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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산자 죽은 자는 저들이 갈라놓은 이간질일 뿐입니다. 우린 어제도 하나였고, 오늘도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한 100일이고 200일이고 저는 이 크레인을 지키겠습니다. 저는 이 크레인 위에서 승리를 확신합니다. 끝까지 단결해서 꼭 승리합시다."

스무날 넘게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35m 높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51) 지도위원이 쓴 글이다. 김 지도위원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지난 6일 새벽 크레인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고 있다.

85호 크레인은 2003년 9월 9일 고 김주익 지회장이 자살했던 곳이다. 8년전 고 김주익 지회장은 '함께 살자'며 끝내 하나뿐인 목숨을 끊었지만, 김 지도위원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지난 6일 새벽부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지난 6일 새벽부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 김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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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 때 용접공으로 입사했다가 1987년 당시 어용노조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됐다. 같이 활동했던 17명의 동료들은 2003년 고 김주익·곽재규 열사 투쟁 당시 모두 복직했지만 김 지도위원은 복직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는 2009년 11월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정했지만, 한진중공업 사측은 복직시키지 않았다. 김 지도위원은 노동 현장의 투쟁을 담은 칼럼집 <소금꽃 나무>를 펴내기도 했다.

최근 법원이 '퇴거명령'을 내리고, 회사에서 하루 100만 원씩의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김 지도위원은 꿈쩍 않고 있다. 생산직 1/3(400명) 구조조정 방침을 밝혔던 한진중공업 사측은 희망퇴직을 받은 뒤 290명에 대해 정리해고 예고 통보를 해 노사 갈등을 겪고 있다.

김 지도위원은 크레인 위에 있으면서 조합원을 생각하며 편지글을 써오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로부터 김 지도위원이 쓴 편지를 받아 정리한다.

■1월 6일 "이불을 들고 출근하는 아저씨"

한진중공업 해고자인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6일 새벽부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주장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진중공업 해고자인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6일 새벽부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주장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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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아침, 침낭도 아니고 이불을 들고 출근하는 아저씨를 봤습니다. 새해 첫 출근 날 노숙농성을 해야 하는 아저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 겨울 시청광장 찬 바닥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가장에게 이불 보따리를 싸줬던 마누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살고 싶은 겁니다. 다들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남고 싶은 겁니다. 지난 해 2월 26일, 구조조정을 중단하기로 합의한 이후 한진에선 3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짤렸고, 설계실이 폐쇄됐고, 울산공장이 폐쇄됐고, 다대포도 곧 그럴 것이고,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제휴직 당했습니다. 명퇴 압박에 시달리던 박범수, 손규열 두 분이 같은 사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400명을 또 짜르겠답니다. 하청까지 천명이 넘게 짤리겠지요. 흑자기업 한진중공업에서 채 1년도 안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그 파리 목숨들을 안주삼아 회장님과 아드님은 배당금 176억으로 질펀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정리해고 발표 다음 날,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 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스무한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 두 살이 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가장 큰 고비가 남았네요.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멸의 날들. 우리 조합원들 운명이 뻔한테 앉아서 당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한진 조합원들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우리 조합원들 지킬 겁니다. 쌍용차는 옥쇄파업 때문에 분열된 게 아니라 명단이 발표되고 난 이후 산 자 죽은 자로 갈라져 투쟁이 힘들어진 겁니다.

지난 일요일.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습니다. 양말을 신도고 발이 시려웠는데 바닥이 참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을 두고 나서는 일도 이리 막막하고 아까운데, 주익(고 김주익)씨는…. 재규(고 곽재규)형은 얼마나 밟히는 것도 많고 아까운 것도 많았을까요. 목이 메이게 부르고 또 불러보는 조합원 동지 여러분!

■ 1월 7일 "죽은 공간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공간"

조합원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85호 크레인은 생각하면 무겁고, 깊은 상처로 다가온다.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죽은 공간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공간이다.

공기 좋고, 전망 직이고(죽이고). 젤 좋은 게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다 알루(아래로) 보입니다. 방이 좀 작아서 그렇지 발코니도 널찍해요. 봄이 오면 텃밭을 가꿔서 가을에 걷어 먹을 생각입니다.

저 나름으로 크레인 생활 수칙을 정했습니다. 양치질은 짝수 날만 한다. 세수는 윤석범 동지 장가가는 날은 꼭 한다. 샤워는 국경일 날 한다. 오늘은 빨랫줄을 매고 빨래해서 널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35m 크레인 위에서 군고구마 먹어본 분 계십니까? 아마 명바기(이명박 대통령)도 그건 못해 봤을 겁니다. 오늘 아침엔 밑에서 부르고 난리를 칠 때까지 늦잠을 자서 많은 분들이 놀랬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지닌 상처는 깊고도 아픕니다. 8년 동안(2003년 이후) 한 번도 주익(고 김주익 지회장)씨 이름을 편하게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김주익'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곤 했습니다.

저는 지금 주익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주익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씨가 살아생전 나지막히 봤던 세상의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1월 8일 "오래오래 고민하다 발을 씻었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35미터 높이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20일 넘게 고공농성하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35미터 높이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20일 넘게 고공농성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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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고 세월가는 걸 몰라서 짝수 날 하기로 한 양치질을 오늘 했습니다. 어제는 이 크레인을 접수한지 3일째 되는 날.

첫 휴일이었습니다. 뭔가 기념이 될 만한 행사가 없을까. 오래오래 고민하다 발을 씻었습니다. 50평생 씻어온 발인데 내 발을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 게 처음이었습니다. 왼쪽 엄지발톱은 발톱무좀으로 부스러지고, 새끼 발가락엔 굳은살이 두껍게 박혔습니다. 50년 넘도록 무식한 주인 델꼬 사느라 고생많았다 쓰다듬어 줬습니다.

오늘은 첫 일요일. 무슨 이벤트로 첫 일요일을 즐길까 고민하다 머리를 감았습니다. 머리 하나 감았을 뿐인데 세상에, 날아갈 것 같습니다. 사소한 일상들이 이렇게 소중하고 빛나는 곳 85호 크레인이 주는 삶의 재발견입니다. 덕분에 물 끌어 올린다고 우리 대의원들 쌩똥 싸는 모습, 애처롭습니다.

오늘밤부터 추워질거라고 밑에서 으찌 겁을 주는지 문짝에 방풍공사를 했습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을씨년스러웠는데 이제 보는 것만으로도 참 아늑합니다 ^^.

전기선을 설치하고 로울러를 달고, 조선소 노동자의 경험을 백분 발휘하고 있습니다. 물 한 통으로 머리감고 빨래하고 양치하고 징역 독방살이의 경험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 몰랐습니다. 살다보니 나라덕 볼 일이 다 생기네요 ^^.

오늘 위에서 내려다 보다가 희한한 광영을 목격했습니다. 규찰 서러 나온 아저씨들 네 분이 창고 뒤편에서 고돌이를 열라치고 있지 뭡니까. 하하~. 참 대단한 아자씨들입니다 ^^. 어차피 길게 갈 싸움. 저는 저대로 아저씨들은 아저씨들대로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면서 가야지요 뭐.

휴일 저녁 금쪽같은 시간에 나와 주신 동지들. 고맙습니다. 동지 여러분 부디 감기조심하시고 건강하십시오. 아직도 이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주익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습니다. 그게 열사 정신계승 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 1월 12일 "더 이상 흩어지지 않기 위해"

1주일 전 이곳을 처음 오르던 새벽, 혼자 벌벌 떨고 앉아 동이 트길 기다리면서 마침내 동이 트자 조합원들이 하나 둘 모이는 걸 보며 제일 먼저 저 길 건너편 초등학교 정문 앞을 봤습니다. 그때 주익(고 김주익 지회장)씨는 내가 보였을까. 이곳까지 오지도 못하고 저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다 돌아가곤 하던 내가 보였을까. 그저 무력하게 쳐다보다가 돌아설 뿐인 그 사람이 낸 줄 주익씨도 알았을까. 그때 주익씨가 등지고 섰던 하늘은 파란색이었는데 여기 올라와 처음 본 하늘빛은 노란색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투쟁이 구만리임에도 온종일 이곳을 지켜주신 일반노조 유창환경 동지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님, 그리고 지역의 많은 동지들 고맙습니다.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10년 전 그때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대량학살이 있었고 2년을 싸워 노사가 합의를 했건만 그 합의를 사측이 번복하던 날. 키 큰 사내 하나가 숨죽이며 올랐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갇힌 짐승처럼 이 크레인 위를 서성이며 오늘은 동지들이 얼마나 모일까 노심초사 내려다보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동지들이 많이 모인 날은 삶 쪽으로, 동지들이 안 모이는 날은 죽음 쪽으로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며 129일을 매달려 있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도크에 배가 빠지던 날, 육중한 배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뒤돌아서던 조합원들을 보며 끝내 유서를 썼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오늘 정리해고 명단 발표 소식을 들었습니다. 290명, 가족까지 1200명, 하청까지 수천명. 그 중에는 아빠가 빨리 일을 다시 시작해 다시 피아노학원을 다니고 싶은 딸내미도 있을 것이고 다시 태권도를 배우고 싶은 아들내미도 있을 것이고, 이제나 저제나 우리 아들 직장을 걱정하는 늙으신 부모님도 계실 것이고 수십년 새벽밥을 했던 마누라도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흩어지지 않기 위해, 다시는 울지 않기 위해 이 85호 크레인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이 85호 크레인의 달력은 2003년 10월17일부터 다시 시작하여 오늘이 2003년 10월 23일입니다. 제가 평생을 짝사랑했던 한진중공업 동지 여러분.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아프지 마시고 술 많이 먹지 마시고 밥 잘 먹고 잘 버텨서 이 투쟁 기필코 승리합시다. 고맙습니다.

■ 1월 13일 "입사동기 박창수를 제 손으로 묻었던 일"

스물 한 살에 입사해서 5년만 바짝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서 금의환향하리라 믿었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용접 슬라그에 얼굴이 움푹 패이고 눈알에 용접불똥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했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손바닥이 찢어지고 철판에 깔려 두 다리가 다 부러져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한 달 잔업 128시간에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매일 저녁 8시까지 잔업에 그렇게 눈 딱 감고 살면 금방 부자가 될 줄 알았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여름이면 그늘에 앉아 쉰내 풀풀 나는 땀 젖은 작업복을 볕에 널고 겨울이면 동상 걸린 손가락 발가락 문질러가며 딴 사람들도 다 이래 살끼야 스스로를 달랬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두 다리에 다 기브스를 하고 누워있던 사람 수보다 바퀴벌레가 훨씬 많던 환자밥도 안 나오던 병원에 번갈아 죽을 끓여 들고 오던 아저씨들이 계시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한결같이 작업복 입고 출퇴근 하시며 한번도 서문 앞 횡단보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아저씨에게 '아저씬 소원이 뭐예요?' 물으니 '안 죽고 일하는 거다' 1초도 망설임 없이 대답이 돌아오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조합원들이 준 권력으로 조합원들을 억압하며 조합원들 위에 군림하던 어용노조가 지배하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회사 눈치보다 노조의 눈치를 더 두려워하며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했던 어용노조 수십년 민주노조 세우겠다고 수십명이 해고 됐고 전과자가 됐고 훈련소 동기, 입사동기 박창수를 제 손으로 묻었습니다. 그 날, 제 청춘도 함께 솥발산에 묻었고 그렇게 저는 이곳에 들어올 수도 없고 벗어나지도 못한 채 저는 한진중공업을 맴돌았습니다. 정규직보다 훨씬 많아진 하청노동자들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껴야 했고 명퇴라는 이름으로 쫓겨나는 아저씨들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  곳에 올라와서 저는 오히려 편안함을 누립니다. 힘내라고 문자 보내주시는 아저씨들. 미안하다며 술 먹고 우는 동생들. 이 추운 겨울날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크레인을 사수하시는 동지들. 찬바람 벗 삼아 온종일 이 곳을 지키는 동지들. 여러 동지들 덕분에 저는 잘 자고 잘 먹고 있습니다. 걱정하시지 마시고 모두의 마음을 모아 승리하는 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속에, 김둘례 교선부장이 7일 저녁 크레인 아래에서 열린 결의대회 때 김진숙 지도위원이 쓴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속에, 김둘례 교선부장이 7일 저녁 크레인 아래에서 열린 결의대회 때 김진숙 지도위원이 쓴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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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4일 "끝까지 단결해서 꼭 승리합시다"

아까 낮에 이 크레인 밑에서 동전치기 하는 동지들을 봤습니다. 몇 백원을 따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들 중에는 해고통보를 받은 사람들도 있을 건데 그 마음이 어떨까. 저렇게 소박하게 사소한 일에 기뻐하며 사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세월, 27년이 흘렀지만 전 아직도 제가 해고통보를 받던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대의원에 당선되면서 부서이동 몇 번 당하고 대공분실 끌러 갔다 오고, 대기발령 받고, 몇 달 사이에 그 엄청난 일들을 당하면서 해고를 예감하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설마 했습니다. 일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상도 받고 했는데 설마 해고까지야 시키겠나. 86년 7월 11일 해고 당하면서 제 삶은 뿌리 채 뽑혔고 그 후 한번도 다시 뿌리 내리지 못했습니다.

어젯밤 해고통보를 받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저는 살아 남고 동생은 짤렸습니다. 형이 어떻게 동생을 버리겠습니까. 끝까지 동생을 지키겠습니다." "어떤 분은 명단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이 더 불편합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동생은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오니까 안전화라도 팔려고 자갈치 시장에 갔더니 한진에서 안전화가 하도 많이 나와서 2만원 짜리를 15000원에 팔았답니다. 지난달 월급 7200원을 받고 아구찜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염치가 없어 마누라한테 차마 말을 못했다는 가장. 몇 년을 참아왔고, 가장 체면 말이 아닐 정도로 고통 받으며 기다려 온 결과가 결국은 정리해고란 말입니까.

전화를 해고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던 마누라. 아빠,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묻던 딸내미. 노인연금 받은 거라도 부쳐 주시겠다던 어머니.

동지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산자 죽은 자는 저들이 갈라놓은 이간질일 뿐입니다. 우린 어제도 하나였고, 오늘도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한 100일이고 200일이고 저는 이 크레인을 지키겠습니다. 저는 이 크레인위에서 승리를 확신합니다. 끝까지 단결해서 꼭 승리합시다.고맙습니다.

■ 1월 19일 "동지 여러분 끝까지 믿겠습니다"

지난 주말 그 추운 날씨에 크레인 밑으로 아빠를 보러 오겠다고 온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빠~"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는 아빠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해서 아이를 안아주는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이의 미래를 죽을 힘을 다해 지켜내기 위해 이 겨울, 아빠가 집에도 못 들어간다는 걸 아이도 알까요.

며칠 만에 만난 마누라에게도 미안한 마음뿐 집에서 애들이랑 뭘 먹고 사는지 묻지도 못하고 "춘데 말라꼬 왔노" 불퉁하게 한마디 던질 뿐입니다. 마누라의 가방에 삐죽 나와 있는 벼룩시장을 보고 또 마음이 내려 앉습니다. 일자릴 알아보는 걸까요. 아니면 더 싼 집을 찾아다니는 걸까요. 애 딸린 마누라가 벌어봐야 편의점 알바이고 마트 비정규직일텐데. 아이가 뛰놀기에 공장은 너무 춥고 아이를 오래 바라보기도 마음이 고달퍼 서둘러 보내놓고는 추운 거리를 서성거리며 하염없이 담배만 피워뭅니다. 앞엔 허허벼랑인데 자꾸만 등을 떠미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해고통보를 받은 이후로는 사소한 일에도 화가 솟구치고 작은 일에도 설움이 북받치곤 합니다.

작년 겨울, 출근시위를 할 때 백일 떡을 받아먹었던 그 아들내미가 돌이라고 크레인 위에서 돌떡을 받아 먹었습니다. 예준이가 두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민석이가 세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유주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다림이가 중학생이 되는 것도 현서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도 이 공장에서 지켜보게 될 거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하루 100만원 짜리 인간이 됐습니다. 징역 살 땐 하루에 45220원씩 밖에 안쳐주더니, 제 가치를 이제야 인정받는 거 같습니다. 근데 이 투쟁 깨지면 저는 진짜 거시기 됩니다. 한진 자본은 2003년 시나리오와 똑같이 가고 있는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크레인으로 하루 100만원을 벌어서 이 크레인을 운전했던 하청노동자에겐 얼마의 월급을 줬습니까?

한 이틀 디지게 추웠습니다. 안에 있던 것들도 다 얼어서 사과는 사과탄이 되고 바나나는 곤봉이, 시루떡은 보도블럭이 돼있었습니다.  그 추운밤에 이 크레인을 지켜주셨던 사수대 동지들 그리고 조합원 동지 여러분들이 피워올리는 가슴속 장작불로 인해 저는 동상도 안 걸리고 감기도 안 걸리고 잘 견뎠습니다. 눈물겹게 고맙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무수한 고비를 넘으면서 수많은 무용담을 만들어 오셨던 아저씨들. 그 무용담을 신화처럼 들으며 한진 조합원이라는 자긍심을 키워왔던 동생들, 서로 서로 잘 지켜줍시다. 부디 잘 이겨내고 잘 견뎌냅시다. 총 맞은 동지들 우리 단결이라는 방탄조끼 입었잖습니까? 버티면 이기는 시간싸움이고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승리할 수 있는 싸움입니다. 어차피 구제역 때문에 설날 고향도 못갑니다.

저는 우리 한진중공업 조합원동지들 그리고 연대투쟁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동지 여러분들을 끝까지 믿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1월 23일 "우리 생존권 내 손으로 지킵시다"

한진중공업이면 부산에서 가장 큰 회사이니 밥 굶고 살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한진중공업이면 손꼽히는 재벌기업이니 갑자기 부도가 나거나 경영이 어려워지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딸린 식구가 수만명이나 되는 대기업이니 거짓말을 하거나 뒷통수를 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굳게 믿었습니다. 집보다는 회사가 우선인 남편이 야속할 때도 있었지만 가족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딸아이 재롱잔칫날도 출근한 남편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바가지를 긁지도 못했습니다. 자기 생일날도 시운전 나가 망망한 바다위에서 미역국도 못먹는 남편이 애처로웠지만 젊어서 고생해야 늙어서 편할거라 생각하며 달랬습니다. 친구들 만나도 우리 남편 한진중공업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말했고 한진중공업 통근버스만 봐도 친정식구 만난 듯 뿌듯하고 반가웠습니다.

그런 회사가 갑자기 경영이 어려워졌단 말을 들었을 때도 설마 사람을 짜르기야 하겠나 싶었습니다. 그런 회사가 사람을 자르겠다 했을 때도 설마 내 남편이기야 하겠나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월 14일, 전 살면서 그날의 충격과 배신감과 절망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저 사람이 뭘 잘못했습니까. 일요일날에도 특근나간 저 사람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경영을 어렵게 했습니까. 지 마누라, 지 새끼 옆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던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회사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겁니까.

2년째 연봉은 깎이고 몇 달째 월급 구경도 안시켜주더니 이젠 얼굴 구경도 안시켜 주는 남편. 평생 소새끼처럼 일만시켜 먹다 구제역 걸렸다고 생매장하는 소처럼 생매장 당하는 노동자들. 억울하고 분해서 우리도 나서서 싸워야겠습니다. 한진중공업 우리 남편들만 다닌 거 아닙니다. 평생을 새벽밥하며 남편 출근한 동안에도 한시도 맘 놓지 못했던 마누라도 다녔고 아빠 돌아올 시간만 목 빠져라 기다리다 아빠 얼굴 그리며 잠들던 우리 아이들도 다녔고 노심초사 아들내미 사위 걱정에 한시도 편할 날 없던 우리 부모님도 다니셨습니다.

아직 엄마 뱃속에 있는 아이, 아직 엄마 등에 업혀 다닐만큼 어린 아리, 유모차에 잠들어 있는 아이, 얼마전 큰 수술 끝내고 휠체어를 타고 온 아이, 저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퇴 안하면 퇴직금 반도 못 건진다는 헛소리에 넘어가지 않고 설명절 잘 견디면 회사도 별 수 있겠습니까. 명분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진짜 구리구리한 한진자본 다들 힘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 우리 생존권 내 손으로 지킵시다.


태그:#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 #85호 크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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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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