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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는 자기가 인권 침해 당할 때는 민감한데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 외면하기 일쑤죠"
 "한국 사회는 자기가 인권 침해 당할 때는 민감한데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 외면하기 일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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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해 4월, 용산참사 사건으로 징역생활을 하던 감옥에서 이런 편지를 보냈다.

"겨우 10분이 허락되는 면회 때 누가 묻더군요. 나가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나가면 누군가의 감시나 통제를 받지 않고 내 자신의 의지대로 거리를 활보하고 맘껏 돌아다니는 것. 그게 '자유'일 겁니다."

그의 지난 23년을 표현한다면 이 '자유를 위한 투쟁의 시간'이었다고 하면 될까. 그는 나이, 성별, 인종, 신체적 조건 등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이들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앞장서 싸워왔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인권운동'하면 그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박래군(50)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다.

주로 싸움의 현장 앞자리에 있는 그를 보았던 탓인지 투사의 이미지가 강했다. 정작 지난해 12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인권재단 <사람> 사무실에서 만난 그에게선 농사꾼의 모습이 엿보였다.

"인물이 너무 '출중' 해서 인물 덕을 많이 봤습니다. 노동현장에 갔다가 학출(학생운동 출신)이라고 잘렸는데 같이 일하던 형님들이 '네가 무슨 학출이냐?'고 할 정도였지요"라면서 눈가에 주름 가득 잡히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순박한 모습에 금방 빠져들었다.

그는 인권활동은 "인권 피해자들의 아픔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공감한다는 건 함께 아파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런 일들을 피하고도 싶었어요. 그러다가도 현장 들어가서 보면 그게 내 일인 것 같고, 그래서 뛰어들고 하는 거죠."

그 일이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인양 그는 대수롭지 않게 지난 일들을 들려줬다.

농부가 울퉁불퉁한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무수히 많은 땀을 흘린 후 수확을 하듯, 그 역시 사람다움을 점점 잃어가는 이 척박한 땅에 지난 20여 년 동안 인권의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면서 부지런한 인권농사를 지어왔다. 그 고단한 노동에 한국 정부는 상 대신 '전과 11범'이란 훈장을 줬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요즘 새로운 일을 구상 중이다. "인권 피해자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 사람들이 하나하나 자신의 권리를 깨우쳐가는 모습을 보는" 인권운동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인권센터를 짓겠단다. 박래군 상임이사가 꿈꾸는 세상을 들으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마음의 빚, 용산


-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었던 탓에 용산참사 후 장례식장에서 6개월, 명동성당에서 4개월여를 갇혀서 생활하셨는데 힘들진 않으셨나요?

"힘들었죠(웃음). 수배 중에도 집행위원장으로서 부담을 지고 있었습니다. 열사들을 계속 냉동고에 넣어 둔 상태여서 심리적 부담이 굉장히 컸죠. 수배생활 끝나고 감옥 가니까 도리어 심리적 부담이 덜 하더군요. 4개월 살다 보석으로 나왔는데 나와서 다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니 또 부담이 되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부담스러워도 해야죠."

- 용산 참사를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라고 표현하셨는데, 참사 2주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용산 참사는 잊어서도 안 되고 잊히지도 않는 사건이죠. 돌아가신 분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요. 용산 참사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한국의 국가폭력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났다는 거죠. 국가폭력이 총체적으로 동원돼 나중엔 법원조차도 국가 공권력 편을 들었으니까요. 공권력에 도전하는 어떤 행위도 불법이란 게 대법원의 판결입니다.

또 다르게는 재개발 측면입니다. 사실 한국 경제성장의 역사는 재개발의 역사와 마찬가지죠. 재개발을 통해서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구조가 됐어요. 지금의 부익부 빈익빈이나 양극화 사회로 오게 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일 수 있어요. 국민들 역시 '중산층'이라든지 부동산 투기를 통해 한몫 잡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 사건이 그게 잘못됐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겁니다.

이전부터 재개발지역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이 폭력적인 상황에 내몰려 있었는지 깨달은 거죠. 이 약탈의 역사를 어떻게 멈추게 만드느냐. 이 사건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서, 정치 민주화도 후퇴됐지만, 경제사회민주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교훈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 검찰이 용산참사 범국민추모대회 주최 등을 이유로 5년 4개월을 구형했고, 1월 13일 선고공판에 따라 법정 구속이 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들려오고 있는데요.
"재판부가 그렇게 선고하면 재구속되는 거죠. 뭐. 만약 이번에 되면 네 번째 구속이에요. 누가 구속되거나 연행되고 싶겠어요?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진보운동을 하겠다고 하면 전과자가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거 같아요. 운동하는 사람이 자기 몸 사리고 연행될 거 겁내서는 안 되죠. 너무 '무데뽀'로 하는 것도 문제지만….

저는 운동의 본령은 불복종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 '시민'이 붙든, '비폭력'이 붙든 불복종운동이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이후에 합법적인 운동에 익숙해져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민주정부라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 통신비밀보호법 등 잘못된 법이 있는 것이고, 이런 악법들엔 우리가 저항해야죠. 그 저항을 통해서 악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거고요. 그 과정에서 다소 부딪히는 일이 있더라도 피할 수는 없는 거죠."

박 상임이사는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반년을 살았다. 그 헛헛함을 사람들이 없을 때 다섯 분 영정 앞에서 열사들과 대작하면서 풀어냈다. 혼자서 술을 건네고 받는 것이었지만….

4개월여의 수감 후 보석으로 나온 후에도 그분들이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을 찾았다. 양지바른 곳에 마련된 묘들을 보면서 "돌아가셔서 늦게나마 따뜻한 곳에 영혼의 거처가 마련돼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단다.

그는 그곳에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장례만 치렀을 뿐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다. "억울하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꼭 진상규명하겠습니다"라고.

동생이 인권운동으로 이끌다

 "운동의 본령은 불복종 운동… 저항을 통해 악법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바로 잡는 거죠"
 "운동의 본령은 불복종 운동… 저항을 통해 악법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바로 잡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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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운동 서클에 들어가셨다고 하던데 중고등학교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그렇지는 않고요. 제가 81학번이에요. 당시가 전두환 정권 초기여서 대학을 압살하고 있던 상황이죠. 선배들로부터 쉬쉬하던 광주 이야기를 듣고선 사람들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에 대해 젊은이로서 분노를 느끼고 있었죠. 11월에 꽤 큰 학내 시위가 있었는데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잡혀갔어요. 시위를 주동하던 선배가 학생회관 4층에서 시멘트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계기는 우연하게 찾아왔지만 이미 잘못된 시대에 대한 울분과 실천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죠."

박 상임이사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이다. 연세대 국문과 동기인 우상호 전 민주당 국회의원은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철원보다 박 이사가 태어난 서신면 상안리가 더 외진 곳이었다고
추억했다. 그의 부모는 머슴살이부터 시작해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고, 추운 겨울이면 뻥튀기 '구루마'를 끌고 다니며 장바닥을 누볐다. 그는 집안 전체에서 처음으로 4년제 대학을 간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가오'를 잡으셨죠. 그런데 1년도 안 돼 경찰서에서 오라가라 하고 부모님도 모르게 3학년 때 강제징집까지 당해 굉장히 많이 낙담하셨을 거예요. 민심이 천심이라고. 시골에선 서로 품앗이도 하는 이웃사촌이잖아요. 제가 86년에 한미은행 점거사건으로 감옥에 갔는데 시골에선 빨갱이 집안이 된 거죠. 이웃들이 피해 입을까 봐 왕래를 뚝 끊은 거예요. 그게 부모님께는 한이 된 것 같아요. 87년 6월 항쟁 끝나고 사면돼 나오니까 동네 어른들이 와서 '화성에서 애국자가 났느니…' 하시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우리 부모님이 아픔을 많이 겪으셨죠."

자신은 신념대로 살아왔지만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한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 묻어난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는 고관절을 앓은 후 한쪽 다리를 못 쓰시는 아버님의 농사를 돕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주말이면 집에 내려가는 정성을 보여 왔다.

노동운동을 꿈꾸던 그가 인권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유가족이 되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와 인연을 맺은 후부터다.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그의 동생 박래전(당시 25세)씨는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를 외친 후 분신했다.

- 동생의 죽음이 이후 운동의 전환점이었나요.
"그렇죠. 감옥에서 나온 후 노동운동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대학 졸업만이라도 하라고 하신 것도 있고, 감옥에서 하도 맞아서 허리가 너무 아파 제대로 앉기도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복학하고 당분간은 현장에 못 돌아갈 테니 지원활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던 차에 동생 사건이 터졌던 거죠.

1988년 10월에 처음으로 전국의 의문사 가족들이 모여서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했어요. 그전에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유가협이 있다는 말만 들어봤다가 유가족이 되어 처음 유가협에 가봤죠. 연세 드신 분들이 하루종일 바깥으로 돌아다니다 시멘트바닥에 스티로폼 깔고 주무시는 걸 보니까 안쓰럽더라고요. 또 그때 제가 동생 일 당하고 방황하던 시기라 딱히 하는 일이 없어서 그걸 돕다가 유가협 사무국장이 됐어요.

그렇게 유가협 활동을 하면서 인권문제에 눈을 떴어요. 처음엔 고문 문제나 의문사 문제들에 접근하다 보니까 기존의 민족민주운동이나 민중운동과 같은 정치화된 운동과는 다른 결의 운동이 인권운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 죽은 자들과의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쓰신 글을 봤어요.
"88년부터 93년까지 유가협에 있으면서 직간접적으로 50여 분의 열사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91년 열사 정국 때는 거의 두 달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영안실을 지켰어요. 그래서 '재야의 장의사'란 별칭을 받기도 했고요.

그분들은 개인적인 이유로 죽은 게 아니고, 목숨을 바칠 정도의 절절함을 품은 거잖아요.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 죽을 때는 남은 사람들이 자기 뜻을 알아주고, 이어주길 바라고 또 그러리라 믿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남겨진 사람들도 열사들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 자기 삶을 어떻게 살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너무 쉽게 잊어요. 추모하고 계승한다는 것도 굉장히 관성화, 형식화되고.

우리가 한 약속이잖아요. 산 사람들과의 약속은 변경할 수 있지만 돌아가신 분들과 한 약속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만약에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면 이 세상이 훨씬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 상임이사는 지난 20여 년 운동하는 중에 1991년 열사 정국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4월26일, 명지대학교 강경대씨가 집회 중 백골단에 맞아 죽은 후 전남대 박승희(4.29), 안동대 김영균(5.1), 경원대 천세용(5.3),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5.8), 전남대 운용하(5.10), 이정순씨(5.18), 전남 보성고 김철수군(5.18), 정상순(5.22)씨 등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시대의 어둠을 외쳤다. 그는 "또 누가 죽었을까 봐 아침에 일어나 신문 보기가 무서웠"단다.

그 과정에서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이 터졌다. 정권과 검찰은 전국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간부였던 강기훈씨가 동료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해 자살을 사주했다면서, 재야단체의 '사건 조작'이라는 반발에도 강씨를 처벌했다.

박 상임이사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2011년 5월이면 그 사건이 20년이 돼요. 20년 동안 강기훈은 유서를 대필해서 동료가 죽는 걸 방조한 놈으로 되어 있던 거죠. 이 친구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어요. 한편으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잖아요. 특히 이 친구의 어머님이 그렇게 애를 쓰셨어요.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재심결정 받아서 마지막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희망을 좀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올해 봄에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는 강기훈씨 어머님 영전에 바칠 '아들의 무죄'를 밝힌 대법원의 재심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인권은 연대다

 "죽은 사람들과의 약속 지켰다면 이 세상은 훨씬 좋아졌을 거예요"
 "죽은 사람들과의 약속 지켰다면 이 세상은 훨씬 좋아졌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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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인권피해 사건들을 해결하셨죠. 청각장애인 수용시설이었던 에바다재단 정상화 투쟁 중에는 똥물까지 뒤집어썼다고 들었습니다."저는 똥물 한 차례 뒤집어쓴 거밖에 없지만 거기 계셨던 여선생님들은 훨씬 더 힘든 걸 견뎌냈어요. 비리 재단쪽 인간들이 청각장애학생들을 악용해 다 시켜서 한 거지만 아이들이 선생님들한테 침 뱉고 똥물, 뜨거운 물을 막 끼얹곤 했어요. 거기서 싸운 여선생님들이 존경스러운 게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자기를 빛내고 이름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어요. 에바다가 끝내 이길 수 있었던 건 끝까지 청각 장애인 아이들을 지켜주던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동력이 없었으면 이길 수 없었을 거예요."

- 대추리 투쟁도 잊지 못하실 것 같아요. 최근에 <아 대추리>란 책도 쓰셨던데요.
"대추리 투쟁은 '평화적 생존권'을 내걸고 시민 한 명 한 명이 싸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의지를 갖고 버텨줘서 가능했던 일이죠. 결국 운동세력들이 투쟁을 제대로 지원하고 연대하지 못해서 주민들이 막판에 싸움을 접었어요. 그래서 주민들을 탓할 수 없어요. 처음부터 이 투쟁에 결합했던 문정현 신부님도 그걸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주민들의 뜻을 이해하셨어요. 그분들의 편에 서서 대추리라는 주민공동체가 유지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지원하는 걸 보면서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우리 운동하는 사람 중엔 운동적 목적을 앞세우다 보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민들이 정부와 협상에 나서는 걸 반대한 이들도 있었거든요."

- 현재 대추리 주민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끝까지 남았던 44가구가 인근 노와리에 이주단지를 만들어 이주했어요. 지난 10월 30일에 마을 입촌식이 있었죠. 그런데 신대추리에서는 아무리 소득이 없어도 서로 의지하면서 살던, 기존 농촌마을공동체가 갖고 있던 부분들이 깨져 버렸어요. 공공근로사업에 의지한 채 살게 된 상황이죠.

이렇게 대추리 싸움이 마을도 뺏기고 집도 뺏기고 끝났어요. 지금 와서 묻고 싶은 건 그렇게 국민을 쫓아내서 우리 정부가 얻은 게 뭐냐, 한국 국민들이 얻은 게 뭐냐란 겁니다. 더 평화로워졌나요? 아니잖아요. 거꾸로 더 불안한 상황으로 가고 있죠. 그때 그렇게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에 나는 책임을 묻고 싶어요. 대추리 분들 보면 계속 죄스럽죠."

<인권운동 사랑방>엔 다양한 사람들이 상담을 온다. 개중에는 딸이나 아내가 안기부에 포섭돼 자신이 정부기관에 추적을 받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서 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얘기를 사람들한테 하면 누가 들어주나요. 그런 사람들이 와도 내색 않고 2~3시간씩 이야기를 다 들어줘요. 그러면 나중엔 그 분들이 울어요. '내 얘기를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두 번, 세 번 만나서 친해지면 '정부가 나도 안 쫓아다니는데 당신은 왜 잡으려고 하겠냐' 식으로 살살 이야기를 해줘요. 그러면 또 조금씩 바뀌죠."

병든 사회 속에서 병들어 가는 사람들이 그는 안쓰럽다. 그들을 도와주느라 종종 가난한 활동가의 주머니는 더 가벼워지기도 한다.

"속 썩이는 사람도 있죠. 계속 연락하던 한 사람은 이삿날을 며칠 앞두고 술 마시고 싸워서 감옥에 간 거예요. 어쩌겠어요. 제 돈 들여서 이사 다 하고 그 사람 감옥에 있는 동안 정기적으로 그 집 가서 공과금 관리도 해 주고…. 나중에 갚는다고 했지만 내가 그 사람 어떻게 사는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받겠어요."

- 한국 사회 인권인식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사회가 인권을 상당히 이기적으로 수용해요. 자기가 인권침해 당하는 데는 굉장히 민감하고, 그럴 땐 인권을 찾아요. 그런데 인권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당하는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당하는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해야 하거든요. 그게 바로 연대죠. 하지만 우리 사회는 평소엔 인권피해 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기 일쑤에요. 연대가 계속 깨지는 거죠. 신자유주의 문화가 연대를 깨고 다 개별로 만들어서 경쟁을 시키는 거잖아요. 우리 사회가 이런 데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운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인권문제는 관계를 놓고 봐야 해요. 인권피해자가 항상 인권침해만 당하는 사람이 아닐 수 있죠. 남성노동자의 경우, 자본에 의해 피해를 당하기도 하지만 여성이나 아이한테는 또 가해자일 수도 있는데 이런 부분에선 둔감하죠. 이런 인권 감수성훈련이 안 돼 있어 지금도 노조에서 성희롱,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다고 봐요."

- 최근 인권센터를 짓는 데 힘을 쏟고 계신데 현재 한국사회에 인권센터가 필요한 이유는 뭔가요.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인권문제가 굉장히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어요. 국가인권위원회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게 하나의 증거죠. 그렇다면 이걸 견제할 힘은 어디에 있을까, 그걸 만들자, 그 힘을 만들기 위해서 센터를 만들어 보자는 겁니다. 왜 센터라는 공간이냐. 인권단체들이 굉장히 열악해요. 구멍가게 수준이죠. 그런 부분들을 모아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토론회, 세미나도 할 수 있고, 인권 피해자들은 와서 상담도 하고, 작은 단체들은 공동사무실로도 쓸 수 있는 공간 말입니다.

아무리 국가가 민주화돼서 국가인권위 같은 게 잘한다고 하더라도 권력은 늘 감시받지 않으면, 우리 국민들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있거든요. 국가인권위가 잘 되면 좀 낫겠지만 그것도 국가기구잖아요. 민간기구들이, 시민사회가 견제할 힘을 갖춰야 하는 거죠.

또 한편으론 국가인권위 같은 기구가 잘못되면 국가폭력, 국가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발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어요.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어가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힘이 없는 거죠. 그런 걸 만들어가자. 그러면 보다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 사회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 사회가 돼 보자고 호소하고 다니려고요. 그렇게 하면 좀 먹히지 않을까요?

항일 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했던 분들이 고초를 당했던 역사가 있는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 100평 규모의 인권센터를 지으려고요."

현재 인권재단 <사람>은 50여 인권단체들의 CMS이체를 대행해 주고 있다. 인권단체들이 열악해 CMS를 트기 위해 필요한 보증금 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사람>으로 들어오는 CMS 회비는 7000여 만 원. 그걸 50여 단체로 나누면 한 단체 당 150만 원 정도를 갖고 간다.

"작은 단체들한테는 그게 있느냐 없느냐가 큰 차이예요. 하루라도 늦어지면 난리가 나요. 그런 거 보면 안타깝죠. 안타까워."

깊어지는 그의 주름 속에 애끓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 비용이 만만찮게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마련할 계획이신지.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그래요. 제가 해왔던 일이 다 무모하지 않았나요.(웃음) 그런데 인권센터는 잘될 것 같아요. 현재 인권운동은 단체 중심으로 범위가 굉장히 좁은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과정을 밟아서 인권센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10만 명이 1만 원씩 내자는 거죠. 우리 사회가 아무리 후진 사회이긴 하지만 인권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10만 명도 안 될까요. 10만 명 모으면 정말로 돌판에 모든 분들의 이름을 다 새길 겁니다. 사재를 털어서라도 그 돌은 내가 꼭 만든다고 결심하고 있어요."

활동가, "낮추고 또 낮춰라"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인권피해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것이 인권활동"이라고 말한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인권피해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것이 인권활동"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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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악한 인권단체에서 20여 년 생활하셨는데 집안 살림은 어떻게 꾸리셨나요?
"2006년까지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비는 35만 원이었어요. 저는 딸 둘이 있어서 자녀수당으로 6만 원을 더 받았죠. 2006년에 사무실세 내는 것을 줄이자고 지금의 서울 중구 중림동으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후원주점을 했어요. 돈을 엄청 모아서(웃음) 활동비를 85만 원까지 올렸어요.

1991년에 결혼을 했는데 한동안 우리 마나님한테 '등처가' 노릇을 했어요. 그런데 어는 순간 마나님께만 짐 지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활동비는 전부 집에 주고 제 용돈은 제가 벌자고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로 원고 엄청 많이 썼어요. 강연도 다니고…."

- 1980년대 운동했던 사람들이 제도정치로 많이 들어갔는데 박 상임이사는 여전히 사회운동을 지키고 계십니다.
"저는 정당운동이나 제도권활동이 불필요하다고 생각은 안 해요. 그런데 운동하는 사람은 제도권이 중심이 아닌 거죠. 바깥에서 사회운동이 강하게 중심을 잡고 발전해가야 제도권에 들어간 사람도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니면 그렇게 들어간 사람이 제도권 기구나 법제를 위해 이용당하거나 아니면 자기 스스로를 그곳으로 전락시키는 거죠. 그렇게 운동가에서 관료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정치운동보다는 사회운동 영역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해요. 의도하지 않았어도 제가 인권운동 내에 상징적인 위치가 돼 버렸어요. 후배들이 일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놓을 때까진 이 부분에서 지키고 있을 필요가 있죠."

- 본인을 활동가라고 칭하시는데 자신만의 활동가 상을 세우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86년도 5월에 노동자도 광주문제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고 한미은행을 점거했다가 구속됐어요. 영등포구치소에 있다가 대전교도소로 갔는데 구치소에 있을 때 구치소 내 문제든 정치적 문제든 계속 '꼴통같이' 싸움을 걸었어요. 그땐 운동한다고 기고만장해서 자만하고 교만했던 것 같아요.

교도소로 이감돼서도 '난 안 꺾인다'를 보여주려고 투쟁하다가 옮겨간 방이 장기수 선생님들을 전향공작 하려고 분리시켜 놓은 사동이었어요. 그분들 생활하는 모습 보면서 반성 많이 했어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좌하고 몸을 정갈하게 닦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생활하시더라고요. 그런 걸 독방에서 20년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 오신 거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당시 우리는 입만 열면 '혁명'을 얘기하던 시기였는데, '운동', '혁명' 그런 건 말로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죠. 기껏해야 학생운동 좀 하고, 폭력시위 몇 번 한 걸 갖고 혁명투사가 된 것처럼 생활한 내가 너무 부끄럽더군요. 그분들을 보면서 운동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춰라.'

운동하는 사람은 뭐가 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노동조합에서 일하다 보면 계속 직책이 올라가잖아요. 그럴 때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인권운동사랑방은 대표, 사무국장이란 직책 자체가 없어요. 똑같이 '활동가'지요. 갓 스무 살 넘은 활동가도 있고 나같이 늙수그레한 쉰 살 된 활동가도 있죠. 그렇게 똑같이 '활동가'로 책임을 나누다 보니 대표와 사무국장이 있을 때처럼 정보와 의사결정권이 집중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더군요. 그렇게 뭘 바라지 않고 헌신하다 보면 또 뭐가 돼요.(웃음)"

박래군 상임이사의 꿈은 소설가였다. 우리 시대를 누구보다도 먼저 드러내고 고민하는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싶었단다. 최근에 읽은 소설을 물으니 황석영의 <강남몽>, 조정래의 <허수아비춤>, 공선옥의 <영란> 등을 열거하면서 각 소설에 대한 느낌을 밝혔다. 인권 이야기를 할 때만큼 눈이 반짝였다.

1월 13일에 혹시 징역형을 선고받으면 소설쓰기를 고민해볼지도 모른단다. 20여 년 동안 사회의 폭력에 의해 아파하는 사람들 곁을 지킨 그가 그리는 세상의 모습은 얼마나 절절할지 궁금하다. 하지만 아직은 그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안 됐다. 이 사회 곳곳엔 여전히 그의 손을 필요로 하는 인권 피해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2011년, 그를 구치소가 아닌 서대문 형무소 옆 100여 평의 인권센터에서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법을 가진 자의 편에서 바라보지 않는 현명한 사법부와 인권센터 입구 돌판에 이름을 새길 10만 명의 인권지킴이들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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