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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드라마 <근초고왕>.
 KBS1 드라마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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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드라마 <근초고왕> 주인공에 관한 기록인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에는 당시의 정치현상뿐만 아니라 자연현상에 관한 내용까지 담겨 있다. 예컨대, 근초고왕 23년 3월 1일(368.4.4)에는 달이 해를 가리는 현상인 일식이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기록은 근초고왕 시대를 포함해서 각 시대의 사료(역사학 자료)에서 빠짐없이 나타난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다. 고대의 역사서에는 정치·경제·사회 현상뿐만 아니라 홍수·가뭄·지진·우박 같은 자연현상은 물론이고 우주와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온갖 특이한 현상들이 폭넓게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신라 파사왕 21년 7월(100.8.23~9.20), 하늘의 새들이 우박에 맞아 죽었다.
- 백제 초고왕 40년 7월(205.8.3~9.1), 금성이 달을 범했다.
- 고구려 서천왕 19년 4월(288.5.18~6.15) 지방 태수가 바친 고래의 눈알에서 밤새도록 광채가 났다.
- 고구려 보장왕 7년 7월(648.7.26~8.23), 평양성에서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신생아들이 출생했다.
- 백제 의자왕 20년 2월(660.3.17~4.15), 사비성(부여)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서해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기본적으로 고구려·백제·신라 때에 작성된 사료들을 참고했다. <삼국사기>에 위와 같은 내용들이 기록된 것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사관(역사 편찬자)들이 그런 사료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사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자연현상과 우주현상을 꼼꼼히 기록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전까지의 한국 역사서는 기본적으로 그러했다. 

그런 역사서들을 읽다 보면, '옛날 사람들은 왜 자연현상과 우주현상까지 역사기록에 남겼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주로 정치·경제에 관한 내용만 기록된 <국사> 교과서에 친숙한 현대 한국인들로서는 온갖 '시시콜콜'한 사건들이 죄다 기록된 옛날 역사서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옛날 사람들이 일식 같은 자연현상을 역사에 기록한 것은, 과학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그런 현상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옛날 사람들이 현대인들에 비해 과학지식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자연현상을 세밀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다. 하늘의 새들이 우박에 맞아 죽었다는 따위의 내용을 기록한 것은, 과학지식 부족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나 우주현상까지도 역사에 상세히 기록해놓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기>. 사진 속의 <예기>는 현대 중국에서 간행된 것으로서, 북경의 국자감(국립대학)에 전시되어 있다.
 <예기>. 사진 속의 <예기>는 현대 중국에서 간행된 것으로서, 북경의 국자감(국립대학)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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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한 데에는 중요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 정치적 이유를, 한국·중국 등의 정치 매뉴얼이자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인 <예기>의 '월령'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월령(月令) 편이란 각각의 절기마다 군주가 해야 할 일을 상세히 제시한 것이다.

월령 편에 적힌 군주의 사무를 읽어 보면,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통치자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통치자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통치자는 '국민의 대표자'에 불과하다.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통치자는 '우주 만물의 관리자'였다. 하늘의 명령을 받아 우주 만물의 운행을 책임지는 관리자였던 것이다. 그런 인식을 보여주는 '월령' 편의 몇몇 구절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입춘이 있는) 이달에 하늘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땅의 기운은 위로 올라간다. 하늘과 땅이 화합하고 초목이 싹을 피우게 되면, 왕은 널리 농사를 짓도록 명령한다. …… 이 달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전쟁을 일으키면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다. …… 하늘의 법칙을 바꾸지 말아야 하며, 사람이 지켜야 할 법을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이달(음력 2월)에는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동물의 어린것을 기르며 고아들을 양육한다. …… 죄가 가벼운 자를 사면하여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수를 줄이도록 관리에게 명령한다."

"(음력 11월에는) 토목공사를 일으키지 않고 뚜껑을 함부로 열지 않고, 창고의 문을 열거나 대중을 동원하지 않으며, 단단히 해서 막도록 담당 관리에게 명령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옛날 군주들은 자신의 통치 스케줄을 우주의 시간표에 맞추는 한편, 자신의 통치행위로 인해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도 손상을 입지 않도록 했다. 국민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민주주의까지 챙기고, 국민의 복리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복리까지 챙긴 것이다.

그들은 만물의 기운이 생성하는 봄에는 농사를 장려하고 전쟁을 막는 한편, 어린 동식물과 고아와 죄인들을 보호했다. 조선시대에 춘분과 추분 사이의 기간 동안에 원칙상 사형집행을 금지한 것도, 이 기간에 생명을 죽이면 만물의 생성 기운을 침해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그들은 만물의 기운이 사그라지는 겨울에는 토목공사를 일으키거나 백성을 동원하지 않았다. 이때부터는 만물이 편히 쉬면서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위와 같이 고대 동아시아 군주들은 자기 자신을 '인간의 통치자'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관리자'로 인식했다. 성경 창세기 2장 15절(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에서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지구를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을 연상시키듯이, 동아시아 군주들도 스스로를 우주만물의 매니저로 인식했던 것이다.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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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우주만물의 매니저로 인식했기에, 고대 군주들은 인간현상뿐만 아니라 자연현상 및 우주현상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첨성대 같은 천문관측기구를 세운 데에는 그 같은 정치철학이 밑바탕에 흐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관들이 일식 같은 자연현상이나 금성의 위치 같은 우주현상까지 시시콜콜하게 다 기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산·강·들과 우주만물까지 정상적으로 운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군주의 정치적 책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아시아 군주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산·강·들과 우주까지도 자기 백성 즉 '유권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연과 우주에서 비정상적인 현상이 발생할 때마다 '내가 통치를 잘못 하고 있구나'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의 새들이 우박에 맞아 떨어지고 서해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할 때에 그들은 표가 떨어지는 소리, 지지율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군주들은 산이나 강이나 들 같은 자연현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국책사업을 세우기 전에 수천 번의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의 생산성을 위해서라면 강 하나쯤, 산 하나쯤은 파괴되어도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산이나 강이나 들도 다 자기 백성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것들에 영향을 주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수없이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삽을 번쩍 들기 전에, 그들은 그것이 자연과 우주에 미칠 영향까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늘을 우러러 정말 한 점 부끄럼도 없을 때에만, 그들은 삽 위에 한쪽 발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개발로 인해 자연의 순환, 우주의 순환이 훼방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과감히 삽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위신을 깎는 게 아니라 도리어 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의 인식은 '환경보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인간과 환경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일체였던 것이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친환경의 가치를 진보적인 사람들의 정신적 사치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친환경의 가치는 결코 진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동아시아 정치를 지배해온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산·강·들과 우주까지도 제 자식처럼 보듬는 것이 전통적인 동아시아 군주의 책임이었다.


태그:#근초고왕, #친환경, #예기, #사대강,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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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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