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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배추밭(2009)' 앞에서 윤향란작가. 현재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총 10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작품 '배추밭(2009)' 앞에서 윤향란작가. 현재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총 10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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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학고재(대표 우찬규)신관에서 홍익대 회화과와 파리국립미술학교(ENSBA)를 졸업하고 파리에서 25년간 살면서 작업을 해온 재불작가 윤향란(1960~)의 배추전이 12월 31일까지 열린다.

이 작가의 첫인상은 외유내강이라고 할까.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수하고 소박한 심성을 지닌 사람, 작업에만 몰입하는 속이 꽉 찬 작가라는 인상을 준다. 그의 작품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그 속에서 심상치 않은 그만의 재능과 열정이 엿보인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같은 배추의 재발견

'배추밭'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200×300cm 2009
 '배추밭'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200×300cm 2009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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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23살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그런데 김치가 얼마나 먹고 싶은지 슈퍼마켓에서 배추 비슷한 것을 봐도 집 생각이 나고 고국이 그립고 어머니가 담가준 김치생각에 눈물이 나곤 했단다. 맛있는 김치는 아무나 담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도 생겨나고, 그런 간절한 사무침 속에서 배추이파리 하나의 아찔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단다.

작업노트에서도 그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예술가는 피카소도 반 고흐도 아닌 바로 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우리 어머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김치의 독특하고 오묘한 맛을 빠질 때마다 나는 한국인이 것이 무척 행복하다, 한국의 정서가 듬뿍 배여 있는 배추, 나는 그런 그림을 그리면서 속을 푼다"고 술회한다.

프랑스 교수의 지적에서 얻은 깨달음

'배추'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130×97cm 2010. 캔버스 위에 종이를 배접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배추'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130×97cm 2010. 캔버스 위에 종이를 배접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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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일화를 들려준다. 각자 작품을 발표하는 수업시간이 있었는데 작가도 나름대로 80년대라 바스키아, 콩바 등 당시화풍으로 열심히 그렸건만 교수의 반응은 의외였단다. "왜 네 나라에도 좋은 게 많은데 하필이면 남의 것을 따라 그리는가!"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잘 그릴 수 있는 한국적인 것을 소재로 삼았단다.

이 작가에게 김치가 역시 가장 절박하게 다가오는 것이라 이를 빼놓고 다른 것을 그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도자기도 잠시 시도해 봤지만 역시 배추보다 못했나 보다. 그런데 이런 그림을 서구인에게도 이해시키고 감동을 주려면 콜라주(붙이기)나 데콜라주(뜯어내기) 등 서양기법도 도입하는 등 현대예술의 옷을 입혀야 했으리라.

삶의 격랑 같은 기운생동 느껴져

'배추밭'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130×162cm 2007. 자유로운 선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걸며 작가자신의 내면을 표현한다
 '배추밭'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130×162cm 2007. 자유로운 선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걸며 작가자신의 내면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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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보는 그의 배추그림은 험한 인생의 바다에서 격랑의 파도가 치는 것 같다. 또한 현대성으로 번역하는 와중에도 그의 작품에선 겸재의 산수가 보여준 꿈틀대는 자연풍광이 느껴진다. 계곡의 폭포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것 같고, 기암괴석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분위기다. 우리는 여기서 그만이 주는 그림의 위력을 맛볼 수 있다.

배추가 우리의 일상과 너무 밀착되어 있다 보니 그 아름다움을 놓치는 건 어쩌면 당연일이다. 그러나 작가는 유학생활에서 체감하는 배추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것이고 이국에서 그 맵고 황홀한 맛을 잊지 못해 더 사로잡혔을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 배추그림을 그릴 땐 김치를 정성스럽게 담그는 심정으로 한단다.

현대미술로 끌어올린 배추그림

'배추'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60×120cm(상) 50×100cm 2009. 그의 배추그림을 처음 본 건 2005년 환기미술관에서다. 지금 배추그림은 선 작업이 합쳐져 더 풍성하다
 '배추'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60×120cm(상) 50×100cm 2009. 그의 배추그림을 처음 본 건 2005년 환기미술관에서다. 지금 배추그림은 선 작업이 합쳐져 더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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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화풍은 서구적인 것을 밑바탕에 깔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적이다. '기화신령'의 붓질이라고 할까. 이 말은 원래 동학에서 온 것이다. 기(氣)는 생명이 소통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에너지를 말하고, 신(神)은 인간이 가진 예술적 상상력과 창조력의 최대한 발현을 뜻하리라. 예술의 본질이 생명의 창조에 있다면 그런 점에서 상통한다.

역시 배추그림은 한국작가가 세계에서 가장 잘 그리지 않을까. 학고재 성가영 큐레이터의 말에 따르면 마침 G20 행사에 참가한 세계무역기구(WTO) 라미 사무총장이 이곳 화랑 가를 들렀다가 우연히 윤 작가의 전시를 보고 "이거 김치에 쓰이는 배추그림 맞죠? 참 멋지네요!"라고 찬탄했단다.

'산책'은 작가로서 걸어온 여정의 흔적

'산책' 한지에 파스텔 각각 48×38cm 2009
 '산책' 한지에 파스텔 각각 48×38c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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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한지에 파스텔 48×38cm 2009
 '산책' 한지에 파스텔 48×38c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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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산책'은 선으로 그린 드로잉작품으로 25여년 이상 작가로서 몰두해온 그의 인생여정을 보여준다. 자유분방한 선들이 제멋에 겨워 소용돌이치듯 춤춘다. 이런 작품은 더 나은 작품을 그리기 위해 거치는 밑그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립적으로 완성된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배추라는 대상에 새로운 활기를 주며 순간적으로 화폭에 옮겨 담는다고 할까. 그렇게 섬세하고 다양한 선이 주는 리듬과 율동감은 찬연하다. 거기서 나오는 기운생동의 위력도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한국적인 선의 멋을 선물한다.

속살까지 활활 불타는 배추의 황홀경

'배추'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60×120cm 2009. 배추속의 노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색이다
 '배추' 캔버스에 파스텔과 종이 60×120cm 2009. 배추속의 노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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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노란 바탕에 붉은 배추를 보니 어려서 12월쯤에 동네아줌마들이 한데모여 김장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배춧속에 있는 먹음직스럽던 노란 애기배추가 떠오른다. 그 배춧속 노란빛에 얼마나 황홀하고 그 맛이 고소했던지 위 작품을 보니 다시 생각난다.

그의 배추그림은 음양의 조화처럼 변화무쌍하면서도 고요하다. 동시에 배추들이 정말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한해를 보내는 우리의 아쉬움도 일상에서 맛보는 고단함도 한꺼번에 다 훨훨 태워버릴 것 같다.

마음에 상처가 된 체류용 서류도 작품 되다

'붓놀이' 종이에 아크릴물감 각각 30×21cm 2010. 이 연작은 프랑스체류에 필요한 공과금영수증 위에 붓으로 그린 것이다
 '붓놀이' 종이에 아크릴물감 각각 30×21cm 2010. 이 연작은 프랑스체류에 필요한 공과금영수증 위에 붓으로 그린 것이다
ⓒ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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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작가의 삶과 아주 밀착된 연작을 더 소개한다. 작가는 프랑스에 체류하기 위해 고지서, 세금영수증, 작가등록증, 의료보험 등 서류를 매년 그곳 경찰국에 제출해야 하는데 이것이 많이 번거롭고 큰 압박이 되어 엄청난 트라우마(상흔)를 주었단다.

그런데 작가는 역시 작가다. 그렇게 부담이 되는 폐지나 다름없는 종이뭉치를 버리지 않고 모아 뒀다가 그 위에 신나게 낙서를 하듯 마음껏 붓을 휘갈겼다. 그 작업을 통해 작가는 그동안 쌓였던 불안감이나 초조함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짜릿한 해방감을 맛봤으리라.

이렇듯 작가는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마저도 예술로 탄생시켰다. 참으로 신선한 발상이다. 프랑스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사부아르 비브르(savoir vivre, 삶을 멋지게 슬기롭게 살 줄 아는 기술)'에서 작가가 한 수 배운 것일까.

덧붙이는 글 | 학고재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77번지 www.hakgojae.com

학고재(본관)에서는 역시 12월 31일까지 중국 아방가르드 2세대의 대표적 작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장환(Zhang Huan 1965~)의 전이 열린다. 그는 자신의 몸을 태워 희생하는 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보고 이를 재료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도 구입했고 미국클린턴무장관도 소장하고 있다



태그:#윤향란, #배추그림,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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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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