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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세부에서의 첫 하루가 저문다. 숙소 창가서 보는 파란 하늘 위로 적포도주색 노을이 사납게 퍼진다. 이곳 풍경과 냄새는 도시의 망령이 갓 당도한 한국의 시골과도 비슷하다. 사람을 품은 원시의 자연은 난폭한 손에 잡아뜯긴 듯 파헤쳐졌다. 투명하고 달큼한 바람 속엔 콘크리트 먼짓가루가 서걱서걱 씹힌다. 

아침엔 어디선가 닭이 울었고 장작을 태워 밥 짓는 냄새도 났다. 환전을 위해 오전 9시 좀 넘은 시각 숙소를 나섰다. 색바랜 옷을 걸친 피부가 까만 사람들이 그보다 더 낡은 차를 타고 어딘가로 바삐 갔다. 대로변의 집과 식당 대부분은 (미안하지만) 정말 불결해 보였다. 하지만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알라딘의 램프 요정이 옮겨놓은 듯한 거대 쇼핑몰이 있었다.

숙소 창가에서 보는 풍경
 숙소 창가에서 보는 풍경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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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최대규모인 'SM(에스엠)'몰 다음으로 꼽히는 'AYALA(아얄라)'몰이다. 개장 전 30여 분 동안 길거리 테이크아웃에서 커피와 햄버거를 먹었다. 그 사이 세부아노(세부섬 방언) 인사말을 연습했다. "마아용 분딱(좋은 아침)!" 필리핀을 영어권 국가로 분류하지만 이곳의 표준어는 '따갈로그어'다. 그 외에도 세부아노 등 100여 개의 방언이 있다.

오전 10시 정각 문이 열리고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경호원의 소지품 검사와 검색대를 통과해 입장했다. 내 가방도 마찬가지. 우리나라 '불심검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지는 모르겠다. 다만 필리핀을 다녀온 지인들이 '살벌함의 상징'처럼 언급했던 진짜 총을 든 경호원들이 내겐 되레 든든했다. 

달러를 페소로 환전하고, 어학원이 있는 바클로드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장을 보는 데 두 시간 걸렸다. 경비 절감을 위해 식빵, 잼, 주스 등 숙소에서 먹을 사흘치 먹을거리도 샀다. 짬짬이 공부한 영어회화들을 유용하게 썼다. 화석이었던 언어가 생명을 얻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즐거운 감각이고 경험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웬 현지인 남성이 한국말로 "사랑해"라고 했다. 남창(男唱)인지 아님 어제 비행기에서 추태를 보인 한국인과 같은 부류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변태를 대하는 최선의 자세는 역시 투명인간 취급이다. 어디나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허비하는 이들이 있다. 

세부 관광지도를 살까 했지만 모르면 모르는대로 다니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정해진 길을 걷는 건 일상에서만도 충분하다. 내일은 근처 바다를 찾아가 볼까? "지상 최대의 낙원"이라 말하지만 실은 비참한 현실이 공존하는 이곳의 관광지들.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이곳의 '진짜' 보석을 발견하고 싶다.   

세부시티 '도교사원'
 세부시티 '도교사원'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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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6일

AM 4:23(현지시각) 잠에서 깨 샤워를 했다. 에어컨을 끄고 잤더니 온몸이 땀으로 끈적했다. 한국에서 달고온 감기가 떨어지질 않는다. 어제 오후부터 비상약을 먹기 시작했다. 더운 나라에 온다고 감기약을 충분히 준비하라던 조언을 무시한 건 잘못이었다. 손에 난 상처에 바를 연고도 깜빡했다. 생채기가 자꾸 벌어진다. 

멀리서 어렴풋이 종으로 연주한 캐럴이 흐른다. 12월에 섭씨 30도를 웃도는 날씨지만 이곳은 지금 크리스마스 축제가 한창이다. 간밤엔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현지 모 회사 사원들의 성탄절 파티를 열었다. 신나는 음악 속에 간간히 함성소리가 섞였다. 안 그런 척 했지만 예전부터 파티 문화를 동경해왔다.

어두운 밤 이국의 땅에서 잠을 깨고 보니 인터넷은커녕 음악도 술도 없던 옛날옛적이 궁금해진다. 나 같은 영혼을 가진 선조들은 잠 안 오는 깊은 밤 무엇으로 위안했을까? 짐작하기로 달랠 길 없는 고독이 인간으로 하여금 철학을, 음악을, 술을 창조하게 했을 것 같다. 마주앉은 노트북이 정겹다. 어느새 캐럴이 멈추고 부지런한 닭과 개들이 아침을 알리고 있다.

PM 8:10 기침과 더위로 너무 일찍 일어나 심신이 피곤하다. 사다둔 식빵에 햄 스프레드를 발라 물과 함께 먹고 졸기를 몇 번, 나태가 머리에 붙은 거미줄처럼 성가셨다.

한 번 더 세수를 하고 얼굴과 목 골고루 선크림을 바른 뒤 오전 9시경 숙소를 나섰다. 첫 목적지는 도교사원(Taoist Temple). 세부에 거주하는 중국민들의 상징이란다. 택시를 타고 너무 쉽게 도착한 탓인지 제법 웅장함에도 별 감흥이 안 일었다. 사원 마당에서 내려보는 도시 전경이 시원할 뿐이었다.  

절마당에서 줄곧 아이와 남편만을 카메라에 담던 여인과 눈이 마주쳐 가족사진을 촬영해줬다. 그리고 주차장 방향으로 나와 아랫길로 내려가니 샤오린이란 사람이 쿵후를 가르치는 또 다른 중국사찰이 나왔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없었다.

도교사원 주차장 방향으로 나와 아랫길로 내려오면 만나는 'DONA M. GAISANO STREET'의 빈민가
 도교사원 주차장 방향으로 나와 아랫길로 내려오면 만나는 'DONA M. GAISANO STREET'의 빈민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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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니(짚차를 개조해 만든 미니버스)와 오토바이가 내뿜는 매연을 들이키며 평지에 다다랐을 때 현지 서민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DONS M. GAISANO' 거리의 빈민가였다. 골목길 사이로 탁한 하천이 흐르고 슬레이트와 벽돌로 만든 판잣집 곳곳에 빨래가 널렸다. 길거리를 서성이는 개와 고양이도 지독하게 말랐다. 

대로변 양옆 인도에는 예전 우리네 시골 '점빵' 같은 작은 가게들이 즐비했다. 한 평 남짓한 공간 안에 불량식품류의 과자와 음료, 담배, 집에서 만든 음식들을 냄비에 담아 팔았다. 어떤 곳은 견디기 힘든 역겨운 냄새가 났다. 하지만 젊고 단아한 인상의 여종업원이 있던 가게의 5센타보 빵은 무지 맛있었다.

사람도 짐승도 굶주리는 땅 위에 하나님의 성전만이 휘황찬란하다….
 사람도 짐승도 굶주리는 땅 위에 하나님의 성전만이 휘황찬란하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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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다 먹었을 때쯤 길 맞은편에 거대한 흰색 건물이 보였다. 주변의 탁하고 낮은 풍경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교회였다. 입장은 무료지만 겉에서만 관람할 수 있고 내부 입장은 불가했다. 뭇생명이 굶주리는 땅에서마저 하나님의 성전은 왜그리도 휘황찬란한지……. 신이 아니라 신의 뜻을 곡해한 인간들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맨살로 햇살을 견디기 힘들 즈음 육중한 가로수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다는 현지인들을 만났다. 아무리 누추한 곳이라도 성탄절을 기리는 장식 하나쯤은 붙어 있다. 필리핀 전 국민 중 가톨릭 신자가 85%에 이르는 사실을 알면 그리 의아한 일도 아니다. 하여튼 축하할 일이 있다는 건 희망과도 같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날씨지만 이곳은 지금 크리스마스 축제가 한창이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날씨지만 이곳은 지금 크리스마스 축제가 한창이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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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클론시장(Colon Market)에 갈 참이었다. 하지만 행인들이 알려준 방향대로 걸었더니 뜻밖에 숙소 앞이었다. 더 갈까도 했지만 '집'이 지척인 이상 그만 햇빛을 피하고 싶어졌다. 그 길로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짧은 낮잠을 잤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 세부시티의 야경 명소로 유명한 탑스(Top's)에 다녀왔다. 어제 들른 아얄라몰에서 30여분 가량 소요됐다. 인적이 드문 산길을 따라 그 정상까지 가야 하므로 차량 이용이 불가피했다. 차비는 왕복 700페소(100페소 깎았다), 입장료 100페소는 본인 부담이다. 

노을질 때 도착하려 했으나 출발이 늦었다. 사방은 깜깜했고, 축구공 모양의 광장 끝에 펼쳐진 야경은 기대 이하였다. 왕년에 야경좀 봤다 하는 이들은 실망할 게 거의 자명하다. 부산의 광안대교나 서울 남산타워 야경이 몇 배로 근사하다. 하지만 꼭 한번 직접 보고 싶다면 반드시 해 지기 전에 올 것을 권한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오니 동네 일대가 정전이었다. 낮에 코코넛 음료를 나눠마신 경호원이 언제 복구될 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현관이 환해졌다. 운이 좋다고 했다. 내일은 오늘 가려다 만 클론시장에 갈 것이다. 

오늘 새롭게 안 것 : 1. 세부시티 대표 관광장소 중 하나이며 한국에서 '춤추는 교도소'로 유명해진 CPDR은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에만 개방한다. 보고싶거든 일정을 맞춰 와야겠다. 2. '지포니'라고 하는 현지인들이 애용하는 교통수단은 짚프(Jeep)와 조랑말(Pony)의 합성어로 필리핀을 통치했던 미군들의 차량을 개조, 이용한 게 시초였다. 3. 서너 시쯤 골목길에서 들리는 종소리는 청소 차량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세부시티에서 야경으로 이름난 '탑스(Top's)'. 빛나는 지평선 아래 풍경은 직접 떠나는 자의 몫.
 세부시티에서 야경으로 이름난 '탑스(Top's)'. 빛나는 지평선 아래 풍경은 직접 떠나는 자의 몫.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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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twitter ID : sindart77



태그:#세부시티, #탑스, #AYALA, #SM, #공정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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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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