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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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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만주 지도(러시아의 연해주도 원래 만주의 일부였다)
 만주 지도(러시아의 연해주도 원래 만주의 일부였다)
ⓒ World Fact Book(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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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이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앞으로만 내다보는 게 아니라 위에서도 내려다보는 그의 안목과 식견이 아니었을까. 어떤 구조물을 이해하려면 설계도에서 입면도와 평면도를 같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독립운동 역시 눈앞의 적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의 판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안목도 갖춰야 한다. 입면도 상의 적은 높아 보이기 마련이지만 평면도 상의 적은 어디에 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청산리전투까지 무기를 들고 싸웠지만 그 이후의 독립운동은 끊임없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예고할 뿐이었다. 박용만은 발상의 전환을 고민했다. 잠자던 그의 정치 감각이 서서히 움을 텄다. 원래 그는 대학의 정치학과 출신이 아니던가. 그는 일본을 다시 보기로 했다. 앞으로만 볼 게 아니라 위에서도 내려다보기로 한 것이다. 앞에서 본 일본은 높고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 볼 때는 사정이 달랐다. 국제정세라는 평면도 위에서 볼 때 일본은 반드시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주라는 지정학적인 판도를 놓고 박용만은 두 가지 새로운 착상을 한다. 하나는 일본과 소련, 그리고 중국 사이에 한인들만의 새로운 완충국을 건설하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일본과 함께 막으면서 그 틈에 한인들의 둔전촌을 건설해 보겠다는 거였다.  
 
만주의 신경에 있었던 일본의 관동군 사령부
 만주의 신경에 있었던 일본의 관동군 사령부
ⓒ 미상(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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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13일 북경주재 미 대사관의 해군무관 케니스는 미국의 한 기자로부터 받은 보고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작년 10월 15일 경 나는 러시아의 재정지원을 받는 두 단체 즉 이르크츠크 그룹과 치타 그룹에 대해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그룹들은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정한 독립운동자들의 조직과 영향력을 뒤엎고 파괴하는 공작을 펴고 있습니다. 저들의 공작은 지금 완성된 셈입니다.

독립운동의 중심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고국의 우리 육해군 당국에 잘 알려진 우리의 친구가 되는 박용만 즉 한때 독립운동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던 박용만은 현재 고립됐고 볼셰빅을 지향하는 코리언들은 모든 독립단체 중에서 빠른 속도로 지휘권을 장악 중에 있습니다. (중략)

우리의 잠재적 맹우(盟友)로서의 통일된 친미 독립단체가 존재할 전망은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친구 중 가장 힘세던 인물은 박용만 씨였는데 그는 지금 은퇴해 훈하(河) 유역에서 땅을 빌려 쌀농장을 경영 중에 있으며 그가 전문가이기도 한 코리아 고대사와 퉁구스어학에 관한 도서수집에 힘쓰고 있습니다."

해군무관 케니스가 보고서에 언급한 대로 박용만은 틈틈이 조선의 고대사를 연구했다. 자주 만나던 신채호의 영향도 컸다. 시일이 한 참 지난 1927년 6월 그 결과물로 역사책을 한 권 출판했다.

김노규 선 <대한북여요선(大韓北輿要選)>과 박기정(註-박기정은 이승만 실각 후 임시대통령이 된 박은식의 필명)이 지은 <대동고대사론>, 그리고 자신이 쓴 논문 <제창아조선독립문화지일이어(提倡我朝鮮文化之一二語)>을 한 데 묶은 책이었다. <대한북여요선>은 만주 옛 우리 땅의 경계와 연혁을 논한 것이고 <대동고대사론>은 만주가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박용만은 고대사 연구에 그치지 않고 만주의 지정학적인 조건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만주와 중국 화북 지방은 봉천파와 직예파가 패권을 다투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의 진출이 노골화되기 시작하고 게다가 동진을 끝낸 러시아가 이제 남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공산주의 세력과 제국주의 세력이 만주에서 불꽃을 튀기며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는 판국이었다. 이 세력들의 충돌을 피하려면 강대국 사이에 완충국을 두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주와 연해주에는 2백만이 넘는 한인 이주자들이 존재한다. 그 완충국의 수립이 한인들에게 맡겨질 수는 없을까. 더군다나 만주는 우리 조상들의 뼈가 묻힌 땅이 아니었던가. 자, 그러면 어떻게 한다?

케니스의 보고서에 박용만은 미국의 친구로 기록된다. 여전히 해군무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런 연유로 해군무관은 기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동태를 체크하고 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약진을 하고 있는데 비해 그는 고립되고 위축돼 있음도 보고서에 나와 있다.

1917년 11월 7일 볼셰빅 혁명이 성공했다. 이어 1922년 시베리아 전쟁에서 백군이 패망함으로서 소련은 차츰 그 영향력을 동북아로 뻗치고 있었다.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약진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이 공산주의의 팽창에 가장 긴장을 했던 국가가 일본이고 북경 주재 미국 대사관도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공산주의를 혐오하기는 박용만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 1월 박용만은 상해, 나가사키, 서울, 하얼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창조파'가 국민위원회를 소집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측의 묵인과 지원을 받았다. 소련의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차라리 일본과 협력을 해서라도 그 팽창을 막아보겠다는 의도에서 돌출행동을 감행한 것이다.
 
'국민대표회'를 열자고 말이 난 것은 '군사통일주비회'에서였다. 그 선언서 첫머리에 '국민대표회를 소집할 것을 내외에 선언하노라'고 못을 박지 않았던가. 상해에 있던 안창호나 여운형도 화답했다. 상해의 여론도 임시정부의 침체와 난국을 돌파하려면 국민대표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판을 새로 짜는 것은 좋으나 아예 둘러엎는 것은 반대한다는 소위 '개조파'의 입장이었다.

1922년 4월 임시정부 의정원은 대표회의 소집을 가결하고 5월 10일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준비위원회는 박용만 등 네 사람을 선정하고 신채호가 주관하여 홍보용 주보인 '대동'을 발간했다. 그러나 임정 고수파의 반대, 대회경비의 자금난 등 곡절이 많아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열린 건 1923년 1월. 회의는 약 5개월 동안 진행됐다. 박용만은 전망이 회의적이어서 상해로 가지 않았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상해 황포구의 인민정부대례당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상해 황포구의 인민정부대례당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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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수는 개조파가 57명, 창조파가 32명 기타 등등 모두 125명. 개조파가 먼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게 5월 중순. 회의는 창조파만 남아서 새로운 정부를 '창조'했다. 6월 7일 비밀회의에서 헌법을 제정, 입법부로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행정부인 국무위원회를 조직한 다음 '한국정부(韓國政府)'를 탄생시키고 폐회했다. 분열에는 도가 튼 민족임을 다시 한 번 과시한 셈이다.

두 달 후인 8월 창조파 인사들은 자신들의 작품 '한국정부'를 떠메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던 낭패가 벌어졌다. 소련정부로부터 인정은커녕 추방 명령을 받은 것이다. 소련이 보기에는 어떤 민족이건 연합전선으로 나가야 하는 건데 싹수가 틀렸기 때문이다. 창조파는 난국을 수습해야 했다. 명색이 정부 구조였으니 입법부 격인 국민위원회를 열어 대책을 토의할 수밖에 없었다. 각지에 있는 창조파 인사들에게 1924년 2월 22일 회의를 열겠다고 통고 했다. 박용만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것을 결심한다. 

국민대표회가 산산 조각난 그즈음 조선총독부가 파견한 밀정 목등극기는 박용만의 비참한 신세를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직책은 통역관으로 돼 있었지만 한인 담당 밀정이었다. 1923년 6월 8일 그가 작성한 보고서를 다시 보자.  

"(전략) 박용만은 석경산 농장의 작년도 토지임대료까지 지불 못해서 지주인 중국 모 사원은 드디어 이를 관에 고소하기까지 이르렀다. 한편 은행 측의 박, 김에 대한 신용은 더욱 떨어짐과 더불어 농사경영은 불가능해지고 겸하여 동 은행에서 자금을 얻어 만주 방면에 있어서의 군사통일회 토지구입 계획도 드디어 화병(畵餠)에 돌아가 버렸다. 그 위에 일정한 수입이 없고 처첩 기타 권속을 부양해야 될 박용만은 최근에 이르러 생활난의 절정에 달해 무엇이든 신생면(新生面)을 열지 않으면 안 될 궁경에 떨어졌다. (하략) "

1900년대 초 북경의 이화원 풍경.
 1900년대 초 북경의 이화원 풍경.
ⓒ I. Giel(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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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는 총독부 촉탁인 밀정 김달하(金達河)가 있었다. 목등극기는 그로부터 한인들에 대한 정보를 건네받고 있었을 것이다. 1925년 3월 김달하는 다물단원에 의해 한 밤중 처형당했다.

그는 밀정이 되기 전에는 애국지사였고 지식인이었다. 평북 의주 출신으로 서북학회가 조직됐을 때 총무로 일했다. 또 서북학회가 발행하는 '서북학회월보'의 편집을 맡았다. 서북학회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의 인사들이 1908년 서울에서 조직한 단체로 안창호, 이동휘, 박은식 등이 관여했다. 정치단체였지만 표면적으로는 교육운동을 내세웠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민중의 계몽에 뜻을 두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해체됐다.

안창호는 김달하가 밀정인 것을 알면서도 교제했다고 김창숙에게 귀띔했다. 세계기독교 청년대회가 북경에서 열렸을 때 이상재와 김활란이 참가했다. 두 사람이 김달하의 집에서 유숙한 건 그가 김활란의 형부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김창숙도 접촉하게 됐다. 김달하는 그를 매수해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총독부로부터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얻어줄 수 있다는 거였다. 김창숙은 호통을 쳤다. 김창숙이 쓴 '심산유고(心山遺稿)'에 의하면 김달하를 일본밀정이라고 선포해 조성환의 '다물단'에서 총살했다는 것이다.  

김달하에 대해 길게 늘어놓는 건 그와 목등극기가 한 팀이 돼 북경에서 활약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전담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특히 돈을 미끼로 독립운동가들을 전향시키는 임무도 총독부로부터 위임받지 않았을까. 

신생면을 열지 않으면 안 될 궁경에 떨어진 박용만은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초청을 받자 김달하를 통해 일본 영사관과 접촉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우발적인 단순한 결심이 아니었다. 궁경에 떨어진 신세를 벗어나기 위한 방도로서의 유용성도 있었다. 그 보다 일본은 투쟁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이용의 대상이라는 발상의 전환 때문이었다. 그런 심중을 동지들에게 떳떳이 밝히면 여운형이 일본을 다녀온 것이나 신채호, 이회영이 조선에 잠입했던 것과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박용만은 밀정 김달하를 만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기 전에 일본 영사관 측과 비밀거래를 할 용의가 있음을 알렸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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