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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서씨(왼쪽)는 리호남을 통해 북한 무용수 조명애(오른쪽)와 가수 이효리가 함께 출연한 삼성전자 휴대폰 CF광고를 찍었다.
▲ 박채서씨와 조명애 박채서씨(왼쪽)는 리호남을 통해 북한 무용수 조명애(오른쪽)와 가수 이효리가 함께 출연한 삼성전자 휴대폰 CF광고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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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 203실(해외공작실) 소속 공작원(공작암호명 흑금성)이었던 박채서(56)씨가 북한 공작원 리철(56, 리철운 또는 리호남)에게 포섭되어 군사자료를 수집하라는 지령을 수수한 간첩이라는 이번 사건의 핵심은 리호남의 정체성에 달려 있다. 리호남의 정체가 대남 첩보 및 공작활동에 종사하는 '공작원'이냐, 아니면 대외경제사업에 종사하는 '경제일꾼'이냐에 따라 간첩죄가 성립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리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박채서씨다. 남북한 당국이 '묶어준' 두 사람은 1994년부터 친교가 계속된 16년 지기다. 육군 3사관학교를 졸업한 박씨는 77년 소위 임관후 90년 국군 정보사령부 공작단의 공작계획 분석장교를 거쳐 91년부터 정보사 공작관으로 근무했다. 공작관은 해외(북한)에 공작원을 침투시켜 운용하는 직책이다. 공작은 국가가 인가한 비합법 활동이기에, 어떤 공작이든 보안 유지를 위해 공작관-공작원 관계는 점조직으로 운용된다.

박채서와 리철의 첫 만남은 93년 4월 정보사 공작관(육군 소령)에서 예편한 박씨가 1년간 일부러 신용불량자가 되어 '신분 세탁'을 한 뒤에 이듬해 공작의 일환으로 북측과 접촉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교 시절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그는 당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를 통해 대남공작기관에 우회침투하기 위해 조총련의 시바다 아리요시(서재호)에게 접근했다. 서재호는 북한 만수대창작사 내에서 보석가공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뒷배를 봐준 기관이 국가안전보위부였다.

보위부는 '주민사찰 통해 체제 보위 담당하는 김정일 직속기관'

안기부 해외공작원 시절에 신분을 위장하고 북한에 들어가 96년 당시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인민 체육인' 계순희 선수를 만나 환담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박채서씨(왼쪽).
▲ 흑금성과 계순희 안기부 해외공작원 시절에 신분을 위장하고 북한에 들어가 96년 당시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인민 체육인' 계순희 선수를 만나 환담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박채서씨(왼쪽).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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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보위부는 '주민사찰을 통해 체제 보위를 담당하는 김정일 직속 기관'이다. 박씨는 대외연락부나 조사부(35호실) 같은 대남공작기관에 침투하길 원했다. 그러나 북측은 '진급에서 누락되어 체제에 불만을 품은 대북 공작관 출신의 신용불량자 예비역 소령'으로 위장해 접근한 박씨의 상대역으로 '독사'라는 별명이 붙은 보위부의 베테랑 반탐과장 김영수를 묶어주었다. 그래서 박씨는 공작방향과 목표를 수정해 보위부와 첫 단추를 끼게 되었다.

보위부 침투공작이 '여건조성' 단계에 진입하자 안기부는 박씨를 서기관급 해외공작원으로 정식 채용해 암호명 '흑금성공작'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안기부의 승인을 받아 비밀방북해 보위부로부터 각종 '거짓 위장 테스트'를 통과하게 된다. 그러나 남한 국적인 그가 감시의 눈길을 피해 매번 비밀입북할 수는 없었다. 북측 입장에서도 원활한 공작을 위해선 서울-베이징을 오가는 그와, 평양에 상주하는 김영수 과장 사이에 '연락책'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그의 대화 파트너(보위부 베이징 연락책) 역할을 맡은 무역일꾼이 리철이다.

94년 무렵은 북한 당국이 조총련을 비롯한 해외동포를 중심으로 외자유치로 경제 활성화를 시도한 시점으로, 당시 외자유치사업을 심의하는 대외경제위 합영총국 심의처장이었던 리철은 업무상 베이징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가 조총련계 등 해외인사들을 자주 접하고, 동갑내기인 점도 북한 당국이 대화 창구역으로 그를 지정한 배경이 되었다.

검찰이 공소장에 작전부(현 정찰총국) 공작원으로 적시한 리호남의 본명은 리철이다. 대북 접촉 초기에 박씨가 베이징과 평양에서 만난 그의 여권에서 확인한 이름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대외활동에 나선 90년 중반부터는 '리철운'이라는 이름을, 2000년대 중반부터는 '리호남'이라는 가명을 주로 썼다.

리철의 장인 리길송은 남한의 검찰총장격인 중앙검찰소장

사실 그의 본명에서부터 가족관계 그리고 경력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알려진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가 다 그의 파트너(대화 창구)였던 흑금성공작원 박채서씨의 정보보고에 기초한 것이다. 박씨는 그와 가장 오랫동안 접촉한 유일한 남측 사람이다. 실제로 오랜 친교를 통해 박채서씨는 그를 '리 참사'라고 불렀고, 동갑네기인 리 참사 역시 그를 '박상' 혹은 '박 선생'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90년대 중반 당시 그의 부친은 인민군 군단장(상장)을 지낸 군 고위직이었고, 장인 리길송은 자강도 당서기를 지낸 고위층이었다. 현재 최고인민회의(국회) 법제위원인 리길송은 올해까지도 중앙검찰소장(검찰총장에 해당)을 역임한 당 서열 30위권 안팎의 고위층이다.

리철은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졸업 당시 최고의 성적(학점)으로 졸업해 주석궁에 초대되어 김일성으로부터 "당의 일꾼으로 키우라"는 교시를 받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북한에서 김일성의 교시는 '영원불변의 지시'로 간주된다.

그는 김일성대 박사원에서 자본주의 경제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상급교원(교수)으로 일했다. 학위논문은 특이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계획과 그 성과에 대하여'라고 한다. 90년대 중반 그는 해외자본 유치를 통한 경제발전을 꾀한 노동당의 필요에 의해 정무원 대외경제위 산하 합영총국 심의처장으로 옮겨갔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박씨의 정보보고뿐만 아니라 제3의 인사들로부터도 확인된다.

조철준 전 북한 정무원(현재 명칭은 내각) 건설부 부장(장관)의 아들로 1994년 한국으로 귀순한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은 리철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조명철 소장은 김일성대 박사원에서 그와 동문수학한 관계다.

"함경남도 책임비서를 지낸 리길송의 사위다. 1980년대 후반 김일성대 교수(상급교원)로도 함께 일했다. 성격이 호방하고 활달하다. 두뇌회전도 빠르다. 교수로 일한 지 몇 년 안 돼 대외경제 일을 맡은 합영총국으로 옮겨갔다." (신동아, 2010년 9월호)

리호남의 정체성에 대한 공소장의 논리적 모순

그런데 검찰이 서울중앙지법 제28형사부(재판장 김시철)에 제출한 피고인 박채서씨의 공소사실을 보면, 리호남(리철)의 정체성과 관련해 몇 가지 논리적 모순이 발견된다. 다음은 공소사실의 리호남 관련 대목이다.

"피고인은 95년 7월경 국가안전기획부의 대북공작원으로 채용되어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대남공작원으로 활동 중이던 리호남(56, 일명 리철)을 파트너로 대북 정보수집 등 공작활동을 수행하다가 98년 6월경 안기부 대북공작원에서 해고되었다.…(중략)…

리호남은 90년 5월경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원 및 교수로 근무한 후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합영지도국 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에 파견되어 남한 정치정세 및 군사기밀 수집활동의 공로로 98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자로, 2000년 4월경 북한 대남공작기관인 '작전부'(현 정찰총국) 산하 715연락소에 소환되어 작전부 산하 위장업체인 '조선명성회사' 대표와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참사, '민족화해협력위원회' 참사 등으로 위장한 채 대남 정보수집 등 공작활동을 수행해 왔다."

우선 국정원-검찰은 국가안전보위부를 '대남공작기관'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국정원 홈페이지에 따르면, 국가안전보위부는 '주민사찰을 통한 체제 보위를 담당하는 김정일 직속 기관'이다. 한 마디로 말해, 보위부는 '간첩을 막거나 잡는 것'이 본업이다. 간첩을 육성해 남파하는 것이 본업인 대남공작기관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굳이 보위부를 '대남공작기관'으로 규정한 데는 박씨를 간첩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즉, 박채서씨를 간첩으로 규정하려면 그의 상부선인 리호남은 공작원이어야 하기 때문에 리호남에게 베이징 연락책을 맡긴 보위부를 대남공작기관으로 규정한 측면이 크다.

보위부 본업은 '간첩 잡는 것'...'대남공작'은 부업일 뿐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위장포섭된 안기부 공작원(흑금성)이었던 박채서씨와 그의 '보위부 베이징 연락책'이었던 리호남 대외경제위 처장(현재는 무역성 참사)은 주로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을 무대로 활동했다.
▲ 켐핀스키 호텔의 리호남 참사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위장포섭된 안기부 공작원(흑금성)이었던 박채서씨와 그의 '보위부 베이징 연락책'이었던 리호남 대외경제위 처장(현재는 무역성 참사)은 주로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을 무대로 활동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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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위부도 '방첩' 임무를 수행하다보면 침투 간첩을 포섭해 역이용하는 '역용공작'도 하게 된다. 보위부에 위장포섭된 흑금성 공작원 사례가 그것이다. 즉, 정보사 공작관 출신으로 95년 안기부 공작원으로 채용된 박채서씨는 진급에서 누락된 체제불만 세력인 것처럼 위장해 북한 보위부에 포섭된 것처럼 침투했다. 그러자 통전부는 97년 보위부가 포섭한 '이중간첩'(실제로는 위장포섭된 안기부 이중공작원)으로 간주한 그를 매개로 역용공작(대선공작)을 펼쳤다. 물론 안기부는 흑금성의 정보보고를 통해 북한의 수를 다 읽고 있었다.

그러나 보위부의 역용공작은 '본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수확을 활용한 '부업'일 뿐이다. 보위부의 본업은 '체제를 보위'하는 것이다. 적대국(남한)의 체제를 흔들기 위해 간첩, 즉 공작원을 교육훈련, 호송, 남파하는 공작기관은 노동당에서 공개적으로 정치공작을 수행하는 통일전선부, 정치사회단체 침투공작을 목표로 하는 대외연락부, 제3국에 우회간첩을 파견하는 조사부(35호실), 공작원 기본교육 훈련과 침투 공작원의 호송-안내-복귀를 맡는 작전부 등으로 분산돼 있었다.

이밖에 인민무력부 소속 정찰국은 무장공비 양성 및 남파, 요인암살, 파괴, 납치 등 게릴라 활동, 대남 군사정보 수집 등을 주임무로 했다. 그런데 북한은 지난해 35호실(조사부)과 작전부를 노동당에서 떼어내 인민무력부 정찰국으로 통합하면서 정찰국을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했다. 대외연락부는 '대외교류국'으로 축소돼 내각에 배속된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종래 당 소속이던 4개 대남-해외 공작부서 중 대화 및 공작을 공개적으로 수행하는 통일전선부만 노동당에 남게 되어, 군부가 통제하는 정찰총국으로 대남공작이 일원화된 것이다.

그런데 대남공작원 남파가 주임무인 작전부 요원의 경우,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육성하며 출신 성분, 고등중학교 성적을 고려해 180~200명을 선발해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 실전에 배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해 주석궁에 초대되어 김일성으로부터 "당의 일꾼으로 키우라"는 '영원불변의 교시'를 받은 리호남이 작전부에 소환돼 공작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국정원-검찰의 논리는 설득력이 약하다. 물론 리호남이 작전부 공작원임을 뒷받침하는 입증 증거도 없다.

반면에 90년대 중반부터 대외경제-무역 일선에서 모습을 드러낸 리호남이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4개 정부의 다양한 남측 인사들을 접촉하면서 '본업'(경제협력사업과 대외무역)에 충실했던 정황증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리호남의 본업도 '외화벌이 경제-무역일꾼', 정보수집은 부업

김일성대 상급교원(교수)이었던 리호남이 북한의 대외경제 현장에서 직접 외화벌이와 투자유치에 나선 90년대 중후반은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난과 경제난이 겹친 '고난의 행군' 기간이었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대외무역에 종사하는 각종 총회사의 외화벌이 일꾼은 물론, 각급 단위 군부대에도 '각자 요령껏 벌어서 먹고 살아라'고 자력갱생을 요구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외화를 많이 벌어온 일꾼들이 인민영웅이었고 노력훈장을 받았다.

당시 북측으로서는 아무런 투자없이 손쉽게 달러를 벌 수 있는 것이 해외동포들의 고향 방문 및 이산가족 상봉 주선사업이었다. 국가보안법 부담이 없는 해외교포들은 고향을 방문하면 가난한 고향주민을 위해 거액의 달러를 내놓았다. 리호남은 나중에 총풍 사건으로 구속된 대북사업가 장석중씨가 주선했던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 방문에도 관여했다. 물론 북측은 정 회장의 고향 방문 대가로 상당한 거액을 챙겼다.

박씨의 소개로 리호남은 1·4후퇴 때 피난 내려와 맨손으로 큰 재산을 모은 한명훈(2009년 작고)씨의 재북 가족상봉 및 고향 방문을 실현 시켜 2001년 당시 통일부와 청와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산가족 개별상봉을 금지해온 북한의 입장에서는 이례적인 조처였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재혼했지만 자식이 없던 한씨는 북측에 거액의 사례금을 전했다. 리호남은 2002년에 한씨의 큰아들 한창용의 지병(뇌일혈)으로 마비된 팔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당국의 승인 아래 베이징에서 한 달 가까이 치료를 받게 하기도 했다.

97년 2월 당시 광고회사 '아자'에 위장취업한 안기부 공작원이었던 박채서 전무(왼쪽에서 두번째)와 박기영 대표(맨왼쪽)가 방종삼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총사장(맨오른쪽)과 리호남 참사(가운데 앉은 이) 등 북한 대표단에게 광고시안을 설명하고 있다. 위는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가 보도한 <시사저널> 기사와 사진.
▲ 흑금성 박채서씨와 리호남 97년 2월 당시 광고회사 '아자'에 위장취업한 안기부 공작원이었던 박채서 전무(왼쪽에서 두번째)와 박기영 대표(맨왼쪽)가 방종삼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총사장(맨오른쪽)과 리호남 참사(가운데 앉은 이) 등 북한 대표단에게 광고시안을 설명하고 있다. 위는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가 보도한 <시사저널> 기사와 사진.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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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백두산 등을 배경으로 남한 기업의 영상 CF광고를 찍는 것을 골자로 한 '아자'의 5년 독점 광고사업도, 이 사업을 통해 안기부 '편승공작'을 펼친 박채서씨의 요청으로 리호남이 주선한 사업이다. 97년 당시 북한 측은 '자본주의의 꽃'인 상업광고를 받아들이는(엄밀히 말하면 상업광고 촬영 인력과 장소 제공) 대가로 100만 달러의 중간선수금을 챙겼다.

97년 3월 당시 '아자'는 삼성전자를 광고주로 해서 방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보름여를 앞두고 안기부의 비밀공작 문건인 '이대성 파일' 유출사건으로 흑금성공작원의 신분과 안기부의 '편승공작'이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광고사업은 극적으로 무산되었다. 물론 남측 사정으로 계약이 이행되지 않음에 따라 리호남은 광고제작팀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가만히 앉아서 계약금과 중간선수금조로 15억원 이상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리호남은 공화국 영웅' 칭호의 진실은?

이효리와 조명애의 삼성전자 애니콜 동반 광고 모습.
 이효리와 조명애의 삼성전자 애니콜 동반 광고 모습.
ⓒ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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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앞서의 공소장에서 리호남에 대해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합영지도국 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에 파견되어 남한 정치정세 및 군사기밀 수집활동의 공로로 98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자"라고 규정했지만, 오히려 그가 광고사업 등 각종 경제협력사업 유치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인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것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그는 그 뒤로도 광고사업에 재미를 붙여 2005년에 박씨가 제안한 북한 무용수 조명애와 남한 가수 이효리를 모델로 한 삼성전자 휴대폰(애니콜) 합작광고를 성사시켜 주목을 끌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된 이 남북 합작광고는 세계 45개국에서 뉴스로 보도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2002년 서울에서 열린 8·15민족통일대회 개막식에 북측 기수단으로 참가해 주목을 받은 조씨는 합작광고를 계기로 나중에 남북 합작 드라마 <사육신>에도 출연했는데 이 과정에서 리호남이 거액의 달러를 벌어들였음은 불문가지다.

리호남은 2005년에 박채서씨가 제안한 북한 무용수 조명애와 남한 가수 이효리를 모델로 한 삼성전자 휴대폰(애니콜) 합작광고를 성사시키는 등 경협 전문가로 알려졌다.
▲ 북한 무용수 조명애 리호남은 2005년에 박채서씨가 제안한 북한 무용수 조명애와 남한 가수 이효리를 모델로 한 삼성전자 휴대폰(애니콜) 합작광고를 성사시키는 등 경협 전문가로 알려졌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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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9일 열린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대북사업가 유모씨의 법정증언에 따르면, 리호남은 올해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남측의 박지성 선수와 북측 여자축구선수가 함께 월드컵 CF광고를 찍는 광고사업을 제안할 만큼 돈(외화) 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는 스타일이다. 리호남과 오랫동안 친구처럼 지냈다는, 법정증인으로도 출석한 J씨는 "리호남이 공작원이라면 내게 돈을 주면서 뭔가를 부탁해야 정상인데 정반대로 내가 만날 때마다 돈을 주고 부탁했다"면서 "그런 친구가 어떻게 공작원이냐"고 반문했다.

기자가 97년 2월 리호남씨를 베이징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대외경제위 처장 직함을 사용했다. 외국과의 경제교류 이전의 무역상담, 시장조사 및 개최, 외국투자유치, 기술도입 등을 관장하는 대외경제위는 북한 정무원 산하 위원회 조직이었다. 그러다가 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의 헌법 개정을 통해 정무원이 내각으로 조직이 변경될 때 대외경제위가 폐지되면서 내각에 무역성이 신설되었다. 그 이후 그의 직함은 무역성 과장을 거쳐 현재는 참사(국장~차관급)에 이르고 있다.

물론 내각보다 노동당 우위의 북한 체제의 특성과 대외접촉을 하는 전문일꾼이 부족한 북한의 실정상, 남측 접촉인물이나 추진사업에 따라 그때그때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참사나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참사 직함을 사용하기도 한다. 민경련은 민간 남북경제협력사업의 창구역이고, 민화협은 주로 사회문화종교 분야 교류사업의 창구역이다.

국정원-검찰의 공작 만능주의와 공작 환원주의

리호남은 베이징을 무대로 주로 경제사업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북한 체제의 특성상 정치경제사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가 관여했다가 외부에 노출된 대표적 정치경제사업은 '대통령의 어린 동업자' 안희정(현 충남지사)과의 2006년 10월 베이징 비밀접촉이었다. 당시 박채서씨로부터 비밀접촉 사실을 귀띔받은 기자는 탐문취재 끝에 그 해 11월 9일 안희정-리호남 접촉사실을 처음 보도한 바 있다.

안희정씨와 이화영 의원 그리고 리호남 참사 3인은 그 해 10월 20일 베이징 쿤타이호텔(昆泰大飯店)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의논했다. 이 비밀접촉은 대북사업가 권오홍씨가 주선한 경제사업(평양 돼지농장 건설)으로 출발했지만,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에 가진 비밀접촉이라는 점에서 정치사업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접촉 이후 남북한은 이해찬 전 총리의 방북에 이어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게 된다.

기자가 2007년 10월 정상회담 직전에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에서 리 참사를 만나 직접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정상회담이 굉장히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그거야 '안'(안희정씨)을 만난 그때부터 (추진)한 거죠"라고 답했다. 그는 또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 마지막에 다 정해져서 몇 사람(김만복 국정원장과 서훈 3차장 등)이 (북한에) 들어와서 수표(서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그가 자신의 역할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

리호남(왼쪽에서 두번째) 무역성 참사는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 이틀째에 열린 경제인(대기업 총수) 간담회에 북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 남북정상회담 경제인 간담회의 리호남 리호남(왼쪽에서 두번째) 무역성 참사는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 이틀째에 열린 경제인(대기업 총수) 간담회에 북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 MBC 화면 캡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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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리 참사가 2007년 10월 3일 정상회담 이틀째에 남북한 경제인 간담회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것을 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당시 대기업 부문 간담회에는 남측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을 단장으로 해서 구본무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과 이구택 포스코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7명이 대표로 참석했고, 북측은 한봉춘 내각 참사를 단장으로 해서 리 참사 등 5명이 대표로 참석했다. 이외에도 회담 안내 및 기록을 겸해 남측은 재경부 안모 국장이 배석했고, 북측 역시 관계자 1명이 배석해 기록을 담당했다.

국가보안법상 북한은 '반국가단체'이지만 국제법상으로 유엔 회원국이자 엄연한 독립국가이다. 정상회담은 국가 외교의 최고위급 회담이다. 군사회담에는 군인들이 대표로 나오는 게 당연하고, 경제회담에는 경제인이 대표로 나오는 게 당연하다. 당시 참석자들에 따르면, 리호남은 '민경련 참사'의 직함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민경련은 무역성 산하 조직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국정원-검찰의 논리대로라면, 북한 당국은 정상회담 부속 경제인회담 대표로 '경제일꾼'(경제 테크노크라트)이 아닌 '공작원'을 내보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리호남이 추진한 이효리-조명애 CF광고도 공작의 결과이고. 그가 대화의 물꼬를 터 직접 경제인 간담회에도 참석한 남북정상회담조차도 공작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박채서=간첩' 등식이 성립하겠지만, 북한의 모든 행위를 '공작'으로 보는 공작 만능주의이자, 모든 현실을 공작의 결과로 보는 공작 환원주의가 아닐 수 없다.


태그:#흑금성, #박채서, #리호남, #리철, #공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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