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루쉰, 선생은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했다
▲ 리영희선생초상-박생광식으로바라보기 루쉰, 선생은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했다
ⓒ 김은곤

관련사진보기


난 부산 기장 해변에서 그림을 업으로 알고 살아가는 화가다. 내게 청춘의 기억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최루탄 냄새, 백골단, 입시지옥, 어지러운 사회, 주머니의 궁핍함… 내게 청춘은 끝도 없는 길고 긴 터널같은 시간이었다. 난 그때 입시에 실패했고 지금도 고졸이다.

당시 대학생에 대한 묘한 반감도 있었다. 그들이 왜 비싼 등록금을 내고 군홧발에 채여가며 거리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일말의 적개심도 일었다. 그 때의 나는 박정희의 죽음에 버스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대성 통곡을 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군대 영장을 받고 술에 찌들어 살던 내게 문학하던 선배가 던져 준 김수영 전집과 <우상과 이성>. 책을 읽은 나는 쇠망치로 뒷머리를 가격당한 느낌이었고 잠도 잘 수 없었다. 1985~87년 서릿발같은 엄혹함 속에서의 군대 생활 중 숨어서 읽던 사회과학 도서들은 날 영창도 살게 했지만 내겐 꿀물처럼 달았다. 그렇게 선생은 내게 다가왔다. 꿀물 아니 감로수였고 빛이었다.

민화 형식을 빌어 그렸다
▲ 리영희 선생 초상 민화 형식을 빌어 그렸다
ⓒ 김은곤

관련사진보기


세월이 흘러 난 화가가 되었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청도로, 지리산으로, 의정부로, 경기 구리로… 2006년 구리 동구릉에서 산 지키는 비정규직으로 월 90만 원을 받으며 행복해하던 시절, 문득 겨울 아침 세수를 하다 여기 서울 가까이 왔는데 리영희 선생을 뵈러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민미협(민족미술인협회) 선배에게 물어 물어 알아낸 전화로 통화하니, 선생은 낯선자의 방문을 허락치 않았다. 몇 번의 간곡한 부탁 끝에 드디어 선생님 댁을 방문하게 된 전날, 난 잠도 잘 수 없었다.

아파트 입구에 걸린 문패
▲ 리영희 선생댁 문패 아파트 입구에 걸린 문패
ⓒ 김은곤

관련사진보기


아파트 입구에서 사십이 넘고 머리가 반 백인 내가 그 겨울 얼마나 떨었던지…심장이 뛰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 같았다. 선생은 이미 뇌출혈로 한 번 쓰러진 상태였고, 오른쪽 수족을 잘 못쓰셨다. 집필은 물론 사회 활동 모두를 정리하신 상태였다. 그렇게 선생은 내게 다시 다가왔다. 편안한 촌로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렇게 1년이 넘게 산본에 있는 집을 드나들었다. 행복했다. 선생의 손을 만질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리고 다시 난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고 선생을 잊고 살았다. 아니 다시 가야지 하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어 왔다.

선생은 이제 없다. 내 청춘의 시간에 따뜻한 빛을 내려주신 님이여 이제 편히 쉬소서… 제 인생의 영원한 한 분, 선생님 감사합니다.

따뜻한 봄날 서재에서 삼매경에 빠진 모습이다.
▲ 리영희- 독서 따뜻한 봄날 서재에서 삼매경에 빠진 모습이다.
ⓒ 김은곤

관련사진보기



태그:#리영희, #김은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