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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내 곳간에 가진 게 넉넉해야 어려운 이웃 돌볼 마음도 생겨난다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제 아무리 심성이 곱다한들, 제 입에 풀칠도 못하면서 이웃 위해 인심 베풀 마음 우러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세상사가 한 마디 말로만 압축될 수는 없는 터. 곳간이 차고 넘쳐도 어려운 이웃 돌볼 마음보다는 끝없는 탐욕으로 채우고 또 채우기에 여념 없는 사람들 또한 있다. '있는 놈들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배달호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의 월급까지 줄여서 이득을 보려는 두산에 대해 일종의 비루함을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노동자들에게는 삶의 가치도, 자유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도, 아름다운 것을 누릴 권리도, 맛있는 것을 먹을 권리도 없이 그저 자신들을 위해 일할 수 있을 만큼만 먹고 살라는 것인가. (책 속에서)

 

곳간 넉넉한 이의 너그러운 인심은 찾기 힘들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처럼 하루 세끼 걱정하는 처지여서 그런 건 아닐 터, 이윤 추구에만 매달리다 보니 아주머니들의 생존과 생계는 안중에도 없는 탓이리라. 60년대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이 떠오른다. 달라진 게 무엇일까.

 

<인간의 꿈>은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의 삶과 죽음을 그린 평전이다. 1981년 두산중공업의 전신인 한국중공업에 취업하면서 가난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놓였다는 노동자. 사람에 대한 정이 많고 그리움도 많았던 사내. 1985년 한국중공업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이후, 2003년 더러운 세상, 악날한 두산의 비인간적 행위에 저항하며 몸을 불사르기까지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1970년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이 꿈꾸던 세상은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는 사회였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집 한 채 가져보지 못한 채 무허가 판자촌에 살았지만, 배고픈 시다들에게 자신의 버스비로 풀빵을 사주던 전태일.

 

2003년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배달호가 꿈꾸던 세상은 '남에게 짓밟히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 세상'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동료들의 문제점을 살피고, 아픈 마음을 들어주고, 함께 탄식해 주던 배달호.

 

곳간이 넘쳐도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남의 빈약한 곳간마저 넘보는 세상, 값싼 피자, 값싼 통닭 앞세워 골목 상인들의 곳간 위협하면서도 '통큰' 결단인 것처럼 과대 포장하는 세상에서 전태일이, 배달호가 꿈꾸던 세상은 정녕 꿈으로만 그칠 수밖에 없는 걸까.

 

서로가 상처주고 할퀴고 파괴하지 않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 절실하고 간절하게 더 이상의 삶의 질을 떨어뜨려서는 안 되는 인간적인 '사회 협약'이 필요하다. 배달호 같은 평범한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경제 시스템, 남을 밟지 않고도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책 속에서)

덧붙이는 글 | 김순천/후마니타스/2011.1/10,000원


인간의 꿈 -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평전

김순천 지음, 후마니타스(2011)


태그:#배달호, #두산 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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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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