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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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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블라디보스토크 군항. 박용만은 92년 전 이 군항의 한 선착장에 내렸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군항. 박용만은 92년 전 이 군항의 한 선착장에 내렸을 것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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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선 더 이상 박용만이 열정을 바쳐 몰두할 사업은 남아 있지 않았다. 국민군단도 해체됐다. 남은 것이라고는 이승만파와의 갈등으로 생긴 피딱지 뿐이었다. 젊어서 넘어 왔던 태평양을 그는 아직 피가 더울 때 다시 되넘어가기로 했다.

조국 광복의 전망은 암담하였지만 직접 적들과 맞설 수 있는 중국대륙으로 가서 애오라지 추구했던 무력 항쟁을 다시 한 번 더 시도해보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작정한 운명이었다.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졸업할 즈음 그 결심을 한 수의 시에 담았다. 한시(漢詩) '지명시(知命詩)'에서 그는 천병만마를 이끌고 동쪽을 정벌하러 나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지명시(知命詩 - 운명을 깨닫는 시)

大夢平生自覺知 평생 큰 꿈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丈夫胡爾等諸兒 장부가 어찌 아이들 같을까
文非窮我終成器 글은 내게 궁하지 않으니 성공할 것이요
武則達人也得時 무술을 통달한 사람은 때를 얻을 때가 있다
重陸遠洋西渡誓 무거운 육지 먼 바다 서쪽으로 가기를 맹세한다
千兵萬馬東伐期 천병만마로 동쪽 치기를 기약한다
靑年失志何須恨 청년들이 뜻을 잃었으니 어찌 한탄 안하랴
月滿花開早或運 달이 차고 꽃이 피는 건 이르거나 늦거나 올 것이다 

5월 19일 호놀룰루를 출항한 토마스호는 마닐라를 거쳐 약 한 달 반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군함들이 접안하는 선착장은 따로 있었다. 위병 초소가 있는 정문을 나서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박 선생님, 어서 오시오"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국민회 관계로 전서부터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들이었다.

시베리아와 만주에도 1912년 대한인국민회의 지방총회들이 조직됐다. 미주 및 하와이와 연대함으로써 유일무이하게 한인의 범세계적 단체로 발전하고 있었다. 시베리아에는 모두 21곳에 지부가 수립됐는데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치타, 하바로브스크, 이르크츠크, 톰스크 등지였다.

"아버지, 동옥이예요" 머뭇거리다 동옥이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그 옆에는 이용화가 서 있었다. 14년 만에 다시 보는 딸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고마웠네" 박용만은 이용화의 손을 덥석 쥐었다.

박용만은 1917년서부터 2년 간 하와이령 주둔군 정보과에 자원 정보제공자로 일했다. 많은 한인들은 미국과 일본은 조만간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럴 경우 미국을 도움으로써 독립을 쟁취할 기회가 오리라 기대했다. 박용만이 육군 수송함인 토마스호에 탈 수 있었던 건 정보제공자로 주둔군 사령부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출항에 앞서 박용만은 자신의 이름을 한상량(韓相良, Shih Liang Roy Hahn)이라는 가짜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가명은 나중 중국여권을 얻을 때도 사용하게 된다.

우스리스크 역. 박용만은 이 역에 내려 동지들을 찾아 갔을 것이다.
 우스리스크 역. 박용만은 이 역에 내려 동지들을 찾아 갔을 것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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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용만은 사위를 통해 '한인신보'를 발간하던 김현토와 이종익을 알게 됐다. 이종익이 연락해 8월 말 경 우스리스크에서 조성환을 만났다. 당연히 최재형을 찾아가 인사도 드렸다. 그는 연해주 동포들로부터 가장 존경 받는 어른들 중 한 분이었다. 노비 가문 출신으로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될 정도로 중망이 높았다. '대동공보'의 발행인이었고 권업회 회장도 맡았다. 한인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애썼고, 있는 재산을 장학사업과 학교설립에 바쳤다. 안중근이 찾아 왔을 때 같이 의거를 도모했고 그가 처형된 후 부인과 자식들을 보호했다.

최재형(1859-1920)
 최재형(1859-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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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자동차로 1시간 거리다. 1870년대부터 한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해 한인촌이 형성됐다. 현재 16만 인구 중 한인이 2만 명이다. 미주에서 돌아간 이상설도 이곳에서 살다가 병사했다. 일찍 한인촌이 형성되다 보니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일관되게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최재형도 말년을 우스리스크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는 다음 해 4월 일본군에 몸을 내주고 순국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마지막 살던 집(우스리스크의 블로다르스카야 거리38).박용만은 이 집으로 최재형을 찾아 가 인사를 드렸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마지막 살던 집(우스리스크의 블로다르스카야 거리38).박용만은 이 집으로 최재형을 찾아 가 인사를 드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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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성환은 1918년 12월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박용만과 함께 참여한 39명 중 한 사람이다. 1919년 3월 조성환은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김동삼, 조소앙 등 30여 명과 함께 연해주에서 상해로 내려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군무차장으로 임명됐으나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은 무력투쟁 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였다. 다시 만주로 나와 북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해 참모장이 됐다.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단체들이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을 때 홍범도,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됐다. 65세의 고령이 되자 1940년 중경으로 내려가 임시정부와 고락을 같이 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임정 요인들과 함께 환국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주(註) - 박용만도 같은 급을 수훈)이 그에게 추서됐다.

박용만이 조성환을 처음 만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인 1904년, 서울의 상동청년회에서였다. 상동청년회는 상동교회에서 조직한 단체였다.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단체였지만 실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주축이었다.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던 상동교회 옛 건물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던 상동교회 옛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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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 목사(1875-1914). 상동교회 제6대 목사.
 전덕기 목사(1875-1914). 상동교회 제6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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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는 상동교회 제6대 목사 전덕기가 회장이었으며 간부로는 박용만, 조성환, 이동녕,이승만, 정순만, 이희간 등이 있었다. 민영환, 이시영, 이상설 등 대관들이 후원했고 4만 명의 회원들이 참여했다.

1907년 회장은 헤이그에 파견된 이준 열사였고, 이회영, 주시경도 회원들이었다. 이 회는 청년학원을 운영하여 뜻있는 청년들을 계몽하고 미국으로 가는 유학생을 돕는 일을 했다. 러일전쟁 때 이희간이 고등군사탐정으로 종군해 번 돈 1만 3000원을 내놓은 것을 가지고 유학생의 여비를 대여해 주기도 했다. 박용만도 그 돈을 빌려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고 미국에 도착 후 빌린 돈을 송금해 상환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가 있기 한 달 전 블라디보스토크의 교외에서 체코여단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할 때 조성환은 북로군정서 재무부장 자격으로 그 임무를 수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오래 살아 현지 상황을 잘 알고 또 로어도 능통한 박용만의 사위 이용화가 곁에서 도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박용만이 조성환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은 일본의 고등경찰 보고서에 나온다.

'고경(高警) 제35081호'에 의하면 "미국에 있던 배일선인의 수괴 박용만은 본년 7월 경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 니콜스크(우스리스크)에서 이민복, 조성환, 백준 등과 같이 만나서 서북파를 제외하고 기호파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편성하고 간도, 길림 지방의 동지와 더불어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려 기도해 이를 '대한국민군'이라 이름 짓고 총사령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두고 조성환을 총사령으로 하고 박용만을 총참모로 하여 기타의 동지는 먼저 군자금의 모집에 종사할 것을 협의 결정하여....(하략)"라고 보고하고 있다.

조성환과 박용만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동지들을 비밀리 고국으로 파송했다. 서울 중앙학교 교장 김성수에게 보낸 동지는 도중에 체포됐다.

그 편에 부친 편지에서 박용만은 "야생(野生)은 한 달 전 미국에서 동귀(東歸)하고 서서히 중외의 소식을 알아보니 상해에는 가정부가 존재하고 길림에 군정사(軍政司), 소령에 국민회 있어 명(名)은 미(美)하지만 실(實)이 따르지 못하고 .... 야생의 일신을 어디다 따르게 할 바를 몰랐소이다. 다행히 경일(頃日)에 이르러 한쪽으로 잠세력(潛勢力)의 발동 즉 국민군의 암중비약 있음을 듣고 (하략) "라고 적었다.

'야생의 일신을 어디다 따르게 할 바를 몰랐소이다'라는 고백은 박용만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간 방황하다가 자기보다 6살 위인 조성환을 '대한국민군'의 총사령으로 하고 그 밑에서 총참모가 돼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음이 엿보인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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