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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 신드롬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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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서점가에서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다. 인문서적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가 불티나게 팔린 것이다. 평소 그런 류의 책은 출판해 보았자 수지타산을 맞추기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책은 그리도 많이 팔렸을까. 필자가 하버드대의 유명교수라서 그랬던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만한 교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그럼 책을 잘 써서 그런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서점가를 뒤져보면 그 정도의 책은 수없이 많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샌델 교수의 강의안을 조금 보충한 정도의 책에 불과하다. 꼼꼼히 읽어보면 뭐 그리 대단한 수준의 책은 아니다. 그럼, 도대체 그 책은 왜 그리도 많이 팔렸을까.

나는 위 두 가지 이유에 하나를 추가하고 싶은데, 그것은 그 책의 '주제'다. 그렇다. 그 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고, 그것이 시류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정의'는 어떤 주제보다 한국인의 관심을 끈다. 아무리 중요한 주제라도, 그것이 자유나 인권 혹은 복지나 민주주의라면, 사람들은 그것들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로 그 관련 책을 보지 않는다. 그것이 서점가의 현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의는 그 어떤 삶의 가치보다 중요하다. 너무나 오랫동안 공정과 정의 밖에서 살아서 그런지 사람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항상 꿈꾸어 왔다. 세상이 불공평할수록 정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다.

따라서 정의가 특별히 주목을 받게 되는 상황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공정한 사회라는 것을 반증한다. 사람들은 2010년 이 사회에서 너무도 많은 불의를 보았고,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막연하나마 해답을 구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명저, 롤스의 <정의론>

샌델의 책에서도 시도했지만 정의를 추구하는 방법론은 쉽지 않은 과제다. 수많은 현자들이 수천 년간 나름대로 정의를 설명하며 그 방법론을 제시했지만 어느 것도 정답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사람들은 정의로운 세상이라 찬미할까. 도대체 세상의 자원은 어떻게 분배되어야 가장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같은 물음에 대하여 답하고자 한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존 롤스의 <정의론>(황경식 옮김)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20세기 최고의 명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더욱 이 책은 명저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꾼다. 이 책을 통해 정의를 배운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에 옮겨 놓으려 한다. 롤스식 세상 바꾸기를 통해 세상은 분명 훨씬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다. 내 주변에 있는 법철학자들에게 <정의론>을 가끔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그들도 <정의론>을 선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자신들의 희망사항이라고 한다. 그만큼 <정의론>은 쉽게 넘을 수 있는 산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산을 꼭 한 번 등정하고 싶은 것이 나 같은 사람의 꿈이자 욕심이다. 그 산에 올라가면 세상의 이치에 어느 만큼은 다가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존 롤스((John Rawls)는 누구인가?
존 롤스((John Rawls).
 존 롤스((John Rawls).
ⓒ Jane R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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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John Rawls)는 1921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다음 2차 대전에 참전했다. 전후 다시 프린스턴으로 복귀하여 도덕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50년대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연구하는데, 여기에서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과 실증주의 법철학자 하트를 만나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 후 미국에 돌아와 코넬대를 거쳐 하버드대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40년 이상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이로써 그는 20세기 미국 철학사에서 롤스주의(Rawlsianism)라는 자신만의 철학적 지향을 만들어냈다. 롤스의 영향을 받은 제자 그룹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마사 너스바움, 토마스 내이겔 등은 현존하는 미국 철학자들 중 최고로 꼽힌다.

롤스의 평생 관심사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정한 입장에서 수락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바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은 이와 같은 그의 관심사를 오랜 탐구 끝에 결실로 맺은 대표작이자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서이다. 그는 이 이외에도 그의 3대 주저라고 이야기되는 <정치적 자유주의>(1993)와 <만민법>(1999)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2002년 사망하였다.

<정의론>은 왜 쓰였는가

<정의론>(존 롤즈 저/황경식 역) 책표지.
 <정의론>(존 롤즈 저/황경식 역) 책표지.
ⓒ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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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이 책이 갖는 의의를 알아보자. 현대 인권사의 흐름에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두 가지 사조라 할 수 있다. 하나는 공리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다. 공리주의는 벤담으로 대표되는 철학자들이 주장한 것인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다. 즉, 한 사회의 정의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사상이 우리 사회의 정의관에서도 압도적이다.

국회에서 예산 관련 토론을 하면 백이면 백, 공리주의적 접근을 한다. 국회의원들은 입만 떼면 다수의 국민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결론을 내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것이 바로 공리주의다. 그런데 이 접근방법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렇다. 소수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공리주의적 셈법에 의하면 소수자는 어쩔 수 없이 버려지는 패이다. 이 방법은 결코 소수자와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소수자 인권을 존중한다면 공리주의적 접근방법에 항상 찬성표를 던질 수가 없다.

다음으로 사회주의는 세상 사람을 소수자와 다수자로 나누지 않고 모두를 똑같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은 경제적 평등의 대가로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한다. 평등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힘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무자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자유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 신체의 자유 또한 그렇다. 절대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몸도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인간의 신체도 언제든지 권력행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의론>은 위의 두 가지 도전에 대하여 일정한 답을 주기 위해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리주의를 넘어 소수자에게도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사회주의를 넘어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무엇에 동의해야 할까. 어떤 원칙 하에 사회를 조직하면 사람들은 그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부를까.

이런 것이 바로 롤스가 <정의론>을 통해 만들어 내고자 했던 꿈이었다. 롤스는 그 꿈을 이 책을 통해 이루어냈고, 그랬기에 이 책은 롤스의 필생의 역작이 되었다.

사회제도의 제1 덕목은 정의

자, 이제부터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정리해 보자. 나 또한 별 능력은 없지만 성의를 가지고 <정의론>의 엑기스에 접근해 보려 한다. 우선 롤스가 정의의 가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자. 만일 우리가 사회를 계약에 의해 만든다면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엇일까.

롤스는 그것이 바로 정의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증진에 관심을 가진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람들 누구나가 가장 공정한 상태(원초적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을 말한다. 그는 이에 대해 책의 초반에서 간명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사상체계의 제1 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1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치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배척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36쪽)

정의론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제 <정의론>의 핵심에 도전해 보자. 700쪽이 넘는 방대한 이 책에서 롤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롤스는 책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말을 요약해 놓았다. 그것을 중심으로 이 세기의 책 <정의론>의 핵심을 엿보자.

[원초적 입장에서의 정의의 원칙]
사회계약을 연상시키는 원초적인 입장에서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이 무엇일까. 위에서 본 대로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어떻게 할당할 것을 합의할까. 또한, 사람들은 그 사회가 만들어 낸 사회적 부를 배분하는 원칙을 어떻게 세울까. 이에 대해 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정의론>에서 가장 중요한 정의의 원칙이다. 롤스는 이렇게 말한다.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상이한 두 원칙을 채택하리라는 것이다. 즉, 첫 번째 원칙은 기본적인 권리의 의무의 할당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며, 반면에 두 번째 것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예를 들면 재산과 권력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49쪽)

이것을 좀 부연 설명해 보자. 이것은 크게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차례로 보자.

[평등한 자유의 원칙]
이 원칙은 롤스 이론의 제1원칙이라 불린다. 한 마디로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제1원칙은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자유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롤스는 제1원칙을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표현한다.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400쪽)

그렇다면 여기에서 기본적 자유가 무엇일까. 롤스는 그 목록을 제시한다. 정치적 자유(투표의 자유와 공직에 취임할 자유), 언론과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 사유재산권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다만, 롤스의 사유재산권에서 주의할 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는 이 권리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논자에 따라서는 롤스를 급진좌파라고 하는 모양이다.

위의 권리 목록은 오늘날 인권 목록에서 말하는 자유권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 면에서 롤스의 정의의 제1원칙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롤스가 정의의 원칙을 여기까지만 말했다면 그의 정의관은 19세기 계몽철학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롤스의 진면목은 다음에서 말하는 제2원칙에서 발견된다.

[차등의 원칙]
다음으로 롤스 이론의 제2 원칙은 무엇일까. 이것은 한 사회의 경제적 원칙을 말한다. 과연 사회의 부는 어떻게 분배되어야 정의의 원칙에 맞는 공평한 것이 되는가. 완전 평등을 추구해야 할까. 아니면 불평등을 용인해야 할까. 만일 불평등을 용인해야 한다면 어떠한 한계 속에서 용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롤스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하는 불평등한 분배는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이 말은 롤스가 하나의 조건 아래 불평등, 즉, 차등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불평등한 분배가 가능하려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모든 사회적 가치(자유, 기획, 소득, 재산 및 자존감의 기반)는 이들 가치의 전부 또는 일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단순한 불평등은 부정의가 된다." (107쪽)

그런데 롤스에게 있어 관심사는 사회 구성원 중 하층민(최소 수혜자)에 대한 배려이다. 즉, 차등의 원칙은 한 사회의 최소 수혜자의 이익에 부합되어야 한다. 이것은 불평등한 분배가 된다 해도 그것이 용인되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평등한 자유와 공정한 기회균등이 요구하는 제도의 체계를 가정할 경우에 처지가 나은 자들의 보다 높은 기대치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것이 사회의 최소 수혜자들의 기대치를 향상시키는 체제의 일부로서 작용하는 경우이다." (123쪽)

차등의 원칙에서 롤스가 노리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획일적 평등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평등을 추구하지만 사회주의적 평등에서 나타난 생산성 감소의 약점을 보완하는 길은 인간의 이기적 심리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기초로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이 경우 능력 없는 사람에게 원래 자신의 기여도 보다 조금 더 분배가 가능하다면 능력 있는 사람에게 분배비율을 늘인다고 해서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등의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불평등은 구조적일 수밖에 없다. 부모 잘 만나면 영원히 잘 사는 체제는 정의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출발점이 다른 상황에서 경쟁을 해 보았자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완전한 평등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능력은 같이 평가되어야 한다. 가난한 부모를 둔 똑똑한 자식이 부자 부모를 둔 똑똑한 자식과 인생사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책임 아래 내린 선택 때문에 달라지는 것은 용인할 수 있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으로 인생이 불평등해지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롤스의 생각이다.

[평등적 자유주의]
위에서 본 것을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롤스의 정의의 제1원칙(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시민의 기본적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정의의 제2원칙(차등의 원칙)은 자유주의적 권리가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명무실한 빈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 사회주의적 인식의 핵심이다. 롤스는 두 원칙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사회를 구상한다.  그것은 최소 수혜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자유주의다. 그래서 사람들은 롤스의 정의관을 <평등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을 권리개념으로 말하면 제1원칙은 자유권과 관련이 있고 제2원칙은 평등권 혹은 요즘 말하는 사회권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가끔 충돌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예를 들면 경제적 평등이 요구되는 경우 자유를 유보할 수 있을까. 이것은 개발독재 시대에 왕왕 제기되는 딜레마다.

우리에게도 70~80년대 수많은 사례가 있다. 독재자의 논리는 우선 성장을 해야 하니 그동안은 자유를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를 위해 독재를 인정해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롤스는 이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롤스는 말한다. 만일 자유와 경제에 서열을 만들 필요가 있다면 단연코 자유가 먼저라고.

"제1원칙이 제2원칙보다 우선하는 서열적 순서로 배열되어야 한다.  … 제1원칙이 요구하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에 대한 침해가 보다 큰 사회적 경제적 이득에 의하여 정당화되거나 보상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106~107쪽)

무상급식 논쟁과 <정의론>

친환경무상급식 시행 여부를 놓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시의회가 맞서고 있는 가운데, 지난 1월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서울시와 서울상공회의소 공동 주최로 열린 '2011년 신년인사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손경식 서울상공회의소회장의 인사말을 경청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 왼쪽부터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 오세훈 서울시장).
 친환경무상급식 시행 여부를 놓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시의회가 맞서고 있는 가운데, 지난 1월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서울시와 서울상공회의소 공동 주최로 열린 '2011년 신년인사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손경식 서울상공회의소회장의 인사말을 경청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 왼쪽부터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 오세훈 서울시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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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의론>의 책장을 닫으면서 요즘 복지논쟁에 대하여 한마디 해야겠다. 이것이 바로 이런 책을 읽는 이유이다. 이런 책을 읽는 것은 그저 명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서 우리들의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여기에서는 지면상 무상급식 하나만 보도록 하자. 나는 이 문제가 왜 이렇게 파열음을 내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문제를 롤스식으로 풀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무상급식은 무상교육과 관련되어 논쟁 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무상급식 찬성론자는 무상급식은 무상교육의 한 내용이고 무상교육이 국가의 의무라면 무상급식 또한 국가의 의무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반대론자는 무상급식 문제는 무상교육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으며 만일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라면 그들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지원하면 된다고 한다. 그래야 정의의 원칙에 맞는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교육과정에서 먹는 문제는 교육의 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 먹지 않고서야 공부를 할 수 없지 않은가. 따라서 무상급식은 무상교육의 한 내용이다. 만일 무상급식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상교육이 문제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상교육이다. 왜 무상교육을 해야 하는가, 이것을 밝혀야 한다.

무상교육은 위에서 본 대로 차등의 원칙을 적용하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차등의 원칙이 허용되는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불평등이 구성원 전체에, 그중에서도 최하층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어야 하고,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무상교육은 이 중에서도 후자의 조건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교육을 공적으로 부담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사회가 된다. 아는 것이 힘이지 않는가. 못 배운 사람이 어떻게 계층 이동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가 보편적 교육이다. 이 보편적 교육을 위해 국가는 일정단계에 이르기까지 무상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무상교육은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이다. 이 안전망은 빈부의 격차와 관련이 없고 모든 이를 위한 제도이다. 공사장에 안전망이 쳐지면 거기에는 일정한 크기 이상의 돌 모두가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건 상관이 없다. 건강보험을 생각해 보라. 건강보험이 적용될 때 부자와 빈자를 차별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최소한의 안전망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 반대론자도 무상교육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도 가난한 자의 자식에 대해서 무상급식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부자의 자식인데, 그들은 부자까지 왜 무상급식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언뜻 굉장히 서민 위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들은 왜 이건희 회장 손자까지 돈도 안 내고 밥을 먹느냐고까지 말한다.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서울친환경무상급식본부 회원들은 지난 2월 9일 오전 서울 삼청동 감사원에서 '시의회 무단 불출석 직무유기, 무상급식 반대 허위사실유포, 아동인권침해·혈세낭비 광고, 선거법 위반 등'의 행위로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한 국민감사 청구서를 접수했다.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서울친환경무상급식본부 회원들은 지난 2월 9일 오전 서울 삼청동 감사원에서 '시의회 무단 불출석 직무유기, 무상급식 반대 허위사실유포, 아동인권침해·혈세낭비 광고, 선거법 위반 등'의 행위로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한 국민감사 청구서를 접수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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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특별히 재벌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이건희 회장도 보편적 복지의 당당한 대상이라고. 만일 이 말이 틀리면 이건희 회장 손자는 건강보험도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게 말이 될까. 건강보험료는 부자가 더 많이 내는데 부자에겐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부자라도 승복하기 힘들다.

부자는 가난한 이보다 세금을 많이 낸다. 국가 재정에 기여도가 훨씬 큰 사람이 부자다. 이런 사람이 그 자식을 공립학교에 보낸다고 해서 돈을 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당연히 국가에 대하여 무상교육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세금 내는 것 생각하면 사실 그 자식에 대한 무상교육은 자기 돈으로 자기 자식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따로 돈 내라고 하면 부자에 대한 이중과세다. 이것은 부자라고 해서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어디 봉인가.

무상교육은 롤스식으로 보면 당연히 해야 하고, 무상급식은 무상교육의 한 부분이니만큼 그 또한 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무상교육은 부의 세습을 막고 차등의 원칙을 적용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곧 기회균등 장치다. 따라서 무상급식은 적어도 롤스의 정의의 원칙 하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찬운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인권법 교수이며 변호사이다.



태그:#존 롤스, #정의론, #평등적 자유주의, #차등의 원칙, #무상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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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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