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남자의 삶에서 사소하지만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다. 아버지와의 팔씨름에서 처음으로 마음껏 힘을 쓸 수 없었던 날이 그 중 하나다. 스무 살을 조금 넘은 언제쯤 오랜만에 아버지의 손을 맞잡은 순간 생각보다 훨씬 가벼워진 저항을 느끼며, 혹시 일부러 져주시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지만, 결국 이제 이기고 지는 것이 나의 마음에 달리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울림 때문에 주춤거렸던 단 몇 초의 순간 말이다.

물론 아버지뿐이고, 남자들뿐이겠는가. 높고 멀고 단단하게만 보이던 앞 세대의 벽을 넘어서는 순간 모든 뒤 세대들이 느끼는 찰나의 감상이 그렇다. 해냈구나 하는 짜릿함, 그리고 그것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게 만드는 까닭 모를 서글픔. 그래서 사생결단 죽을힘을 짜내야 할 만큼 팽팽하게 맞선 채 담장 한 끝에 걸터앉아 어제와 오늘이 악수를 나누며 서로를 인정하는 한 순간이란, 어쩌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멋진 세대교체에 대한 환상인지도 모른다.

1987년 5월 16일 사직야구장에서 벌어진 한 판의 처절했던 승부를 사람들이 두고두고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 날, 오직 세월이 흘러가는 방향의 앞쪽과 뒤쪽에 서있었다는 차이를 제외하면 우와 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두 명의 전설적인 투수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힘을 뿜어내 아찔한 평행선을 그려내며 앞 세대와 뒤 세대 모두에게 희망과 위로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시대를 뛰어 넘은 큰 별, 최동원

최동원 최동원은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다.

▲ 최동원 최동원은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다. ⓒ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경남고 2학년 시절이던 19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대최강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무려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행진을 벌이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야구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국제대회를 제패했던 1977년과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올랐던 1978년 이후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막 대학 1, 2학년이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982년까지 6년 동안 그는 연세대와 실업팀 롯데에서 늘 팀이 치르는 경기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는 마당쇠였고, 그렇게 거의 혼자 힘으로 늘 팀을 정상에 끌어올리는 슈퍼맨이었다. 부상으로 거르다시피 했던 1979년을 제외하면 해마다 대학무대에서 한 번 이상씩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고, 1981년에는 실업리그와 캐나다 대륙간컵대회에서 다시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특히 혼자 6차전까지 모든 경기를 책임지다시피하며 김시진이 이끌던 경리단을 물리치고 롯데의 역전우승을 이끌었던 1981년 실업리그 코리언시리즈는 최동원이라는 이름이 곧 투수, 혹은 야구 자체를 상징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야구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별들의 이름 속에서도 최동원의 이름이 각별한 빛을 발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기 때문이다.

최동원은 시속 150킬로미터 중반대의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불필요한 구속이었다.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의 공을 던지는 투수가 몇 되지 않았던 데다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공의 빠르기란 늘 상대적인 것이어서 시속 140 킬로미터의 공을 빠르다고 느끼는 타자들에게는 시속 145킬로미터의 공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알루미늄 배트란 시속 160킬로미터가 넘는 공을 던지더라도 힘으로 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적절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구속을 유지하며 더 많은 타이틀과 더 많은 기록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역대 최고의 반열을 다툴 수 있는 것이 그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승부의 경기가 아니라 기록경기에라도 나선 선수처럼, 상대타자가 아닌 자신의 한계와 싸우곤 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빠른 공을, 가장 정확히,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많이 던지곤 했다.

그래서 그의 공은 요즘처럼 '공의 위력으로' 배트를 누르며 파울을 양산하는 '강한 공'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의 속구는 그야말로 다른 투수들의 빠른 공과 시속 10킬로미터 이상의 차이를 내는 비현실적인 스피드로 상대 타자의 인지능력과 운동능력의 한계를 비웃는 '마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육체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로 절대적으로 많은 공을 던진 그의 방식은 그 한계의 도래를 재촉했다. 프로무대에서 1984년에 또다시 시즌 27승을 올린 데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전담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것을 비롯해 4년간 75승을 기록한 뒤 맞이한 1987년, 최동원의 나이는 서른이었지만 이미 신체능력은 절정기를 한참 지나고 있었다. 물론 그 시절의 서른이란, '운동만으로 먹고 사는 것'을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시절 야구인들이 스스로 한계로 설정하던 사회적 정년이기도 했다.

'제 2의 최동원'을 넘어 '국보투수'가 된 선동렬

선동렬 선동렬의 강점은 명석한 두뇌와 유연한 몸이었다. 그는 타고 난 유연한 몸에 끊임없이 기름을 치고 조이는 부지런하고 신중한 선수였으며, 항상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투입해 필요한 구종의 공을 뿌려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투수였다.

▲ 선동렬 선동렬의 강점은 명석한 두뇌와 유연한 몸이었다. 그는 타고 난 유연한 몸에 끊임없이 기름을 치고 조이는 부지런하고 신중한 선수였으며, 항상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투입해 필요한 구종의 공을 뿌려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투수였다. ⓒ 기아 타이거즈


선동렬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80년이었다. 그 해 광주일고 3학년이던 선동렬은 봉황기대회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더니 황금사자기대회에서는 팀을 결승까지 이끌며 감투상을 받았고, 대통령기대회에서는 팀에 5년만의 전국대회 우승을 안기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한 해 내내 신문지상에 이름을 올려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대에 진학한 1981년에는 세계청소년선수권 창설대회에 참가해 초대 MVP에 선정되며 미국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고, 대학리그경기에서 시속 154킬로미터의 구속을 기록하며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 역시 동년배들에 비해 월등히 빠른 공을 던지는 유망주였고, 해마다 몇 명씩 야구기자들이 선심 쓰듯 붙여주었던 '제 2의 최동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1982년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그는 '제 2의 최동원'이라는 이름을 넘어서게 된다. 선동렬은 대학 2학년, 만 19세의 나이로 그 대회 대표로 발탁된 데 이어 컨디션 난조를 겪던 기존의 대표팀 에이스들인 최동원과 김시진을 대신해 난적들인 미국과 대만, 그리고 사실상 우승을 놓고 맞붙은 일본과의 최종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세 경기를 모두 완투해 3승(평균자책점 1.00)을 기록하며 감격적인 우승을 이끌었고, 결국 대회 MVP에 오르며 새로운 에이스의 탄생을 알렸던 것이다.

그렇게 일찌감치 거물로 자리매김한 덕분에 1985년에는 프로와 실업리그가 법정싸움까지 벌이는 대소동 끝에 '전기리그는 근신하는' 조건으로 프로무대를 밟았고, 그 해 시즌의 절반만 뛰면서도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1986년, 선동렬은 24승을 기록하며 프로무대 슈퍼에이스의 반열에 합류했다. 더구나 그 해 그는 19번이나 완투하는 등 262.2이닝을 던지는 강행군 속에서도 0.99라는 묘한 숫자를 기록지에 남겼는데, 그것은 한국프로야구사상 전무후무한 '0점대 투수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선동렬 역시 최동원에 버금가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무기는 명석한 두뇌와 유연한 몸이었다. 그는 타고 난 유연한 몸에 끊임없이 기름을 치고 조이는 부지런하고 신중한 선수였으며, 항상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투입해 필요한 구종의 공을 뿌려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투수였다.

최동원이 공을 던지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함께 불끈불끈 열이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면, 선동렬이 공을 던질 때는 관중석과 브라운관 넘어서까지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선수는 그렇게 닮은 듯 다른, 혹은 상반된 방식으로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거인들이었다.

1986년과 1987년,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하던 시대

1984년에 정규리그 27승과 한국시리즈 4승을 기록하며 가장 높은 곳에 떠올랐던 최동원이라는 태양은 85년 20승, 86년 19승으로 중력을 무시하는 궤도를 그렸고, 1985년에 혜성처럼 나타난 선동렬은 86년과 87년에 거푸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무섭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선동렬이 24승과 0.8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던 1986년, 최동원 역시 19승과 1.55를 기록하며 아직은 물러설 때가 아니라는 오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해에는 최동원과 선동렬이 두 번에 걸쳐 선발 맞대결을 벌여 한 번씩의 완봉승과 한 번 씩의 완투패를 나누어 갖기도 했다. 떠오른 태양과 아직 지지 않은 태양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을 놓고 불꽃을 튀기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처 판가름내지 못했던 승부가 이어진 것이 1987년, 5월 16일이었다. 압도적인 꼴찌 청보 핀토스를 제외하면 1위부터 6위까지 4경기차 이내에서 엎치락 뒷치락하던 전기리그의 중반이었고, 특히 해태와 롯데가 1.5경기 차로 중위권에 엉킨 채 치열한 순위 싸움을 벌이던 무렵의 중요한 고비였다. 그 대목에서 선동렬과 최동원이 선발투수로 나선 것은 해태와 롯데 모두 '자존심'이니 '흥행카드'니 하는 한가한 생각을 할 여력이 없이 저마다 '이기면 선두권을 넘볼 수 있지만, 지면 하위권으로 떨어진다'는 절박함 속에서 꺼낸 필승카드의 대충돌이었다.

1회 초와 말이 모두 삼자범퇴로 처리되며 싸늘하게 시작된 경기는, 그러나 2회 말 롯데가 김용철의 볼넷과 김민호, 정구선의 연속안타로 만든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해태 내야실책을 틈타 먼저 2점을 선취하며 균형이 깨졌다. 사실 선동렬은 고교와 대학 시절 종종 경기 초반에 실점하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던 투수였다. 이제 완성형 투수의 상징인 20승을 넘어선 데 이어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완벽'이라는 수식어까지 달게 된 그였지만, 그 날의 초반 난조 역시 천하의 최동원을 맞상대하는 한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의 떨림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동원도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었다. 몇 해 동안 조금도 늦추지 않고 전력투구만을 강행해온 무모한 행보 탓인지 구속은 '최동원'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것이었고, 그렇게 무뎌진 속구는 커브의 위력마저 반감시키고 있었다. 그는 3회 초 2사 2루에서 서정환에게 적시타를 맞아 추격의 1점을 내주었고, 5회에도 선두타자 김일권에게 안타를 내준 데 이어 차영화에게 큼지막한 2루타까지 내주는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해태 김무종의 번트 실패 덕분에 선행주자 김일권을 잡아낸 데 이어 롯데 포수 김용운이 정확한 홈 블로킹으로 해태의 대주자 이순철까지 홈에서 잡아내며 실점 없이 넘겼지만, 위기는 이어졌다.

하지만 그 날의 승부의 핵심은 힘과 기술이 아닌 자존심과 뚝심이었다. 선동렬은 초반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곧 냉정을 되찾았고, 최동원은 초반의 안일함을 자책하듯 열정을 끌어올렸다. 경기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선동렬은 들쭉날쭉하던 공을 정밀하게 스트라이크존 경계선에 꽂아넣기 시작했고, 최동원은 구속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만화에서는 늘 냉철한 안경잡이 에이스로 그려지던 최동원이 불의 기운으로 싸웠다면, '해'라 불리던 선동렬은 물의 기운으로 맞서는 형국이었다.

해태와 롯데의 타자들은 삼진, 혹은 기껏해야 내야 땅볼을 주고 받으며 부지런히 타석과 더그아웃 사이를 오고갔다. 하지만 흐름이 이어지는 한 이미 초반에 만들어진 한 점의 열세를 안은 해태 쪽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9회 초,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선두타자 6번 한대화가 안타를 치고 출루하자 7번 김일권에게 보내기번트를 지시했고, 8번 타순의 포수 장채근마저 빼고 왼손 타자 김일환을 내세우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최동원은 그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 어느 것보다도 짜릿했을 1승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결국 김일환이 우익수 키를 넘기는 커다란 2루타를 때려 2루의 김일권을 불러들이며 동점을 만들었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늘 경기 전에 이미 남들 한 경기 던질 만큼의 공을 뿌리며 몸을 풀던 최동원의 어깨는 이미 한계를 한참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롯데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그리고 늘 그 자존심에 대한 책임을 완벽하게 져왔던 최동원을 함부로 내릴 수도 없었다. 상황은 여전히 동점이었고, 더구나 상대는 다른 투수도 아닌 선동렬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해태 쪽에도 있었다. 선동렬 역시 만만치 않게 많은 공을 던지고 있었지만 네 살이나 많은 최동원보다 먼저 '체력'을 핑계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미 여러 차례 최동원을 흔들어보느라 대타와 대주자 카드를 꺼냈던 해태는 주전포수 김무종과 백업포수 장채근, 그리고 포수 수비가 가능한 이건열마저 모두 소진해버린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신들린 연장투구, 전설이 된 마지막 승부

선동렬 vs 최동원 1987년 5월 16일, 두 명의 전설적인 투수는 15회까지 팽팽하게 마주 달리며 한국프로야구의 기념비를 세웠다.

▲ 선동렬 vs 최동원 1987년 5월 16일, 두 명의 전설적인 투수는 15회까지 팽팽하게 마주 달리며 한국프로야구의 기념비를 세웠다. ⓒ 한국야구위원회


결국 연장 10회, 마운드에 다시 선 것은 최동원과 선동렬이었다. 그리고 해태는 내야수 백인호가 포수마스크를 쓰고 앉는 진풍경까지 연출해야 했다. 하지만 경기의 양상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삼자범퇴, 삼자범퇴. 어차피 변화구를 잡아줄 수 없을 초보 포수에게 선동렬이 던질 수 있는 것은 직구뿐이었고, 최동원 역시 최대한 투구간격을 좁히며 직구 위주의 간결한 피칭을 이어갔다.

한계를 넘어선 투수들의 질주를 지켜본 적이 있는 이들은 그 현기증 나는 몰입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예컨대 박충식이, 예컨대 박정현이 체력이 모두 고갈되어버린 순간부터 마치 초인으로 변신한 듯 묵묵히 놀라운 위력의 공을 꽂아 넣으며 주위의 말문을 막아버리던 장면들 말이다. 말 그대로 '신들린 듯' 던지는 투수들. 바로 그렇게 최동원과 선동렬은 신들린 듯 다시 6이닝을 던졌고, 연장 15회 말 선동렬이 롯데의 마지막 세 타자를 연달아 삼진으로 잡아내며 길고 긴 승부의 끝이 맺어졌다.

232개의 공을 던져 7피안타 6사사구 10탈삼진을 기록하며 2실점한 선동렬, 그리고 209개의 공을 던지며 11피안타 7사사구 8탈삼진과 역시 2실점을 기록한 최동원. 물론 경기 결과는 무승부였다.

그 순간 이후 두 선수 사이의 맞대결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 때는 알 수 없었지만, 그 1987년은 최동원의 전성기 마지막 해였기 때문이다. 최동원은 이듬해 7승으로 주저앉은 데 이어 1989년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되어 그토록 사랑했던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는 충격을 겪어야 했고, 다시 그 다음해인 1990년에 패전처리를 전전하는 수모 속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반면, 선동렬은 좀 더 높은 곳으로 떠올랐고, 최동원마저 사라진 마운드에서 그는 한국야구의 정점으로 좀 더 오래 군림하게 된다. 그렇게 그 해의 치열했던 맞대결을 끝으로 최동원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선동렬의 시대는 더욱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최동원과 선동렬, 여전히 그 이름이 주는 떨림

다시 십수 년이 흘렀고, 이제 선동렬의 시대마저 흘러가 버린 지 오래다. 그 뒤로 이상훈이 있었고, 정민태가 있었고, 다시 이제 류현진과 김광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1987년 5월 16일 이후 그렇게 처절한 저항과 충돌 속에서 화려하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야구장에서 세월은 다시는 그렇게 굵은 마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미 흘러 지나간 시대의 영웅들이었던 최동원과 선동렬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작지 않은 떨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남긴 위대한 업적과 기록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통해 느끼고 상상하는 우리 삶의 눈물겹도록 엄숙한 단면들 때문이다. 한 경기가 아닌 하나의 삶이, 그리고 한 시대가 결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님'을, 그리고 '멋진 끝이 멋진 시작을 낳을 수 있음을' 말이 아닌 몸으로 증명한 한 순간 때문이다.

최동원과 선동렬 최동원과 선동렬은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의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야구팬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름들이다. 그런 이들을 '전설'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넘치는 일이 아니다.

▲ 최동원과 선동렬 최동원과 선동렬은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의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야구팬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름들이다. 그런 이들을 '전설'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넘치는 일이 아니다. ⓒ 한국야구위원회


선동열 최동원 김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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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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