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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기행 일곱째 날(8월 18일), 오전 9시 단둥에 도착한 우리는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압록강을 탐방하고, 북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여종업원들이 펼치는 가무(歌舞)를 감상했다.

 단둥시내에 있는 ‘한국인교육문화원’, 단둥은 다른 도시에 비해 자녀교육 열기가 높다고 합니다.
 단둥시내에 있는 ‘한국인교육문화원’, 단둥은 다른 도시에 비해 자녀교육 열기가 높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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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식당에서 나와 항일역사 문화 사진전이 열리는 '한국인교육문화원'으로 향했다. 북한 여성들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등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는데도 헤어지려니까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만주에 이레를 머물면서 북한·중국 접경지역을 둘러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중·러 국경지역 훈춘·방천에서도 그랬고, 두만강 지역 도문에서도, 백두산에서도, 압록강 단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이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보였던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항일 독립투사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한국인교육문화원'

 중국 단둥시 ‘한국인교육문화원’에 전시된 고종황제 아들 의친왕 이강 사진.
 중국 단둥시 ‘한국인교육문화원’에 전시된 고종황제 아들 의친왕 이강 사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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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교육문화원'에 도착하니까 독립군들의 항일투쟁 활동과 가슴 아픈 역사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고종황제의 중국 망명 좌절'과 1919년 11월 민족지도자 안창호 선생, 이회영 선생, 동농 김가진 선생 등이 추진했던 '의친왕(이강) 상해 망명 좌절 사건'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단둥 역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망명이 좌절된 의친왕이 임시정부로 보낸 편지에서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라는 대목은 가슴을 아리게 했다. 

우리는 독립투사들이 만주를 거점으로 벌이는 주요 활동과 일본군의 만행이 담긴 영상물도 감상했다. 선구자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나왔는데 그동안 다녔던 항일역사 유적지가 하나씩 떠올랐다. 영상물이 상영되는 동안 침묵이 흘렀으나 작은 소리로 일송정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일행도 있었다.

영상물 감상이 끝나고 항일독립투쟁사 자료를 수년에 걸쳐 수집해서 전시해오고 있는 최범산 작가(소설가)에게 설명을 들었다. 최 작가는 영상을 토대로 독립투사들이 어떻게 살았고, 투쟁해왔는지 등을 설명했다.

 이데올로기 문제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군들의 항일 투쟁사를 설명하는 이범산 작가
 이데올로기 문제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군들의 항일 투쟁사를 설명하는 이범산 작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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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압록강을 넘나들며 독립군을 양성했고, 일본경찰에 붙잡혀 사형당했던 이진룡 장군과 부인 우씨 의열비,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오동진 장군, 양세동 장군 유적지 등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자료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독립투사들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피를 흘리며 싸웠던 땅에 다녀오신 것입니다. 일군을 상대로 전투했던 지역. 단둥에서 용정까지 한국의 '리(里)'로 따지면 9천 리로, 3,000km가 넘는 거리를 여러분은 차를 타고 다니셨지만, 독립투사들은 비 오고 눈보라 치는 속에서 솥에 밥을 해먹으면서 걸어 다녔어요.

이회영 선생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는 농지와 가옥 등 전 재산(지금의 6백억 원에 해당)을 팔아 '신흥무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를 세우고, 이곳(만주)에서 풍찬노숙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요. 그들이 압록강을 건넌지 35년 뒤 해방(1945년)이 되었으나 다섯 분은 돌아가시고 고국 땅을 밟은 이는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한 분뿐이었습니다···."

최 작가는 "중국은 '독립투사' 대신 '항일영웅', '항일명장', '열사' 칭호를 붙이고, '청산리 전투 기념관'도 '항일역사 기념관'이라고 한다"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안중근 의사 무덤을 찾지 못해 안타깝다"며 중국 드라마의 60% 정도는 일본과 싸웠던 역사적인 내용들이라고 전했다.  

항일 독립투사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전시실에는 안중근 의사, 봉오동 전투, 독립투쟁 사상 최대의 전투로 꼽히는 청산리 전투 등에 대한 자료도 전시되고 있어 그동안 보고 들었던 내용을 복습하는 기분이 들었다. 최 작가는 '단둥시건강교육소(丹東市健康敎育所)' 건물은 예전 독립군 아지트였다고 설명해주었다. 

한국의 70년대 수준의 '단둥-심양' 고속도로

독립군 아지트였던 건물을 둘러보고 나오니까 오후 3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곧바로 버스에 올라 심양(선양)으로 출발했다. 단둥에서 심양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는데 3시간30분-4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단둥-심양 고속도로 풍경. 공사 중인 곳이 많아 자주 막히고, 통행료 수납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단둥-심양 고속도로 풍경. 공사 중인 곳이 많아 자주 막히고, 통행료 수납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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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에서 바라본 단둥-심양 고속도로 주변 농촌 풍경
 버스에서 바라본 단둥-심양 고속도로 주변 농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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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심양'간 고속도로는 무척 복잡하고 좁아서 호남고속도로가 2차선이던 한국의 70년대 고속도로 풍경을 떠오르게 했고, 휴게소는 이용객이 없어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길게 뻗은 산줄기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우리의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르렀다.

들녘에는 옥수수와 벼들이 바람에 한들거리며 익어가고 있었다. 하우스 재배도 하는 모양이었다. 농촌에서는 한국과 중국 달구지를 함께 사용하는데, 한국 달구지는 자그만 물건을 운반할 때 좋고, 칸막이가 없는 중국 달구지는 곡식을 차곡차곡 많이 실을 수 있어 곡식을 수확할 때 사용한다고. 

창으로 스쳐 가는 시골 풍경은 우리와 별로 다를 게 없었는데, 물기를 머금은 풀과 나무들이 더욱 기운차고 생동감 있게 보였다. 만주지방을 상징하는 붉은 벽돌집들도 저녁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활기 넘치는 심양의 '중산광장'

오후 3시 단둥에서 출발한 버스는 저녁 7시 10분 심양에 도착했다. 만주기행 첫날(12일) 심양에 도착해서 '9·18기념관'을 둘러보고 연길(옌지)행 기차 시간에 쫓겨 다음으로 미뤘던 옛 '봉천경찰서'와 모택동 동상이 서 있는 '중산광장'으로 향했다.

 심양 중산광장. 단체로 태극권을 하고 있는데요.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부러울 정도로 활기가 넘쳤습니다.(왼쪽 건물은 옛 봉천경찰서)
 심양 중산광장. 단체로 태극권을 하고 있는데요.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부러울 정도로 활기가 넘쳤습니다.(왼쪽 건물은 옛 봉천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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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건물로 둘러싸인 중산광장의 야경은 한마디로 아름다웠다. 오른손을 번쩍 들고 있는 모택동(마오쩌둥) 동상은 1969년에 세워졌으며(높이 10m) 하부 4면에 중국 공산당 정권쟁취와 신중국 탄생을 기념하는 군상(群像)이 조각돼 있었다.

단둥(丹東)역 앞에서도 비슷한 크기의 모택동 동상을 봤지만 중산광장의 동상은 규모가 대단했다. 동상 주변 부조물은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택동을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불빛에 반사된 봉천경찰서 건물을 보니까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불심검문을 하는 일경에게 영문도 모르고 봉천경찰서 지하실로 끌려가 말채찍으로 맞는 등 고초를 당했던 얘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경찰을 무척 싫어하셨다.

붉은 불빛이 환하게 비추는 광장에는 편히 앉아서 쉬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하얀 도복을 입고 태극권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수준이 보통은 넘어 보였다. 짝지어 댄스강습을 받는 노인들에게서는 삶의 여유가 넘쳐났다.

저녁밥은 300년 전통을 자랑한다는 '로변교자점(老邊餃子館)'에서 만두로 대신했는데, 다양한 모양의 만두와 중국 특유의 향이 눈과 코를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후식으로 나온 두부 요리와 계란말이 무침, 강냉이샐러드 등은 처음 맛보는 별미였으며 입안에 남은 느끼함을 제거해주었다. 

만두를 맛있게 먹고 호텔로 향했다. 밤 9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나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했다. 호텔에 들어서면서 이튿날(19일) 이맘때면 집에 가 있을 거로 생각하니까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린 시간이 밉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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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