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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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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 기자 말

"총리에 박용만을 추천합니다."

신채호였다. 박용만과 신채호와의 관계는 면식이 선행되지 않은 채 이뤄졌다. 1919년 4월 박용만이 아직 하와이를 떠나지 않고 있을 때 신채호는 상해에 와 있었다. 임시정부조직안 토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 1차 회의 이후 제 2차 회의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3차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각료들을 선출했다. 총리 선출이 먼저였다. 회중에서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가 차례로 추천됐다. 이때 신채호가 팔을 번쩍 치켜들고 박용만을 추천했던 것이다.

신채호의 추천에 어이가 없었는지 회중의 한 사람이 "신채호요."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일제히 웃음바다가 됐다. 신채호는 얼굴에 숯불이 와 닿는 듯했다. 이승만에 대한 원한 때문에 박용만은 임시정부 발기인의 일원인 신정(신규식의 가명)에게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 청원'건을 하와이에서 전보로 알렸다. 이를 전해들은 신채호가 이승만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총리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가 '권업신문'의 주필로 있던 같은 시기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국민보' 주필이었다. '국민보'는 러시아의 동포들에게도 전해지는 신문이었다. 신채호는 '국민보'에서 박용만의 논설들을 읽었고 무력항쟁 노선도 자기와 같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신채호(뤼순감옥 투옥 중)
 신채호(뤼순감옥 투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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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언론인 출신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학자가 됐다. 박용만보다 한 살 더 많은 그는 1905년 25세 때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고 이어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맡았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중국으로 망명, 러시아의 연해주로 옮겨 한글신문 '해조신문'과 '권업신문'의 발간에 참여했다. 이후 만주와 상해, 북경, 시베리아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했다. 1914년 서간도의 한인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국사연구에 집념하기 시작했다.

교사로 있을 때 '조선사'를 집필했으며 연구를 계속, '상고사 이두문 명사 해석법'과 '삼국사기 중 동서양자 상환고증' 등의 논문들을 묶어 1930년대 '조선사 연구초'라는 역사서를 출간했다.

신채호는 1936년 중국 여순 감옥에서 운명했다. 그 사이 딱 한번 조선에 몰래 왔다 갔다. 조카딸 향란의 혼사 때문이었다. 향란은 일찍 사망한 형의 유일한 혈육. 그런데 친일파와 결혼한다는 거였다. 그 혼사를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잠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조카딸과 의절하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1917년의 일이었다.

박용만은 신채호와 자주 어울렸다. 일본 고등경찰의 보고서에 의하면 1920년 봄 둘은 블라디보스토크 교외 포크라치니아에서 만난 것으로 돼 있다. 자주 어울리다 보니 한국 고대사를 연구한 신채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성(박용만의 호), 만주 땅이 중국인들 땅이 아니란 말일세. 부여와 고구려 땅이었다는 말이야. 고대 아시아 동부에는 우랄어족과 지나어족이 있었지. 우랄어족에는 조선, 여진, 몽고족이 속하고 지나어족에는 물론 한족(漢族)이 주종을 이룬 게야. 그러니 이 만주 땅은 한족(漢族) 보다 조선족에 더 가까운 땅이 아니겠나? "  

신채호는 북경에 있을 때 북경대학 도서관을 드나들며 한국의 역사를 연구했다. 1922년 '조선상고사'를 썼고 부여와 고구려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상고시대 한민족(꼭 아니라면 같은 우랄어족)은 만주, 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의 동북지역을 차지하는 강대국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 역사가가 한국의 역사를 한반도 중심으로 축소 왜곡했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영향으로 박용만도 역사에 눈을 돌렸다. 1927년 6월 김노규 선 '대한북여요선(大韓北輿要選)'과 박기정이 지은 '대동고대사론'과 자신이 쓴 논문 '제창아조선독립문화지일이어(提倡我朝鮮文化之一二語)'을 한 데 묶어 책을 한 권 출판했다. '대한북여요선'은 만주 옛 우리 땅의 경계와 연혁을 논한 것이고 '대동고대사론'은 만주가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용만의 의도는 엉뚱했다. 만주에 거주하는 2백만 한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를 꿈꾼 것이다. 한민족의 고토(古土)에 한인들의 나라라면 근거가 당당하지 않은가.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중국 사이에 완충국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당위성도 설파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박용만이 출판한 대한북여요선과 대동고대사론
 박용만이 출판한 대한북여요선과 대동고대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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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부탁으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을 썼다. 1923년 1월 발표된 선언에서 일부 운동가들의 문화주의, 외교론, 준비론 등을 비판,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을 주장했다.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무력에 의한 일제타도라는 독립노선을 강조했다.

1920년 4월 그의 나이 39살 때 북경에서 두 번째 처인 박자혜와 결혼했다. 박용만은 상해에서 돌아 와 그 결혼식에 참석했다. 떠들썩한 결혼식이 아니라 몇 몇 지인들과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성혼이 발표됐다. 박자혜는 그보다 15살이 어려 당시 24살. 간호원 공부를 했으며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해 북경에 와 있던 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으나 생활대책이 막연했다. 모자를 본국에 들여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국에서도 생활이 어려웠다. 박자혜는 대련 감옥에 수감 중인 신채호에게 끼니가 어렵다는 편지를 썼다. 그의 답장은 "내 걱정 마시고 부디 수범 형제 데리고 잘 지내시며 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에 보내시오"였다.

신수범은 어렵사리 성장해 일제 말기 은행원이 됐다. 그러나 광복이 되고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자 직업을 잃고 도피하는 신세가 됐다. 신변의 위협도 받고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그는 넝마주이, 부두 노동자 등으로 연명하다가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물러난 뒤에야 은행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 한다.

단재는 미국에 돌아간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을 철회하라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으나 회답을 받지 못했다. 그로 인해 미운 털이 박혔는지 그 아들이 수난을 받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1936년 2월 신채호가 뇌일혈로 순국한 뤼순감옥 내 감방
 1936년 2월 신채호가 뇌일혈로 순국한 뤼순감옥 내 감방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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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은 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덤비기엔 가시밭길이었다. 아니 지뢰밭이기도 했다. 가장 큰 비극은 내부의 분열. 어쩌다 주장이 대립되면 성질을 참지 못하고 권총부터 뽑아드는 경우도 많았다. 어제까지 동지였는데 바로 그 동지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희생의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김구 역시 임시정부가 일제의 침공을 피해 호남성 장사에 이르렀을 때 동족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범인은 일본 경찰도 아니고 한인 밀정도 아니었다. 김구의 목에는 일본 경찰이 내 건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십수 년 동안 변장과 은신과 탈출을 거듭하며 체포와 암살을 용케 피해 다녔는데 어이없게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동족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것이다.

김구.1919년 임정 경무국장 시절
 김구.1919년 임정 경무국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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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심장 근처에 박히고 출혈이 심해 의사도 고개를 저었다. 상해에 가 있는 아들에게는 '피살당했다'는 전보를 쳤다.

범인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이었던 이운환이었다. 남경에 있을 때 범인은 상해로 특무공작을 하러 가겠다고 김구에게서 자금을 얻어가기도 한 자였다.

그날 저녁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의 통합과 연대를 위한 회의가 열렸다. 식사를 겸한 그 회의장에 뛰어든 이운환은 권총을 먼저 김구에게 발사했다. 이어 현익철을 즉사시킨 다음 유동열의 허리를 쏘았고 이청천의 손에 총격을 가한 후 달아났다.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이었다가 분란을 일으켜 당에서 제적당하자 그 앙갚음으로 무차별 사격을 저지른 것이다.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잠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북경에 주재소를 두고 한인들의 동태를 샅샅이 감시했다. 그리고 한인 밀정을 채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뒤를 쫓게 했다. 

박용만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브라우닝 제2호 형 권총을 몸에 숨기고 다녔다. 그리고 신변의 안전을 위해 무엇 보다 먼저 할 것은 중국 국적을 얻는 일이었다. 미국 국적을 얻을 수도 없고, 하와이나 러시아로 여행할 때 여권이 필요하므로 결국 중국 국적을 얻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박용만은 그 편의 때문만 아니라 중국을 무대로 장기간 활동하자면 중국 국적의 부인을 두는 게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약 1년 후 한중 합작은행인 '흥화실업은행'을 범재 김규흥과 함께 창립하게 되는데 그 준비 과정에서 북경정부의 재정부 관리로 있는 중국인 장씨와 접촉이 잦았다. 그 과정에서 그의 딸 웅소청(熊素靑)을 알게 된다. 당시 박용만의 본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여전히 병석에 누워 있는 형편이었다.

박용만이 웅소청과 결혼 후 거주했던 북경의 처소
 박용만이 웅소청과 결혼 후 거주했던 북경의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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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1921년 9월 21일 북경에서 웅소청과 결혼식을 올렸다. 신채호를 비롯 8~9명의 한인들과 중국인 여럿이 초대됐다.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청은 결혼 당시 23세였는데 이 게 정확한 나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고 박용만과 재혼한 2년 후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동안 일정한 주소가 없던 박용만은 결혼을 하자 북경의 서성병마사호동(西城兵馬司胡同) 28호에 거처를 마련하고 새 가정을 꾸렸다.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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