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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한 장면.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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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인가. 연말 모임에서 사회자가 퀴즈를 하나 냈다. 떡 하나를 두 사람에게 나눠주려고 하는데 둘 다 행복하도록 공정하게 나눠주는 방법은? 답은 '한 명이 나누게 하고, 다른 이는 나눈 떡을 먼저 고르게 하는 것'이란다.

먼저 나누는 사람은 자기가 남는 것을 가질 것이니 최선을 다해 똑같이 나눌 것이고, 먼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친구는 어떻게 나누든지 먼저 고를 것이기에 느긋하게 기다릴 것이고. 이렇게 시스템 자체가 저절로 모든 사람이 불만이 없어 모두가 행복해 하는 사회. 글쎄. 이런 공정한 사회가 현실적으로도 가능은 할까.

"그 놈의 남편이나 아들놈이 알긴 뭘 알아요"
2001년 쯤 인가. 오래 전 얘기다. 분당 오리역에 사진작업용 오피스텔이 있던 시절. 그날 오전 내내 암실 작업을 하다가 현상액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근처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리역 사거리에 있는 하나로마트 앞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며 서있는데 아줌마 한분이 양손에 배추를 가득 들고 서 계셨다. 안쓰럽기도 하고 나 혼자 빈손으로 가기도 뭐해서 아줌마의 한 쪽 손에 들린 배추를 들어주며 한마디 했다.

"제가 하나 들어 드릴게요. 김치 하시려나 봐요."
"고마워요. 일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김칫거리 좀 샀어요. 하루 종일 서서 일해 힘들어 죽겠는데 먹을 게 없어서요."
"힘든데도 이렇게 사가지고 가서 해주니 식구들이 좋아하시겠네요."

찻길을 다 건널 즈음 내 말을 들은 아줌마가 배추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하는 말.

"그 놈의 남편이나 아들놈이 알긴 뭘 알아요. 남의 집 일하며 죽을힘을 다해 밥을 해줘도 반찬투정까지 하고 있으니. 일도 힘들다고 그 덩치에 하루 종일 쳐 자고만 있어요. 글쎄. 파출부 일은 뭐 안 힘든가요? 저녁에 쌀이라도 씻어 놓으면 내가 말을 안 해요. 정말."

길은 벌써 아까 다 건너왔건만, 심각하게 나를 붙잡고 얘기를 하는 통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이번엔 배추를 사셨으니까 해 주시고 담엔 이 고생까지 해가며 해주지 마세요. 남자들은 말 안 하면 힘든 것 몰라요. 고마워하지도 않는데 절대로 해주지 마세요."

이렇게 대충 마무리를 해주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식구들을 위해 몸 바쳐가며 희생하는 아줌마들. 밖으로 볼 때는 묵묵히~ 조용히~ 아무 문제없이 잘들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가슴 속 깊이 그런 응어리가 있는 줄 몰랐다. 아줌마들의 맺힌 한. 풀어주지 않고 계속 쌓이면 언젠가 터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 기 꺾으면 안 된다?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처음 정착한 분당. 아래 위층 사는 아줌마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중에 '대빵형님' 대접 받으며 대장 노릇을 하는, 나보다 3살 많은 아줌마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다', '여자는 남자의 기를 꺾으면 안 된다'란 말들을 내게 끊임없이 해줬다. 어느 날은 집 앞에서 만난 나에게 그녀가 "큰일 났어, 집에 빨리 들어 가봐"라는 게 아닌가.

"왜요? 우리집에 뭔 일 있어요?"
"남편 벌써왔어."
"그게 어때서요?"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때 IMF가 터졌다. 잘 살던 그녀의 집도 하루아침에 폭삭 망했다. 가구점 사장이던 남편은 놀게 됐고 집도 은행으로 넘어가게 생겼단다. 그런데도 그 형님은 실직한 남편의 기가 죽을까봐 평소보다 반찬도 더 신경 쓰고 더 잘해준단다. 옆에서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짠했다.

결국 '역전의 여왕'이 된 분당의 그 형님

드라마 <결혼해주세요>의 한 장면.
 드라마 <결혼해주세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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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남편 기 살리느라 걷거나 버스 타고 다니며 힘들게 장 봐서 남편 식사를 챙겼는데, 남편은 달랐다. 직장도 잃고 빚만 짊어진 그 남편은 그때도 다이너스티 차를 타고 다니며 골프장에 들락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이 차 한 잔 달라며 우리집을 불쑥 찾았다.

"나 대판 싸웠어. 아니 내가 IMF 터뜨렸나 왜 내게 난리야. 난 죽을 힘을 다해 버스 타고 싼 곳에서 장봐서 열심히 해 먹이건만 뭐가 불만이래."
"그러니깐 내가 해 주지 말랬잖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대접 받을 자격 없다'는 신조를 가진 내가 조언을 했다.

"싹싹 빌고 사과하며 모시러 올 때까지 가지마."
"아니 그럴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냐."
"알아, 알아. 형님 남편 하늘인 거."

따뜻한 물도 먹이고 좋아하는 잔치국수도 한 사발 먹인 후 애들 방에서 재웠다. 열심히 빨래를 개고 있는데 형님 남편이 내게 전화를 했다.

"우리 마누라 거기 있어요?"
"네, 하지만 오늘 집에 못 가요. 열이 나서 내가 챙겨야 되겠어요."

"아니 집 놔두고 뭔 짓이래요. 내가 약 줄 테니 보내세요."
"형님 집이 일터지 어디 쉴 수 있는 곳입니까? 일터로는 오늘 못 보내요."

"내가 잘못했다고 빨리 집에 오라한다 해주세요."
"아니, 남편이란 사람은 다이너스티 타고 골프연습장 가고, 형님은 배추며 총각무며 잔뜩 사가지고 버스 타고 집에 와서 소파에 앉아있는 남편한테 음식 해 바치는 거. 그딴 거. 정말 이상한 것 아니에요? 좀 전에 잔뜩 짊어지고 버스에서 내리는 형님 보고 나 속상해서 혼났어요. 부인이 그러고 사는데 혼자 자가용 타고 골프장 가서 공이 맞긴 하던가요?"
"……."

이쯤하고 전화를 끊는데, 어느새 형님이 내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 백배 사죄를 받고 집에 돌아가긴 했지만 그후로 형님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참고 속으로 삭히는, 형님이 그동안 써왔던 그 방법보다 화끈하게 할 말 다하는 내 방법이 효과가 훨씬 크다는 걸 알았던 게다.

공정사회 만든답시고 먼 곳까지 볼 것도 없다

형님은 날이 갈수록 점점 자신감을 갖고 활기를 찾기 시작하더니,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흐른 후 40평 정도의 홀을 갖춘 커다란 호프 집 사장이 되었다. 호프집 사장은 땅이었던 형님이고, 종업원과 함께 식탁을 닦으며 주문을 받아주는 사람은 하늘이었던 형님 남편이다. 이러면 하늘과 땅이 바뀐 건가.

원래 음식 솜씨가 좋았던 형님. 그 덕에 분당 모 신문에 '안주가 맛있는 집'으로 선정까지 되며 불황을 타지 않는 호프집으로 지금도 '급성장 중'이다. 얼마 전에 잠시 들렀는데, 이제는 영락없는 커리어우먼이 돼 있었다. 지금 형님의 꿈은 자기 이름으로 프랜차이즈를 갖는 것이란다.

남자와 여자가 공정하게 차별 없이 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사회 구성원의 반이 불행하다면 같이 사는 남자들이 과연 행복하기는 할까. 지금 당신 옆구리에 있는 여자를 불행하게 하지 마라.

내 부인이 부부관계에서도 불공정함을 느끼고 살고 있다면, 행여 그녀 가슴속에 한이라도 남아있다면, 우선 그것부터 해결해야 마땅하다. 공정한 사회를 만든답시고 먼 곳까지 볼 것도 없다.

덧붙이는 글 | 엄을순 기자는 문화미래이프 대표입니다.



태그:#공정사회, #엄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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