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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토)


어젯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부산시 용호동에서 하루를 묵었다. 어제 저녁 컨테이너 터미널 앞길을 지나오면서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탓이다. 이곳이 용호동이라는 건 오늘 아침 지도를 확인하다 겨우 알아낸 사실이다.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에는 유명 관광지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해수욕장들이 연이어 나타난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용호동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이 바로 광안리해수욕장이다. 해변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광활하다 싶은 해수욕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사장만 1.4km다. 해안선이 발달한 나라답게, 해수욕장 규모 또한 범상치 않다. 해수욕장이 얼마나 광활하면 그 이름에 '광'자를 집어넣었겠는가? 그런데 부산에는 이런 해수욕장이 이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해수욕장 규모로 놓고 봤을 때 부산 같은 도시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이렇게 해수욕장이 많은 곳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부산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해수욕장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고도 남는다. 다대포, 송도, 광안리, 해운대, 송정… 등 백사장이 모두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이 비좁다 싶을 만큼 넓다.

모양새만 해수욕장인 곳은 하나도 없다. 바닷가 풍경이 아름답기로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 해수욕장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산은 서울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도시임에 틀림없다. 근처에 광안리해수욕장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복인데, 멀지 않은 곳에 해운대해수욕장까지 있다.

광안리해수욕장
 광안리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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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새 명물 광안대교. 광안대교 너머로 보이는 것은 마린시티에 신축중인 건물들.
 부산의 새 명물 광안대교. 광안대교 너머로 보이는 것은 마린시티에 신축중인 건물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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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질문 방식이 참 묘하다

해운대는 우리나라에서 여름이면 해수욕객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곳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이다. 매년 '언제' 관광객 백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뉴스 한 꼭지를 차지하곤 한다. 마침 주말이어서 해운대 백사장으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연인들은 물론이고, 유치원에서까지 아이들을 집단으로 데리고 온 걸 보면 전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관광지임에 틀림없다.

해운대를 떠나려다 주차장 앞에서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 얼굴에 호기심이 잔뜩 묻어난다. 남들이 모두 자동차를 끌고 온 마당에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곧 질문 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의 질문 방식이, 이전에 내게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하고는 조금 다르다. 이전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극히 기초적인 질문을 해왔다면, 이 사람은 그래도 뭘 좀 알고 덤벼드는 것 같다. '여행을 언제 시작했느냐?'는 질문에서 '잠은 어디서 자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더니, 즉석에서 내가 그동안 지출하는 돈이 얼마인지를 계산해낸다. 그러더니 다시 '그 돈을 다 어디서 충당하냐?'고 묻는다.

거 참, 틀린 계산도 아니고 그리 불쾌하게 생각할 질문도 아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언짢은 구석이 있다. 그 사람의 질문에 마치 내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독심안 같은 것이 숨어 있다. 거짓말하기가 뭐해서 내가 여행비를 어떻게 마련했는지 솔직히 얘기해 줬더니, 마치 자기 일처럼 근심스러워 하는 표정이다. '결혼은 했냐?'고 묻는 말이 결혼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냐는 말로 들린다. 참 묘한 분이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는,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대충 얼버무린다. 여럿이 같이 다니면 좋지만, 세상에 나 같은 놈이 어디 흔한가? 나도 가끔 내가 희한한 놈이다 싶을 때가 있는데, 세상에 나를 따라서 여행을 다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더 희한한 사람일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내 친구 중에 '그러면 내가 너보다 더 희한한 놈이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뭐 굳이 답할 필요도 없다.

친구들과 어울려 장기여행을 떠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작용이 너무 많다. 그래도 그가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여럿이 어울려 다니는 게 더 즐겁지 않느냐?'고 물을 때는, 그러면 지금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냐고 물으려다 그만둔다.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기회에 굳이 내 의견을 밝혀 두자면, 장기간 계속 되는 여행은 오랜 시간 외로움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혼자 다니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다.

이 양반도 나를 떠나보내는 게 꽤 아쉬운 표정이다. 아직 궁금증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속마음까지 바닥을 다 드러낸 상태다. 더 이상 들려줄 말이 없다. 개인적인 질문을 너무 많이 던져 불편하긴 했지만, 그 역시 자전거여행에 무척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조만간 그를 어딘가 한적한 길 위에서 다시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안해수욕장 가는 길의 해변 산책로
 광안해수욕장 가는 길의 해변 산책로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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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해수욕장
 해운대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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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해도 끝없이 계속되는 펑크 수리

해운대해수욕장을 떠나서는 바로 달맞이길로 방향을 잡는다. 달맞이길은 예전부터 부산의 드라이브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이 길이 지금은 자전거동호인들이 많이 찾은 여행 코스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부산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전거인들이 달맞이길 입구에서부터 심심찮게 눈에 띄기 시작한다. 다들 어디에 숨어 있다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알록달록 유니폼을 갖춰 입은 동호인들이 줄을 지어 달맞이길 언덕을 올라가고 내려온다. 달맞이길은 지레짐작했던 것보다는 경사가 낮은 편이다. 호흡만 잘 조절하면, 큰 힘 들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오가는 차량이 비교적 적은 편이고, 주변 경치도 아름답다. 달맞이길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근력을 키우기에 딱 좋은 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달맞이길을 내려가는 길에 오른쪽으로 자전거 판매대리점이 눈에 들어온다. 매장 주인이 매장 앞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펑크를 수리하고 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곳을 떠나면 앞으로 어디에서 자전거를 손볼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다. 사장이 젊은 사람인데, 솜씨가 꽤 좋아 보인다. 그가 펑크 수리를 마치기를 기다려, 내 자전거를 들이민다.

브레이크가 어떻고, 펑크가 어떻고 하는 얘기를 숨 쉴 틈 없이 들려줬더니 자전거를 꼼꼼히 살펴본다. 우선 브레이크다. 브레이크는 내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물건이다. 지금까지 4000km를 넘게 달렸는데 브레이크에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1000km 가량을 더 달려야 하고, 나중에 진부령을 넘어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어 보통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가능하면 패드를 교체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쳐보지만, 별문제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다음에는 앞바퀴를 살핀다. 앞바퀴는 내가 펑크를 수리한 곳 외에도 한 군데 더 펑크가 나 있다. 펑크 수리를 하기는 했는데 다른 곳에 펑크가 난 것까지는 마저 찾아내지 못했던 거다. 이걸로 몇 번째 펑크를 수리하는 건지 이제는 셀 수도 없게 됐다. 브레이크에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하고 펑크마저 말끔히 수리하고 나니까, 마음이 더없이 개운하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계속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다.

매장 주인이 나이가 젊은 사람이다. 매장 문을 연 지 이제 겨우 3개월 됐단다. 자전거를 수리하는 솜씨가 아주 깔끔하다. 내가 지금까지 여행한 이야기를 듣고는 꽤 흥미를 보인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나중에라도 읽어보고 싶다고 해서 제목을 가르쳐준다. 그리고는 그의 매장에서 바람막이 점퍼를 한 장 구입한다. 아무래도 다가오는 추위가 자꾸 신경이 쓰인다.

자전거매장 뒤로 바로 송정해수욕장이다. 송정해수욕장 역시 부산다운 면모를 갖췄다. 앞서 지나쳐온 해수욕장들과 다른 점을 든다면 도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광안리나 해운대와는 달리 한적한 정취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옛날 분위기가 남아 있는 느낌이다.

송정해수욕장
 송정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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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사 가는 길의 해안 풍경. 포근한 정취가 느껴지는 갯바위
 용궁사 가는 길의 해안 풍경. 포근한 정취가 느껴지는 갯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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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내 간절한 소망을 날려 보내다

송정해수욕장을 떠난 이후로는 대체로 평탄한 길이다. 용궁사에서 대변항을 지나 임랑해수욕장까지 달려가는데 힘들었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물론 그렇게 힘이 들지 않았던 데는 중간 중간 쉬어가는 일이 빈번했던 이유도 있다. 해안을 따라 가는 길에 나타나는 주변 풍경이 그냥 지나치기 힘들게 아름답다.

서해나 남해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서해에서는 갯고랑 깊이 파인 갯벌이, 그리고 남해에서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이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동해안에서는 바닷가 갯바위들이 끊임없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 바위들 대부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해변을 다채로운 모양으로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위들을 향해 먼 바다를 달려온 파도가 몸을 던진다. 하얗게 부서진다. 파도소리 또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리가 귀를 씻는 것처럼 시원하다. 맑고 경쾌하다. 이런 광경은 이곳 동해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동해만 하지는 못하다.

용궁사
 용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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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 소망우체통
 간절곶, 소망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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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랑해수욕장을 지나서 울산으로 접어든다. 울산 경계를 넘어서 간절곶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다. 간절곶은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다. 하지만 연말연시가 아닌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 바람에 주변 일대가 대규모 관광지로 변모했다.

'간절'곶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이곳에 간절한 소망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바닷가 언덕에 높이 5m, 2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우체통이 하나 우뚝 서 있다. 이름이 소망우체통이다. 무언가 간절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소망을 엽서에 적어 보낸다. 소망을 비는 일이 연말연시에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일 년 365일 계속되고 있다.

나 역시 간절한 소망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소망을 엽서에 적어 보내는 대신,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낸다. 그편이 훨씬 더 '간절'하다. 오늘은 온산읍으로 들어서 진하해수욕장에서 여행을 마친다.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해가 질 무렵의 동해 바닷가 풍경이 묘하게 아름답다. 하늘 한쪽 모서리가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고, 파도는 파란색 형광빛으로 반짝인다. 그런데 카메라로는 그 색감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부산을 경유하면서 여행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여전히 몸이 고되기는 하지만, 여행하는 '맛'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그 맛이 새로워지고 있어 또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늘 달린 거리는 62km, 총누적거리는 4078km다. 길도 좋은데 하루 종일 달린 거리가 62km에 불과한 것은 그만큼 여행 중에 어딘가에 머물렀다 가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하해수욕장
 진하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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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광안리해수욕장, #해운대해수욕장, #간절곶, #송도해수욕장, #진하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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