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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패딩 점퍼를 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검은색 안경을 낀 그의 얼굴은 힘이 없어 보였다. 정리되지 않는 턱수염은 그를 더욱 초췌해 보이게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친 얼굴과는 다르게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모든 철거민들에게 두리반은 승리의 상징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2011년은 제게 새롭지 않습니다. 숫자만 바뀐 것이죠. 철거민에게는 계속 ing일 뿐이죠."
 
마포구 동교동 134-21번지 '두리반'에서 아내와 함께 투쟁하고 있는 소설가 유채림(51)씨의 말이다.

 

2009년 12월 24일. 동교동 삼거리 근처 두리반에는 용역 직원들이 찾아왔다. 유씨의 부인 안종녀(52) 사장과 주방직원들, 그리고 각종 집기 등은 그들에 의해 거리로 끌려나왔다. 3년 전 공항철도 역사 건설 계획이 알려진 후 건물주는 세입자에게 말없이 남전디앤씨 측에 건물을 팔아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안 사장과 세입자들은 권리금과 보증금을 받기 위해 법정 소송을 불사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지구단위계획'이라 보상의무가 없다는 판결이었다. 같은 건물에 입주해있던 다른 가게들은 하나둘씩 건물을 떠났고 계속해서 가게를 지키던 안 사장에게 그날은 '악몽'과 같은 하루였다. 이튿날 새벽, 안 사장은 용역직원들이 쳐 놓은 철판을 뜯고 다시 두리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이 넘는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2010년 12월 31일 열린 '칼국수 음악회'

 

2010년 마지막 날 마포구 동교동 삼거리 옆 공터에 위치한 폐건물은 북적대기 시작했다. 지난해 3월 둘째 주 금요일부터 시작된 '칼국수 음악회'의 올해 마지막 공연 날이었다. 유씨와 안씨 부부의 투쟁을 알게 된 홍대 인디뮤지션들이 두리반을 돕기 위해 지난해 1월 음악회를 시작한 이후, 2월 마지막 토요일부터는 '자립음악회', 3월부터는 '칼국수 음악회'가 계속 열리고 있다. 5월에는 62개의 밴드가 두리반 뒷마당, 건물 지하, 3층에서 동시 공연을 열어 3000여 명이 관람하기도 했다.

 

31일 오후 7시 반, 공연 시작 무렵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3층 공연장 40여개 좌석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공연장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지난해 7월 21일 한전이 건설업체의 요청으로 단전한 탓에 현재 두리반은 건물 옥상 태양열 패널을 이용해 전기를 쓰고있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3층 공연장에 조명이라곤 10와트짜리 전구 3개가 전부였다.

 

한쪽에 설치된 무대의 한구석은 이미 내려앉아 있었다. 이날 동교동의 온도는 영하 8도. 칼바람까지 불어대 체감온도는 더욱 낮았다. 바깥 날씨는 공연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창문 근처에 앉은 관객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관객들의 발을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공연장 뒤에 놓인 등유난로만으로는 공연장 구석구석까지 따뜻하게 만들긴 어려워 보였다

 

무대에 나선 문화노동자 이수진씨가 그의 노래 '아프게 하지 마라'를 들려준 후 관객들에게 칼국수 음악회에 대해 말했다.

 

"칼국수 음악회는 다시 이곳 두리반에서 칼국수를 먹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음악회랍니다. '질긴' 놈이 승리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즐기는 놈이 승리한다고 하네요. 우리 모두 힘냅시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한마디 들려온다.

 

"(그럼 우리는) 다 이긴거다!"

 

"지금 제일 힘든 건 추위"

 

공연장 밖 계단에서 만난 활동가 '공기'씨는 용역 직원이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아 보였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와요. 오늘도 찾아왔었어요. 그런데 저희는 용역직원과는 협상하지 않을거에요."

 

소설가 유씨와 함께 이곳에서 생활하는 활동가들은 4명. 연탄난로만으로 혹한의 추위를 견디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자기 전 생수통에 뜨거운 물을 넣어서 안고 자요. 가장 힘든 건 추위인 것 같아요"라던 그는 "2011년에는 이 지루한 싸움이 끝나길 바란다" 덧붙이곤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지난 24일은 유씨 부부가 두리반을 지킨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1년 365일간 이어진 농성 1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막개발을 멈추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그동안 그들에게 '적'은 단지 건설업체만이 아니었다. 전기를 끊은 한전과 마포구청, 그리고 폭염과 혹한이 그들을 괴롭혔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그들에게 닥칠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투쟁은 계속된다.

 

이틀 전인 29일, 공항철도 홍대입구역은 운영을 시작했다.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까지만 연결되었던 공항철도가 서울역까지 연장개통 되던 날이었다. 공항철도의 개통은 사람들에게 '편리함'만 가져다주었을까?

 

공항철도 역사 설립 소식이 들려온 날은 소설가 유씨와 그의 아내에겐 외로운 생존권 싸움을 시작한 날이었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유씨 부부 곁에는 홍대 인디뮤지션과 활동가들, 그리고 어디선가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사실 음악 하는 사람들은요,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관심들이 별로 없어요. 저 같은 사람들을 이 자리에 불러냈다는 거는… 뭔가 굉장히 많이 잘못됐다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하이미스터메모리' 가수 박기혁 - MBC <후플러스> '쫓겨난 이들의 슬픈 축제' 중에서)

 


태그:#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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