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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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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마지막 날, 철원 아침 기온은 -19℃. 기온이란 말이지, 수은주가 나타내는 것과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 TV 뉴스에서 철원의 아침기온이 -19℃라고 했지만, 한나와 내가 잠을 잔 '하얀뼈 회관'의 방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짤짤 끓는 방바닥의 열기가 요 위로 전해져 밤새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방, 외풍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 방안에서 -19℃라는 실감이 날 리 없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니 철원의 매서운 겨울날씨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하얀뼈 회관 건물 앞에 승합차가 세워져 있었다. 친구 '시골쥐'의 남편이 우리를 데리러 온 것이다. 시골쥐는 아침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라. 무와 배추를 넣은 된장국은 구수하게 입맛을 자극했다. 김장김치는 시원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난다. 땅에 묻은 김장독에 잘 갈무리된 김치니 그 맛이 오죽하겠나. 도시에서 먹는 것보다 깊은 맛이 날밖에.

확실히 밥은 집에서 먹는 게 가장 맛있다. 식당에서 사먹는 음식은 아무리 맛이 뛰어난 맛 집이라 하더라도 몇 번 먹으면 질리게 마련이지만 집 밥은 그렇지 않다. 여행지에 와서 먹는 소박한 밥상은 더더욱 입맛을 끌어당기고, 마음 또한 포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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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를 마친 뒤, 철원 남방한계선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철원에 오면 한번쯤은 둘러봐야 하는 코스인지도 모르겠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승합차를 타고 달리면서 눈 덮인 들판 너머를 바라보는데, 시골쥐가 말한다.

"저기 보이는 산이, 북한 땅이야."

그제야 남방한계선이라는 철책선이 보이고, 구름을 잔뜩 이고 선 산봉우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에는 하얀 눈이 듬성듬성 덮여 있었다. 철원도 추운데, 저 산 너머는 얼마나 더 추울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금강산까지 90㎞라는 글귀가 새겨진 금강선 철교에서 승합차는 잠시 멈췄다. 90㎞면 하루에 30㎞쯤 걷는다고 치면 사흘이면 갈 수 있는 거리구나. 걷기 시작하면서 나의 거리 셈법은 달라졌다. 모든 거리를 걸어서 갈 수 있는 시간으로 환산한다. 그렇다고 늘 모든 길을 걷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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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 너머 둔덕 위에 덩치가 큰 새가 여러 마리 무리지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독수리 떼였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재두루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겨울의 철원은 철새로 유명하다. 그래서 겨울(12월~2월)이면 철원에서 철새탐조관광을 할 수 있단다.

철새를 보러 온 것은 아니지만,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편 채 빙빙 나는 독수리를 보았고, 가늘고 긴 목을 늘이고 선 재두루미도 볼 수 있었다. 겨울이라서 그럴까. 황량한 벌판에 있는 새들이 무척이나 쓸쓸해 뵌다.

남방한계선 드라이브를 마치고 우리가 승합차에서 내린 곳은 철원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순담계곡 입구. 매서운 겨울 날씨 때문에 계곡 물이 얼었는지, 계곡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겨울의 철원은 어딜 가나 눈, 눈, 눈이다.

 순담계곡
 순담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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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길을 걸어서 계곡으로 내려간다. 쌓인 눈 때문에 걸음을 떼놓기가 쉽지 않다. 눈을 차면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게처럼 옆으로 걸었다. 계곡 아래로 내려가니 우와, 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계곡은 하얀 빛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어 눈이 부시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걷는 기분이 어떤 건지는 아마도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렇게 계곡의 끄트머리를 걷고, 계곡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맑으면서 하얗고 서늘한 공기가 폐 속으로 가득 스며드는 것 같다.

순담계곡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한수도원'이 있다. 철원에서 오래 산 시골쥐도 수도원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기회에 안으로 들어가 보자, 하면서 양해를 얻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은 경치가 무척이나 빼어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러 개의 커다란 건물이 들어선 맞은편은 눈 덮인 계곡이었다. 순담계곡이 이곳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돌로 지은 예배당 건물이 시선을 잡아끈다. 건물 앞에는 잘 자란 소나무 여러 그루가 그림처럼 자리를 잡았다.

 대한수도원
 대한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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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는 곳이니 조용히 소리 내지 말고 둘러보라, 는 조언을 듣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계곡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고즈넉했다. 이리 보아도 절경이요, 저리 보아도 절경이니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빨' 하나는 끝내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만난 목사님 한 분이 이곳을 전두환 대통령 재직시 정부에서 빼앗아가려고 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좋은 곳이라면 누구라도 탐이 날만도 하겠다. 나도 이런 곳에서 며칠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가고 싶구만.

수도원 구경을 마치고, 눈 덮인 너른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걸었다. 제설작업을 하는 손길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나 보다. 차도건 인도건 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차들이 다닌 곳은 눈이 다져진 채 얼어 미끄러웠다.

한나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나 역시 두어 번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이런 길이 계속되면 아이젠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면서 앞으로 길게 이어진 길을 불안한 시선으로 내다보았지만 아이젠은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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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걸어서 승일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철원 한여울길'이 시작된다. 한여울길의 길이는 4.88㎞, 승일공원에서 직탕폭포까지 이어진다. 왕복 2시간이면 넉넉히 걸을 수 있다. 이 길, 전부 포장이 되어 있어 걷기에 그다지 좋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데, 자전거도로 용도로 조성되어서 그렇다는 것이 철원군청 담당자인 임상빈씨의 말이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타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온단다. 덕분에 많은 예산을 들여 길을 포장했는데, 걷는 사람들은 그것을 불만스러워 한다고 임상빈씨는 전했다. 포장을 당장에 걷어내라, 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거액의 예산을 들인 만큼 포장을 걷어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여울길은 코스가 짧아 그곳만 걸으러 철원까지 가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을 터. 직탕폭포에서 노동당사까지도 걷는 길(금강산 가는 길)이 이어져 있으니, 더 걷고 싶으면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두 길을 합하면 전체 길이는 11㎞ 정도로 늘어난다. 철원군에서는 한여울길을 한탄강을 따라 칠만암까지 연장할 계획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한여울길에도, 그 옆 자동차도로에도 눈은 쌓여 있었다. 철원에 와서 눈길만 걷다 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긴 겨울에, 그것도 강원도에 갔다면 당연히 눈에 눈빛이 들만큼 눈을 보고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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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울길 옆으로는 계곡이 길게 이어진다. 길 곳곳에는 전망대 데크가 설치되어 걸으면서 주변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눈은 발밑에서 뽀드득, 뿌드득 소리를 내면서 밟히고 또 밟혔다. 눈길이라 빨리 걸을 수 없고 미끄럽기까지 해 가끔은 비틀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빛나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뺨에 와 닿는 공기는 싸늘하지만 상큼하다.

 임꺽정
 임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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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석정
 고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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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정 입구에서 웃통을 벗어젖힌 채 힘자랑을 하는 남자와 딱 마주쳤다. 이 남자, 임꺽정이란다. 고석정 부근에 임꺽정이 한때 은거지로 삼았던 동굴이 있었다고 한다. 고석정은 철원 8경의 하나로 한탄강 중류에 있는 정자를 말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고석정이 있는 부근을 전부 포함해서 일컫는다고 한다. 고석정은 신라 진평왕 때 처음 지어졌지만, 6·25 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정자를 둘러보고, 눈 덮인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왔다. 그리고 점심으로 엄청나게 맵다는 해물짬뽕을 먹으러 갔는데, 맛은 그저 그랬다.

"비탈길이다."

시골쥐가 소리쳤다. 경사가 아주 심한 건 아니지만 미끄럼을 타기에 적당한 기울기와 길이의 비탈길이 한여울길 옆으로 샛길처럼 나 있었다. 그 길옆에 비닐 비료부대 두 개가 버린 것처럼 던져져 있었다. 비료부대 안에는 푹신하라고 짚까지 들어 있다. 그걸 보니 딱 알겠더라. 동네 꼬마 녀석들이 그걸로 미끄럼을 탔을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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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친구들 덕분에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시골쥐가 먼저 타자, 고 덤벼들었다. 돈 내고 눈썰매장도 가는데, 하면서 말이다. 중간쯤 비닐부대를 타고 내려가던 시골쥐, 눈 위에서 나뒹굴었다. 비닐부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제 멋대로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시골쥐, 비닐부대를 다시 들고 올라와 이번에는 한나더러 같이 타잔다. 둘이 나란히 앉아서 아래를 향해 출발. 한나도 나뒹굴었다. 다음은 내 차례. 나라고 별 수 있나. 눈 위에서 나뒹굴어야지. 그런데, 왜 이리 재밌는 거야? 웃음이 절로 난다.

번지점프를 할 수 있는 태봉대교 아래에 서니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소리, 하면서 귀를 기울이니 아이들이 내지르는 소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강 건너 쪽에서 서너 명의 아이들이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비탈길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길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아이들이 눈 위로 나뒹굴면서 내지르는 소리가 강을 건너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미끄럼 타기가 즐겁고 재밌기는 마찬가지구나, 싶었다.

철원 한여울길의 종착지인 직탕폭포는 꽁꽁 얼어 있었다. 물이 흐르던 강 역시 얼어붙어 눈으로 덮여 있었다. 겨울은 폭포까지 얼어붙게 만드는구나, 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고작 5㎞가 채 안 된다는 한여울길을 거의 4시간이나 걸려서 걸었다. 고석정에서 점심식사를 하느라 미적거렸고, 또 미끄럼을 타느라 지체하기도 했지만 중간에 샛길로 새서 계곡을 따라 걸어서 그리된 것이다. 그리고 눈길이라서 천천히 걸은 탓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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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가 채 안 된 시각인데, 하늘에는 벌써부터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다. 확실히 겨울은 해가 빨리 기운다. 완만한 능선이 길게 이어진 산 뒤 하늘이 불그스레한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구름은 습기가 아닌 어둠을 잔뜩 머금었고, 그 사이로 철새들이 긴 금을 그리면서 날아간다.

1박2일의 일정은 겨울 해처럼 짧다. 그래서 못 걸은 길이 많은데, 하면서 아쉬워하게 된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시골쥐가 말한다. 철원의 겨울만 보지 말고,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도 보러 오라고. 철원은 겨울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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