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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부의 상징이던 냉장고. 불과 50년이 지난 지금 집집마다 냉장고 한 대는 기본이고 김치냉장고는 선택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점점 커지는 냉장고는 우리네 삶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달라지는 냉장고를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았다. [편집자말]
대용량화 추세에 있는 냉장고들
 대용량화 추세에 있는 냉장고들
ⓒ 박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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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접살림으로 180리터짜리 소형냉장고부터 시작한 나의 냉장고 편력은 800리터에 육박하는 지금의 초대형냉장고에 이르렀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저 냉장고의 끝없는 속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다사다난하게 살아온지도 모른다. 빙하기 생물들의 화석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먹거리들이 박힌 냉장고 문을 열면 마치 포만한 공룡의 뱃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냉장고, 그 욕망의 대합실. 김정희(수필가)

한국의 냉장고들이 커지고 있다. 2월 22일 현재 출시되었거나 출시 준비 중인 냉장고들을 살펴보면 각 기업들이 대용량화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1년형 '디오스' 냉장고를 출시 준비 중인 LG전자는 21일 보도자료를 통해 "22일 6종의 대용량 양문형 냉장고를 우선 출시하고 3월 중에 40종의 새로운 모델을 선보인다"고 밝혔다. 이 중에는 세계 최대 규모인 850리터 냉장고도 포함되어 있다. 삼성전자도 지난 16일 보도자료를 통해 2011년형 '지펠' 양문형 냉장고 25종을 선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대용량 냉장고의 인기는 매우 높은 편이다. 841리터 용량인 '지펠 그랑데스타일 840' 냉장고는 작년 9월 출시된 지 2개월 동안 약 1만 대의 판매고를 올려 이전 모델인 '지펠 마시모주끼'가 세운 최고기록인 3개월 1만 대 판매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시장조사기관인 GfK코리아는 '2009, 2010 한국 가전시장 동향 및 전망'에서 "양문형 냉장고의 수요가 일반형을 압도하고 있으며, 양문형의 경우 700리터 대의 비중이 급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하반기 600리터 대의 냉장고가 전체에서 차지한 비중은 74%였지만 2010년 상반기에는 4%까지 하락한 반면 같은 기간 중 700리터 대의 냉장고 비중은 24%에서 92%까지 4배가량 상승했다.

700리터 이상의 양문형 냉장고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0년 상반기 95%까지 늘어났다.
 700리터 이상의 양문형 냉장고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0년 상반기 95%까지 늘어났다.
ⓒ GfK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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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제품 전문판매점 하이마트의 한 관계자는 "최근 트렌드가 대형화 추세로 흐르면서 기존 500, 600리터 대보다 700리터 이상의 냉장고가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매장에서 사라진 일반형 냉장고, 이제는 양문형이 대세

실제 기자들이 찾아간 서울 주요 백화점 및 대형마트 매장에서 양문형이 아닌 일반형 냉장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가전매장의 한 직원은 "10년 전부터 양문형 냉장고가 나오면서 요즘 일반형 냉장고는 생산은 되지만 찾는 고객이 없어 매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매장에서는 800리터 이상 양문형 냉장고가 가장 잘 나가는데 평일에는 3대~4대 정도, 주말엔 10대 정도가 팔린다"고 말했다.

LG전자 마케팅팀의 김지윤씨는 요즘 출시되는 냉장고의 특징에 대해 "2006년, 2007년에는 디자인에 중점을 두었다면 최근 출시되는 제품들은 저장 용량도 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 공간 활용도 극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출시된 양문형 냉장고 용량은 674리터였다. 15년이 지난 2011년 현재에는 세계 최대 수준인 841리터의 냉장고도 출시된 상태고 3월 850리터 냉장고도 출시될 예정이다. 김치냉장고도 최초로 출시된 1995년, 53리터였던 용량이 현재 405리터까지 커졌다.

이렇듯 기술의 발달과 함께 냉장고 용량도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그러나 대용량 냉장고의 등장이 편리하기만 할까? 집에 대용량 냉장고가 있는 주부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기자와 만난 주부들은 냉장고가 커지는 것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버리는 음식도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싼 맛에 샀더니 버린 게 더 많아

한 대형마트에서 1+1 행사로 판매하는 햄과 유제품들. 요즘 대형마트에서 묶음상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대형마트에서 1+1 행사로 판매하는 햄과 유제품들. 요즘 대형마트에서 묶음상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 정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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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는 무조건 커야 해. 큰 게 좋아"

가정주부 유인주(51)씨 집에는 720리터 대용량 냉장고가 있다. 유씨는 주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싼 가격 때문에 묶음상품 등 대량으로 물품을 구매한다. 장을 본 후 집에 있는 양문형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넣지만 결국에는 그 때 구매한 음식의 20% 정도는 버린 경험이 있다.

유씨는 "일반형 냉장고는 여름에 수박 하나만 넣어도 꽉 찬다. 여러 가지로 많이 넣을 수 있는 큰 냉장고가 살림하기에도 편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텔레비전 가전광고를 보다가 큰 냉장고를 보고는 멋있다는 생각에 바꾸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냉장고가 너무 비어 있으면 살림 안 하는 느낌이라…."

서울 상암동의 한 대형마트에서 만난 송회영(32)씨는 1년 전 이전에 쓰던 600리터 냉장고를 최신 760리터 양문형 냉장고로 바꾸었다.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고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양문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교체한 냉장고의 용량이 커진 만큼 버려지는 음식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냉장고 안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 결국 시간이 지나서 먹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송씨는 "냉장고를 바꾸고 난 이후에 버리는 음식들이 10% 정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또 송씨는 대형마트에서 묶음상품으로 유제품을 사거나, 한 번에 많은 양의 고기를 산 경험도 있는데 결국 유통기한을 넘겨 쓰레기통에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 꺼내보니 발 디딜 틈 없어
대형 냉장고가 가정에 보급되자 냉장고에서 보관하다가 버리는 음식 또한 많아졌다.
 대형 냉장고가 가정에 보급되자 냉장고에서 보관하다가 버리는 음식 또한 많아졌다.
ⓒ 박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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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냉장고에 먹지도 않고, 쌓인 음식이 많을지는 미처 몰랐다. 앞으로 (시장) 좀 그만 봐야겠어."

홍아무개(60)씨는 지난 해 10월 730리터 용량의 '지펠' 냉장고를 구입했다. 2인 가구 살림에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했지만, 다들 대용량 냉장고를 사는 추세이기 때문에 구입을 결정했다. 전에 쓰던 일반형 냉장고에 비해 여유 공간이 생기니 장보는 씀씀이도 달라졌다. 재래시장에서 제철음식들과 대형마트 행사품목들을 대량으로 구매해 냉동실에 비축해 놓았다.

730리터 대형 냉장고를 채우고 있는 물건들을 알아보기 위해 일일이 다 꺼내보았다. 냉장고를 가득 채운 물건을 꺼내보니 부엌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냉장실에 있는 야채들 중에는 구입한 지 2개월이 훌쩍 넘어 상해버린 양배추들도 있었고, 시금치, 당근, 깐 마늘 등은 신선도가 떨어져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냉장고와 냉동실에서 쏟아져 나온 음식물들
 냉장고와 냉동실에서 쏟아져 나온 음식물들
ⓒ 구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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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용량 냉장고 특성상 품목별로 구분은 가능했지만, 집에서 식사를 잘 안 하기 때문에 상해서 버리는 음식도 많았다. 이외에도 냉장실 안 쪽 구석에 있던 열무김치와 깻잎조림은 이미 쉬어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냉동실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구입 시기조차 알 수 없는 불고기 두 근, 돼지고기 반 근이 두 봉지에 각각 담겨 있었으며 지난 10월에 대량 구매해서 먹고 남은 굴과 오징어도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지난 7월에 산 치즈와 호두, 블루베리 등은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고등어, 연어, 명태, 조기 또한 대형마트에서 행사품목으로 다량 구매했지만 구입 후 계속 냉동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점점 대용량화되는 냉장고는 대형마트를 이용해 한꺼번에 대량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소비행태와 맞물려 소비자들의 과소비를 유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결국 낭비로 이어지고 있다.

대용량 냉장고, 일본에서는 잘 안 써

일본 가전제품 판매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냉장고들.
 일본 가전제품 판매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냉장고들.
ⓒ 누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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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용량 냉장고를 쓰면 필요 이상으로 많이 구매하고, 음식을 많이 버리게 된다. 자녀들은 부모의 생활 방식을 보고 배운다. 많이 쓰고 버리는 모습을 자녀들이 보면 따라하게 된다. 일본에서 냉장고는 2~3일 동안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용도로 쓰기 때문에 대용량 냉장고는 잘 안 쓴다. 반찬도 그때 그때 해먹고, 필요한 만큼만 장을 보기 때문에 버리는 음식이 별로 없다."

한국에서 12년째 살고 있는 야마다 게이꼬씨는 한국의 대형 냉장고 바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실제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쓰는 700리터 이상 대용량 냉장고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최근 들어 맞벌이 세대를 중심으로 대용량 냉장고를 구매하는 추세지만, 475리터, 560리터 냉장고가 잘 팔리며 대부분 일본 가정에서는 500리터 미만의 중형 냉장고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게이꼬씨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 일본인들은 2~3일에 한 번씩 마트에 가서 식료품 등을 필요한 만큼만 구매한다. 또 대형마트에 있는 카트의 경우, 한국은 크고 깊어 물건을 많이 담을 수 있는 반면 일본의 카트는 장바구니 하나 들어갈 정도의 크기다. 이외에도 절약이 생활화된 일본 가정에서는 냉장고의 60%만 채우는 것이 효율성이 가장 좋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냉장고를 꽉 채우지 않는다.

850리터 냉장고 정말 필요해?

냉장고가 대용량화 되는 원인에 대해 LG전자 김지윤씨는 "맞벌이 부부의 증가 및 대형마트 위주 구매 습관 등으로 한번에 많은 양의 식품을 구매해 냉장고에 넣어두는 추세"라며 "냉장고를 보통 10년 정도 사용하는 가전으로 간주하는데 구매시점에서 장기적인 미래까지 고려해 큰 용량을 선택하는 고객이 많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대용량화의 원인을 기업들의 판매 전략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한 시장조사기관 관계자는 대용량 냉장고의 판매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제조사에서 대용량 냉장고에 주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인규 한신대 사회학과 겸임교수도 "기업의 대용량냉장고 마케팅과 맞물려 가정의 냉장고가 점점 대용량화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냉장고가 현재 생활필수 가전제품이고 가전제품 시장이 과점적 경쟁시장이기 때문에 판매-소비 과정에서 소비자가 제조업자의 공급에 따라가는 비대칭성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제조업체가 대용량 냉장고를 주력상품으로 삼는 이상 개별가구가 대용량 냉장고를 구매하는 경향은 강해진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마케팅팀의 한 관계자는 "기술이 발달하고 소비패턴의 변화로 인해 대용량 냉장고가 대중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대용량 냉장고의 판매마진이 중형 냉장고보다 크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마진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용량 냉장고의 판매마진이 더 큰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구태우, 박종원, 김재우, 정민지 기자는 <오마이뉴스> 13기 인턴기자 입니다.



태그:#냉장고, #과소비, #대용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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