의 근본 취지는 다른 정치자금 수수는 막더라도 10만 원 소액 후원금만 투명하게 받자는 것이었는데, 이를 검찰이 문제 삼고 나선 이상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자법 개정안의 소관 상임위인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의 한 의원은 "검찰의 자의적인 정치인 후원금 수사에서 시작된 정자법 개정 움직임을 언론이 싸잡아 매도하면서 정치인을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고 있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른바 '오세훈 법'으로 불리는 현행 정치자금법 등 정치관계 3법은 지난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도해 만들었다. '차떼기'로 상징되는 불법 정치자금을 통한 정경유착 등 후진적 정치문화를 개혁하라는 국민 여론과 여야의 자성 의지가 맞물려 유례 없이 강력한 조항들이 신설됐다.

 

'차떼기'의 추억 속에 탄생한 '오세훈 법'

 

단체·법인의 기부가 전면 금지 됐고 '돈먹는 하마'라는 비난을 받았던 지구당도 폐지하도록 했다. 대신 소액 후원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 1인당 10만 원까지의 정치자금 기부에 대해서는 정부가 전액 보존해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대가성 뭉칫돈'의 유입을 철저히 묶는 대신 소액 후원을 늘려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오 시장은 당시 이 같은 정치개혁 법안을 주도하면서 생긴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정수기 광고에도 출연하는 등 정치적 반사 이익을 톡톡히 얻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잠재적 범법자를 양산하는 법", "저작권자인 오세훈도 못 지킬 법"이라는 볼멘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또 후원금 모금이 쉽지 않은 일부 초선 의원들은 세비로 충당하기 어려운 지역구 사무실 운영 등에 드는 자금을 대느라 은행 대출까지 받는 자금난을 호소하기도 했다.

 

특히 '법인·단체와 관련된 자금'으로도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의 모호성 때문에 정치인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법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사 왔다.

 

야권의 한 원외 지역위원장은 "법 조항은 바뀌지 않았는데 노무현 정부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소액 후원금이 이명박 정부 들어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고 있다"며 "이처럼 법이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 명확하게 고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검사 출신의 박주선 민주당 최고위원도 7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관련 조항은 단체의 돈으로 개인이 기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지, 검찰이 이렇게 기분 내키는 대로 국회의원을 기소하라고 만든 법이 아니다"라며 "형법에 있어 죄형법정주의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므로 하루속히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번번히 좌절된 정치권의 정자법 개정

 

정치권에서는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청목회) 입법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계기로 정자법 개정에 나섰지만 여론의 벽에 부딪혔다.

 

지난해 11월 민주당은 백원우 의원 발의로  ▲ 법인·단체 기부 허용 ▲ 공무원·교사의 후원 허용 ▲ 후원자 정보공개 확대 ▲ 3자 모금허용 ▲ 중앙당 후원회 허용 ▲ 선관위의 전속고발권 규정을 담은 정자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언론의 융단폭격을 맞고 좌초됐다.

 

당시에도 '후원금 계좌로 받은 후원금은 입법로비에 따른 정치자금 수수로 보지 않는다', '60만 원 초과 기부자는 인터넷에 공개하되 뇌물죄 등의 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조항 등이 청목회 사건에 연루된 동료 의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백원우 의원은 "지난 해 발의한 개정안은 중앙선관위가 만든 안으로 전문가 공청회를 거쳐 발의한 것"이라며 "청목회 사건과 관계없이 논의해야 할 제도 개선안들이 담겼지만 결국 묻히고 말았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번 개정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 정치자금을 기부받을 경우 처벌할 수 없도록 한 조항, 기존의 '국내외의 법인 또는 단체와 관련된 자금'이라는 표현을 '단체의 자금'으로 고쳐 기부 받은 정치자금이 단체의 자금일 때만 처벌 할 수 있게 한 조항, 특정 기업이나 단체가 직원들에게 정치후원금을 납부하도록 해도 '강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처벌할 수 없도록 한 조항 등이 '동료의원 봐주기'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개정안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처리 절차에 대한 비난도 높았다. 행안위에서 정자법 개정안을 기습 작전하듯 처리한 게 '도둑이 제발 저린' 꼴로 비쳐졌다는 것이다.

 

행안위 소속 장세환 민주당 의원은 "행안위에서 개정안을 처리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라며 "차라리 여야 지도부가 정자법 개정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했다.

 

물 건너간 정자법 개정... "소액 후원 활성화 위한 제도 개선은 필요"

 

비난 여론과 함께 '거부권 행사'까지 언급하고 나선 청와대의 강경한 태도까지 겹치면서 여야 정치권은 숨고르기에 들어간 양상이다. 행안위에서 넘어온 법안을 심의할 법제사법위원회의 여야 위원들은 정자법 개정안에 대해 신중한 검토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여야 원내지도부도 '원점 재검토'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3월 임시국회 내 정자법 개정안 처리는 사실상 물건너 가게 됐다.

 

하지만 2004년 정치자금법 개정 당시 목표로 했던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대 및 소액 다수 후원의 활성화 취지를 살리기 위한 제도 개선 논의가 계속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조성대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단체를 만들고 소액 후원금을 통해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는 게 불법이 될 소지가 있는 현행법은 개정이 필요하다"며 "단체의 운영 자금을 후원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면 교사나 공무원, 노동조합원을 포함해 개인들이 내는 소액 후원금은 정치적 표현의 수단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다만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하더라도 이해관계를 공유한 회원으로 구성된 집단이 아닌 기업의 경우에는 현행법 대로 금지해야 한다"며 "이번 개정안에 포함된 '특정 기업이나 단체가 직원들에게 정치후원금을 납부하도록 해도 '강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처벌할 수 없도록 한 조항'은 기업이 직원들을 통해 정치자금을 전달할 수 있는 우회 통로가 될 수 있어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태그:#정치자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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