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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정 농촌위생연구소 정문에서(60년대 모습으로 '개정병원'으로 불렸습니다.). 뒤쪽 왼편 건물은 개정뇌병원.
 개정 농촌위생연구소 정문에서(60년대 모습으로 '개정병원'으로 불렸습니다.). 뒤쪽 왼편 건물은 개정뇌병원.
ⓒ 군산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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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옥구군 개정(군산시 개정동)의 구마모토 농장 소속 소작농 가족 2만 명에 대한 무료진료의 중책을 지고 1935년 4월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한 쌍천 이영춘 박사는 해방 후에야 꿈을 이룬다. 1948년 7월 '개정 농촌위생연구소'가 설립된 것.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모교인 세브란스 의전과 군정청 등 학계와 정계에서 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농촌(農村)은 민족(民族)의 원천(源泉)'임을 강조해왔던 쌍천은 농촌에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사양한다. 소문을 듣고 달려와 "우리를 버리고 떠나지 마시라!"라는 농장 소작인들의 간청도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1948년 11월 7일 열린 농촌위생연구소 낙성식 모습
 1948년 11월 7일 열린 농촌위생연구소 낙성식 모습
ⓒ 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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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7일에는 6천여 명의 주민과 학생 내빈이 참석하여 위생연구소 개소식과 개정중앙병원 낙성식을 가졌다. 이날 참석자들은 일제하에서 잊혔던 전통 민속무용으로 여흥을 즐기면서 신생 대한민국 국민의 감격을 맛보았다. 특히 인근의 개정, 옥산, 성산면 주민이 행사를 공동으로 주최해서 의미를 더했다. 

내빈으로는 조봉암 초대 농림부장관을 비롯하여 신현돈 도지사 등 기관장 다수가 참석하였고, 이요한, 조한백 등 제헌국회 의원 10여 명, 김구 선생, 신익희 국회의장, 이범석 국무총리는 축사를 보내 새로운 연구소 출발을 축하해주었다.

 환자를 진료하는 쌍천(1952년). 의사가 청진기로 진찰만 해도 병이 치료된 것으로 알았던 시절이었지요.
 환자를 진료하는 쌍천(1952년). 의사가 청진기로 진찰만 해도 병이 치료된 것으로 알았던 시절이었지요.
ⓒ 군산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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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은 더욱 조직적이고 과학적으로 농촌 보건의료 사업을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하여 농민에게 치료와 예방사업을 동시에, 같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벌였다. 이를 시발점으로 쌍천은 1980년 타계하는 날까지 농촌의 보건 의학에만 몰두한다.  

해를 거르지 않고 설립되는 학교와 의료기관

1949년에는 '화호진료소'가 정읍, 신태인, 부안지역 주민의 기대와 기쁨 속에 '중앙병원'으로 승격되고 건물도 중축된다. 진료과목은 내과, 소아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등으로 개정에 이어 두 번째 종합병원이었다.

 초기 ‘개정간호고등기술학교’ 모습.
 초기 ‘개정간호고등기술학교’ 모습.
ⓒ 군산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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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학교 체육행사 때 농촌 보건요원 활동에 필수였던 자전거 경기하는 모습(1956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간호학교 체육행사 때 농촌 보건요원 활동에 필수였던 자전거 경기하는 모습(1956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 군산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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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의료시설에 취업하려는 간호사가 없어 애통해하던 중 1949년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개정 간호고등기술학교'(군산간호대학 전신)를 설립하고 1951년에 첫 신입생을 모집한다. 쌍천은 아침은 죽 저녁은 밥으로 지내면서도 감사했다고 한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지 부산에서 당시 내무부장관 조병옥의 요청으로 '국립경찰병원' 창설에 참여한다. 그해 10월 개정으로 올라온 쌍천은 1951년 6월 익산군 팔봉과 김제군 죽산에 진료소를 신설한다.

1951년 9월에는 대한민국 보건부(보건복지부) 동의하에 전 농림부로부터 '재단법인 농촌위생원' 설립 승인을 받는다. 그해 12월에는 지역민의 간청으로 옥구군 '임피진료소'를 신설하고, 청년들 관심을 농촌으로 모으기 위해 농촌위생연구 학술지 <農村衛生>을 발간한다. 

1952년 3월 개정에 '농촌보건원'을 개원하고, 1954년 8월에는 민간 기관으로는 전국 최초로 '개정보건소'를 설립한다. 1955년 3월 정읍 화호(禾湖)에 '화호여자중학교'를, 1961년 5월에는 '화호여자고등학교'를 세운다.

1955년에는 경남 산청, 충북 옥천, 충남 서천, 전남 진도, 장성, 전북 진안 등 6개 군 23개 마을로 3개월 동안 무료진료를 나가 6천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였다. 무의촌 벽지와 섬으로 무료진료를 나가면 주민들이 반기면서 기뻐했다고.

 개정초등학교 학생들 BCG접종 장면 (50년대 후반)
 개정초등학교 학생들 BCG접종 장면 (50년대 후반)
ⓒ 군산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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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에는 사범학교 졸업반 학생들과 전북, 충남 일부 지역 교사들까지 참여시켜 보건 강습회를 개최했다. 강습회는 교사들 사이에 학교 보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켰고, 어린이들의 건강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쌍천은 1929년 3월 세브란스 의전 졸업식장에서 "병은 치료보다 예방이 더 중요하다. 공중보건은 의학연구의 최종 목표다"라는 내용이 들어간 에비슨(O.R Avison) 교장의 훈시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수시로 고아원(보육원)을 방문하던 쌍천은 한 살 전후의 영유아가 1년에 수십 명씩 사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1957년 8월 군산 시내에 한옥을 얻어 30여 명의 영유아를 수용한다. 이듬해에는 도지사 인가를 얻고 1963년 개정으로 옮겨 일심영아원(一心嬰兒院)이라 칭한다.

  개정뇌병원 건물.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했더군요.
 개정뇌병원 건물.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했더군요.
ⓒ 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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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다양화되면서 정신신경계 환자가 매년 증가했으나 지역에 치료기관이 없어 고민하던 중 서울대 정신과 남명석 주임교수로부터 전문의를 확보해줄 터이니 신경정신과를 신설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결핵병동을 개조하여 1961년 3월 '개정뇌병원'을 개원한다.

훗날 '개정신경정신병원'으로 명성을 떨쳤던 개정뇌병원은 그동안 소외되고 방치됐던 호남의 정신과 환자들에게 희망이었다. 특히 각종 정신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뇌파검사기와 85개의 병상을 갖춰 충남, 전남 일부 지역 환자들까지 입원과 통원치료를 병행할 수 있었다.

1962년에는 실무경험이 있는 간호사를 선발하여 강습회와 실습을 통해 유능한 보건간호사 양성에 주력하면서 세브란스 병원 간호과장을 지낸 이성덕 간호사를 간호학교 교장으로 임명하여 여성교육 책임은 여성 지도자가 해야 한다는 평소의 숙원을 달성한다.

1964년 3월부터 연세대 의대(기생충학)로 강의를 나가면서 (사)'대한 기생충박멸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한다. 1965년 7월에는 '일본 기생충예방회' 초청을 받고 방문하여 '한국의 기생충 박멸운동'을 주제로 특별 강연을 한다. 쌍천이 농촌위생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는 세상을 뜨던 해(1980년)까지 한양대 의대 기생충학 외래교수였던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골든 씨그레이브' 박사 승계자로 선정

 씨그레이브기념병원 개원식 장면.(1970년 8월1일)
 씨그레이브기념병원 개원식 장면.(1970년 8월1일)
ⓒ 군산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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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미얀마)에서 농촌 의료봉사와 간호교육 사업에 헌신하던 미국인 선교사 '골든 씨그레이브(Gordon S. Seagrave)' 박사가 1965년 타계하자 그를 지원하던 후원회(AMCB)가 보유 중이던 기금을 관리하던 한미재단(AKF)은 기념사업 승계자로 이영춘 박사를 선정한다.

1970년 8월1일 UN군 사령부와 보사부 한미재단 등 고위 인사들과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개정중앙병원 자리에 새로 준공된 '시그레이브기념병원' 개원식이 열린다. 2천5백 평이 넘는 대지에 건평 970평, 지상 4층 지하 1층, 96개 병상을 갖춘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1958년 설립된 일심영아원이 건평 2백 9평의 단층 슬라브 건물로 준공되어 건물 기증자인 모세스(Moses) 이름을 따 '모세스영아원'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1972년 8월을 기해 개정 중앙병원은 '시그레이브기념병원'으로, 일심 영아원은 '모세스 영아원'으로 명칭과 더불어 재단과 경영자가 바뀌게 된다. 

사랑의 인술(仁術) 심었던 땅에 묻히다

 쌍천 이영춘 박사 사택 입구(2010년 가을 촬영)
 쌍천 이영춘 박사 사택 입구(2010년 가을 촬영)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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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와 정원수 손질로 소일하던 쌍천은 1980년 11월 25일 개정병원 구내 자택에서 갑작스러운 천식 발작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향년 77세. 당시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고, 수많은 제자와 선후배들의 애도, 지역민들의 슬픔 속에 장례식을 치른다.   

세계적인 명성에도 서민으로 살면서 농촌 봉사만 해왔던 쌍천. 그가 세상을 뜨면서 남긴 재산은 농촌위생원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사유 재산이 아니어서 남은 가족이 한동안 비참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던 일화는 유명하다.

쌍천의 삶은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위대했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의 무한한 봉사정신은 모든 학술이 돈벌이 도구로 전락해버린 요즘 세태를 꾸짖는 듯하다. 불의와 영합하거나 도덕성이 마비된 자들에게는 쌍천의 작은 목소리도 천둥소리처럼 들렸으리라.

병들고 가난한 농민을 사랑하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촌 아동들의 건강을 위해 헌신했던 쌍천은 '농민을 위해 희생했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쌍천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김경식 박사의 회고담이다.

김 박사는 쌍천의 세브란스 의전 13년 후배. 그는 "빈궁과 질병과 무지의 삼중고에 시달리며 최저의 의료혜택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농민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것이 젊은 의사들의 사명"이라며 함께 일하자는 쌍천의 권면에 감명받아 돕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쌍천이 '농촌의(醫)'가 되었던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에도 한국은 농경사회가 계속되어 농민이 인구의 70% 이상 차지했다. 그가 만약 현시대 의학도였다면 공업단지 부근의 가난한 근로자들을 위해 '공단의(醫)' 길을 걸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쌍천 이영춘 박사는 옛 개정병원 뒷산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세브란스 의전 교수를 박차고 벽지에 뛰어들어 영면하는 날까지 농촌을 사랑했던 쌍천. 그래서 흙냄새 풍기는 개정 땅에 묻혔는지도 모른다.

 옛 개정병원 뒷산 쌍천 묘소. 마을 이름도 ‘이영춘 마을’이고, 가족묘로 조성되어 외롭지 않게 보였습니다.
 옛 개정병원 뒷산 쌍천 묘소. 마을 이름도 ‘이영춘 마을’이고, 가족묘로 조성되어 외롭지 않게 보였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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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나의 교우록> 이영춘 저
<흙에 심은 사랑의 인술> 홍성원 지음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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