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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야권단일정당 창출을 위한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문성근 대표, 여균동 공동집행위원장, 최교진 공동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2만명 돌파 민란콘서트 <우금치 다시 살아> 기자회견'이 열렸다.
 3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야권단일정당 창출을 위한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문성근 대표, 여균동 공동집행위원장, 최교진 공동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2만명 돌파 민란콘서트 <우금치 다시 살아> 기자회견'이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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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민란이나 혁명은 대부분 권력(자)에 대항하여 일어난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고,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또 당장에는 진압되거나 패배했지만 불씨는 살아남아서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가져왔다.

그런데 11월 13일(토)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열리는 '민란'은 정권이나 지배세력의 타도가 아닌 야5당을 향한, 민란과 혁명사상 희귀한(희한한) 민란이다. "국민 백만 명이 모여 야5당에게, 국민의 바다에 풍덩 빠져 새로운 야권 단일정당을 만들어내자고 호소하는" 운동이다.

왕조시대에는 폭군과 가렴주구를 일삼는 지배세력을 바꿀 수 없어서 혁명이나 민란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선거를 통해 투표로 교체할 수 있다. 그런데 바꿔야 한다는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야권은 5개 정당으로 분열하여 도토리 키재기식으로는 매머드 집권세력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 합쳐서 힘을 모아 바꾸자는 것이다. 야당을 향한 민란의 배경이다.

116년 전 갑오년(1894년) 11월 8일부터 14일까지 공주 우금치에서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혁명군은 관군을 앞세운 일본군의 현대식 병기에 맞서 싸웠지만 장렬하게 패배했다. 동학군은 죽창과 농기구로 무장한 데 비해 일본군은 영국에서 수입한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정규군이었다. 애당초 전력이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동학군 20~30만 명이 희생되고, 조선이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반세기의 참혹한 식민지 생활과 분단ㆍ동족상쟁을 겪는 원초적 배경이 되었다. 우금치 전투는 한민족 비극의 전장이었다. 민중의 한과 피눈물이 밴 곳이다.

바로 그곳에서 농기구ㆍ죽창이 아닌, 야당을 향해 호소하자는 이 희한한 민란이 "오늘은 민란이라 부르지만, 내일은 성공한 시민혁명으로 기록될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동학혁명기의 격문과 뒷날 문인들의 시를 통해 역사의 맥을 되살펴본다.

▲ <호남창의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뜻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는 데 있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는 데 있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과 방백수령 밑에서 굴욕당하고 있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나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 전봉준 등의 <창의문>

공경부터 방백 수령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을 살찌우는 것과 가문을 빛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 선발하는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소를 물건으로 사고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배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니 8도는 어육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졌다.

▲ <출진가>(박태원, 『갑오농민전쟁』)

어화 농부들아
모두 떨쳐 나오거라
척왜척양 보국안민
우리들이 할 일이라
우리가 아니하면
어느 누가 하여 주리

안팎의 원쑤들을
모조리 쳐 없애고
나라를 바로잡아
좋은 세상 살아보세.

▲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계정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으든 쇠붙이는 가라.

▲ <우금치의 노래>(김진경)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무엇이 생긴 것은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가시덤불로 피어
넘을 수 없는 무엇을 넘기 시작한 것은.

옛적에는 굶주린 사내들이 들어와
소도둑이 되었다는 좁은 고갯길
흰 옷 입은 동학군들이 죽어 산을 이루던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중략)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우리들의 절망은 우리들의 희망
노예의 노래는 빛나는 하늘
진달래 뿌옇게 핀 좁은 고갯길
지금도 소리쳐 오는 함성은 우리의 것.

아직도 피가 뜨거운 사내들은
죽음처럼 새파랗게 날선 고개를 넘는다
우리들의 새벽 출근길에, 책 위에, 식탁 위에
문득 문득 막아서는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너를 넘는다. 우리들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너를 넘는다.

▲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김남주)

그들은
이빨 빠진 사자가 되어
허공에 허공에 허공에 대고
허망하게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만인을 위해
땅과 밥과 자유의 정복자로서
승리를 위해 노래하고 싸웠다
대나무로 창을 깎아
죽창이라 불렀고 무기라 불렀고
괭이와 죽창과 돌멩이로 단결하여
탐학한 관리의 서리를 베고
양반과 부호의 다리를 꺾어
밥과 땀과 자유를 쟁취했다.(후략)

▲ <우금치 고개>(정희성)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에
우금치 고개가 있지요
우리 근대사의 험란한 고빗길답지 않게
부드러운 이 고개
지금은 여기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서 있고
주제넘게 거기다 제 이름 새겨 넣은 사람도 있지요
박 아무개 이름은 누가 돌로 쪼아버렸고
최덕신이란 이름은 관에서 지은 듯 했지요
누가 뭐래도 이것이  민심이고
이것이 역사지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호미질만 하면
이름없는 사람들의 뼈가 걸려 나왔다고
누군가 말하며 울었어요.
들녘엔 봄풀이 돋아나고 있고
조금만 더 가면
신동엽 시인의 생가도 나오지요.


태그:#우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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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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