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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눈길을 걸었다. 발이 푹푹 빠졌다.
 이런 눈길을 걸었다. 발이 푹푹 빠졌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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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서울에도 많이 내렸다. 하지만 눈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했다. 결론은, 서울은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없는 대도시에, 일터가 있고, 생활공간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울이 무조건 삭막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돌아다녀 보면 아름답거나 정취가 가득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눈이 온 뒤, 출근하면서 아침에 빙판으로 변한 눈길을 종종걸음을 걷다 보면 정취를 느낄 겨를이 없다. 게다가 나는 빙판길에서 여러 번 넘어진 경험이 있는지라, 그런 길을 볼 때마다 겁부터 덜컥 난다. 그러니 그저 눈이 불편하게 여겨지고, 제설작업을 제대로 못 한 서울시를 원망하게 될 뿐이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면 다르다. 마음이 느슨해지고 그에 따라 평소에는 굳었던 몸도 조금은 유연해진다.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여행을 떠나는 마음의 바탕에는 여유를, 일탈을 느껴보겠다는 작정이 깔려있어서 그럴 것이다.

지난 12월 30일, 1박2일 일정으로 강원도 철원에 다녀왔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두 가지. 철원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 '시골쥐' 만나기와 걷기. 어느 길을 걸을 것인지는 철원이 '나와바리'인 친구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덕분에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머리 아프게 코스를 잡지 않아 마음이 편하긴 했다. 숙소 역시 친구가 잡았으니 더더욱.

친구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다. 도보여행을 하면서 길 위에서 만난 친구다. 걷다 보면 이렇게 저렇게 길 위에서 친구가 생겨, 만나고 그리고 헤어지게 된다. 헤어질 때는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 같이 걸을 수 있을 테니까. 인연이란 물처럼 흐른다는 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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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으로 가는 버스는 동서울버스터미널에도 있지만, 수유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수유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버스터미널이 있다. 수유역에서 한나를 만났다. 한나, 역시 길 위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다. 큰 키에 다리까지 길어 성큼성큼 잘도 걷는다. 배낭을 메고 어깨를 쭉 펴고 걷는 폼을 보면 훈련을 제대로 받은 군인 같아 보인다.

수유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철원 와수리까지 운행한다. 전날 내린 눈 때문에 버스는 예정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 눈이 얼어 빙판이 되었거나, 제설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길이 많이 막힐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나가 안전벨트를 매라고 한다. 이런 날은 사고에 대비하는 게 최선이라면서. 옳은 말.

서울은 제설작업이 잘되었는지 도로에 눈이 거의 없었지만 서울을 벗어나니 도로 위에 눈이 남아 있는 구간이 많이 나타난다. 강원도 지역으로 접어드니 아예 하얀 눈길이다. 안전벨트를 매기 잘했다. 눈 덮인 풍경이 길옆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목적지는 지포리. 이곳에 철원군청과 법원, 등기소 등이 있다. 하지만 지포리보다는 와수리가 더 번화한 거리라고 한다. 거의 두 시간쯤 걸려 지포리에 도착. 버스가 천천히 달린 것을 감안하더라도 예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곰탕에는 잘 익은 깍두기가 곁들여져야 제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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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용화저수지
 눈 덮인 용화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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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친구 '시골쥐'는 버스터미널에 마중 나와 있었다. 시골쥐는 철원에서 남편과 농사를 짓고 있다. 아삭이고추와 같은 특용작물을 재배하는데, 어떤 작물을 재배할 것인지는 그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지난여름에는 포도도 재배했다. 덕분에 농번기에는 짬을 내지 못하지만 농한기인 11월부터 4월까지는 여유롭다. 그래서 농한기에는 가끔 도보여행을 떠난다.

오전 11시 반, 점심식사를 하기 이른 시간이지만 일단 길 위로 나서면 마땅히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곰탕집으로 갔다. 우리가 첫 손님이라 식당은 한산하다 못 해 썰렁했다. 늘 이런가 싶었더니, 12시가 되자마자 손님들이 들이닥치는데 나중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손님들로 꽉 채워진다. 혹시 여기가 유명한 맛집?

그 식당에서 따끈한 곰탕 한 그릇을 비웠다. 추운 날에는 그저 따끈한 국물이 최고지, 하면서. 한데 이 집. 깍두기가 덜 익었더라. 곰탕에는 잘 익은 깍두기가 곁들여져야 제맛이 나는 데 말이다. 그게 아쉬웠다.

도보여행은 그래서 곰탕집부터 시작되었다. 그곳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철원은 온통 눈 천지였으나, 자동차 도로에는 눈이 없었다. 제설작업 덕분이겠지만. 대신 인도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다져진 곳은 빙판이 되어 있기도 했다. 눈이 쌓인 인도를 걸었다.

시골쥐는 삼부연 폭포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와 한나를 안내했다. 삼부연 폭포를 지나면 용화저수지가 있는 용화리가 나온다. 해가 지기 전에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을 작정이었다. 특별히 정한 목적지 없이. 걸을 만큼 걷다가 돌아 나오기. 그렇게 걷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게다가 길친구들과 함께 걷는 길이니 심심하지 않을 거고. 그렇더라도 장비는 갖췄다. 등산화에 배낭에 아이젠에 모자에 스패츠까지. 배낭에는 혹시나 해서 헤드랜턴까지 챙겨 넣었다는 거 아닌가. 이 세심한 준비성.

오룡굴
 오룡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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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원3리 마을 표지석 부근에 다다르니 인도는 온통 눈이다. 자동차 도로 일부는 눈을 치워놓았지만 손이 모자랐는지 전부 치우지는 못했다. 차량의 통행이 드문 덕분에 눈이 치워진 2차선 자동차도로 위를 걸었다.

사람의 손으로 굴을 파서 길을 냈다는 오룡굴을 지났다. 굴 안의 천정이 울퉁불퉁한 것이 얼핏 봐서는 자연동굴로 착각할 만도 하다. 용화리로 접어드니 자동차 도로에도 눈이 쌓여 있다. 여기까지 제설작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쌓인 눈을 발로 툭툭 차거나 푹푹 빠지면서 걷는 맛이 남달랐으니 말이다.

발밑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얌전한 소리가 아니라 뿌드득 심하게 이를 가는 소리처럼 들린다. 뿌드드득, 뿌드드득. 눈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길가의 양철지붕집 위에 눈이 쌓이고,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다. 눈은 길 위뿐만 아니라 우체통 위에도 쌓이고, 장독대 위에도 쌓이고, 용화저수지 위에도 쌓였다. 길 앞을 가로 막은 듯이 우람하게 서 있는 산에도 쌓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위에도 쌓였다. 소나무 위에 무더기로 쌓인 눈은 꼭 게으른 나무늘보가 나무 위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걷다가 멈춰 선 우리는 사춘기 계집아이들처럼 까르르 웃어댔다. 참말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월은 물보다 빨리 흐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나이는 훌쩍 먹어버렸으니 말이다.

명성산 등산로 표지판 앞을 조금 지난 곳에서 어린 강아지 둘을 만났다. 얼굴에 비해 눈이 무척이나 작은 게 어찌나 귀엽던지 가까이 다가가서 어르고 안아주었다. 털빛은 흰색인 것 같은데 때가 탔는지 옅은 회색빛에 가깝게 보인다. 이 녀석들, 낯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달려와 반갑다고 난리가 났다. 안아주면서 예쁘다고 하니 아예 따라나선다. 녀석의 어미로 보이는 덩치 큰 녀석까지 나타나 따라온다.

칼바람은 온기 있는 곳을 피해가는 것인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줄 알겠다. 우리 개, 아니거든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줄 알겠다. 우리 개,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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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 어느 정도까지만 따라오다가 돌아가야 정상인데 돌아갈 생각도 없이 지치지도 않고 잘도 따라온다. 결국 이 녀석들의 쥔으로 보이는 소녀가 우리를 쫓아오면서 외쳤다.

"걔네들 데리고 가지 마세요."

이건 완전히 오해야. 우리는 데려가는 게 아니라구. 결국 소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강아지들을 넘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이 강아지들이 다시 따라오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강아지 쥔은 어디론가 출타를 했는지 집을 비워, 녀석들은 하염없이 우리 뒤를 졸졸거리면서 따라왔던 것이다.

덩치가 너무 작아 녀석들은 눈 속에 폭폭 파묻히면서도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왔다. 결국 우리는 강아지들을 돌려 보내려고 속마음과 달리 매정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따라오지 마. 니네집으로 가라고."

그래도 녀석들은 막무가내였다. 꼬랑지를 흔들어대면서 반갑다고 달려들고 달려든다. 시골쥐가 발로 오지 말라면서 한 녀석을 슬쩍 밀었더니 눈 위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몇 번이나 위협적인 목소리로 가라고 외쳤지만 녀석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수밖에. 하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돌아간 만큼 따라갔던 녀석들이 다시 따라온 것이다. 이 일을 우짜노. 그냥 우리 갈 길을 가자니, 녀석들이 계속해서 따라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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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 마을 사람이 나타나 그 분에게 녀석들을 부탁했다. 겨우 녀석들을 떼어놨나 했더니 한 녀석이 끈질기게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온다. 으, 정말이지 고만 따라와라. 그 녀석 떼어놓고 오느라 정말 힘들었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눈길이 계속 이어진다. 눈길이, 이게 보기에는 운치가 있지만 직접 걸으면 걷기가 쉽지 않다. 눈을 헤치면서 걷는 걸음은 자꾸만 더뎌진다. 발이 자꾸만 눈속에 파묻혀 바지와 등산화가 젖을 것을 우려해 스패츠를 둘렀다. 길옆 계곡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하늘이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기에 눈이라도 내리려나, 했더니 정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송이는 굵어지지 않았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 볼에 와 닿은 눈은 체온 때문에 금세 녹아버리고. 눈은 오래 내리지 않고 그쳤다. 다행이다.

용화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쳐놓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잠시 쉬었다. 이 마을 사격장을 이전하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더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던 장소인가 보다. 천막 안은 바람을 피할 수 있어서인가, 아늑하게 느껴진다. 칼바람은 온기 있는 곳은 피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성산 입구를 지나 한 시간쯤 걸은 뒤에 걸은 길을 되짚어 나왔다. 눈이 잔뜩 덮인 길을 넘어가다가 날이 저물면 낭패를 볼 수도 있거니와 김화로 넘어가서 어두워지기 전에 쉬리공원을 둘러볼 참이었기 때문이다.

현수막도 눈속에 파묻혔다.
 현수막도 눈속에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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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보여행, #철원, #지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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