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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피복노조의 임금인상 농성투쟁.
 청계피복노조의 임금인상 농성투쟁.
ⓒ 전태일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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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싸워주겠냐고 물었다. 어린 여공들이 밤새 일하다 쓰러지는 공장 다락방과, 먼지가 쌓여 쌀밥처럼 하얀 그들의 꽁보리밥 도시락과, 이 모든 것을 야기하는 가진 자의 불의와. 그, 전태일에게 어머니는 약속했다. 그를 아는 모든 그가 약속했고, 2주 후인 1970년 11월27일 노조를 세웠다. 최초의 민주노조이자 이후 37년간 노동,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청계피복노조의 시작이었다.

전태일 분신 후, 정작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전태일이 왜 죽었는지, 노조가 뭔지 잘 몰랐다. 14, 15살 때부터 공장 안에 갇혀 일만 해온 시다들은 바깥소식에 어두웠다. 그래도 스스로 노조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하루 16시간 이상을 좁고 어두운 다락에서 무릎 꿇고 일해 등이 굽고 폐를 다치는 생활, 15일 간 밤샘 일을 하고 몇 시간 쉬려다 얻어맞으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던 경험에서 부조리함을 깨달은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된 소모임 등의 대중활동은 초기 청계노조의 성장에 크게 공헌했다.

"도시락 하나 먹곤 밤 11시까지 물 한 모금 못 마셔"

신순애씨.
 신순애씨.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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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청계노조는 다른 노조들과 달리 교육 선전사업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972년 4월에는 청계천의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중등 기초과정을 가르치는 평화새마을교실을 열었다.

당시 평화, 동화 등 5개 주요 상가의 노동자 8800명 중 7천 명 이상이 여성이었고, 이중 70%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12살부터 시다 일을 시작해 다림사의 오야미싱사로 일하고 있던 신순애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배고픈 거, 화장실 같은 생리적 욕구를 참는 거, 인간으로 대접 안 해주는 게 제일 힘들었죠. 한 시에 도시락 하나 먹으면 밤 11시까지 물 한 모금도 못 먹었어요."

그렇게 한 달 내내 일한 월급은 쌀과 연탄을 사면 동났다. 그마저도 체불되곤 했다. 74년까지 노조활동의 70%가 체불임금을 받아주는 일이었다. 사장들은 "학원 가면 돈 내고 배워야 하는 재단 기술을 공짜로 가르쳐주지 않냐"고 거꾸로 큰소리쳤다. 공장에서는 착취당하는 임노동자, 집에서는 자신을 희생해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 신씨를 포함한 청계 여성 노동자들의 두 가지 멍에였다.

죽지 못해 살았다던 신씨는 새마을교실에 나가면서 노조에 푹 빠졌다.

"난 삼양사에선 7번 시다였고 다림사에선 1번 미싱사였어요. 그랬는데 노동교실 가면 '신순애씨'하고 불러주는 거예요. 인간대접 받는 거 같아서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전태일도 그 곳에서 알았다.

"내가 함께 했다면 그 사람이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 그걸 벗으려 노조를 더 열심히 했죠. 저뿐 아니라 조합원들 모두 그랬을 거예요."

"학생들은 깍듯이 대우하면서 우린 면회도 안 시켜주고"

공장에서는 10시, 11시까지 일을 시키는데 수업은 8시에 시작했다. 그가 1974년 12월 근로시간단축 농성에 참여한 이유였다. 그때부터 열성 조합원이 된 신씨는 노동교실이 폐쇄되자 이에 저항하는 '결사항전' 9·9 투쟁에 참여해 6개월 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작고 약해 제일 먼저 쓰러지곤 했던 스물 셋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이 때 맞은 매로 인해 신씨의 왼쪽 귀는 지금도 잘 안 들린다.

"며칠을 때리면서 취조하고, 또 학생들은 깍듯이 대우하면서 우리는 가족 면회도 안 시켜주고 차별했어요. 심지어 임미경이란 친구는 16살이었는데 주민번호 뒷자리를 다 0으로 바꿔 써서 기어이 구속시켰다니까요."

석방된 후 신씨는 방을 얻어 조합원들을 조직, 교육했다. 한글 공부부터 노동법 모임까지 계속된 모임들은 노조를 복구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를 비롯한 다수 여성 조합원들의 헌신이 늘 노조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나 같은 처지의 16,17세 여자애 조합원들이 많았어요. 노조는 어찌 보면 우리 여성들에게 생명줄이었죠. 그곳에 가면 신이 나는 거죠. 임금인상 37.7% 투쟁, 퇴직금 투쟁 등 싸움, 사업 하나하나가 우리 일로 와 닿는 것들이었으니까. 나도 좋고 너도 좋고 그렇게 되니까 신바람이 날 수밖에요. 또 제가 참여한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어요. 참 행운이죠."

그중 가장 기억나는 일로는 80년 퇴직금 전면실시 투쟁을 꼽았다. 당시 근로기준법상 16인 이상 사업장에만 지급하던 퇴직금을 12일 간의 농성과 가두시위 등을 통해 10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실시하게끔 했다. 처음으로 현행 근로기준법을 뛰어넘는 조건이었다.

"그 때는 16인 이상이 30일을 넣어야 했어요. 사장들이 여름에 일거리 없을 때 너 좀 나가있다 와라 하면 퇴직금 못 받는 거죠. 그동안 우리는 늘 법대로만 해달라고 외쳐 왔는데, 법 이상의 걸 최초로 따낸 거잖아요. 노조가 10년 동안 쭉 성장하다가 한 단계 위로 올라간 거고."

아직도 최저임금조차 못 지키다니...

전태일이 바보회를 결성한 명보다방에서 내려다본 평화시장.
 전태일이 바보회를 결성한 명보다방에서 내려다본 평화시장.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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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방에서 한글을 배우던 조합원들의 모습도 기억한다.

"농성하는데 그중 한 애 엄마가 잡채를 들통에 한가득 해갖고 왔어요. 그런 거, 또 조합원들이 하나씩 알아가는 모습들이 저희에게 힘이 아니었나 싶어요. 조합원들이 나처럼 살지 않게 하는 한 방법이 노조였던 거 같아요.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그 때 내가 청계노조에 올인했던 게 내 인생의 큰 힘이 된 거 같아요. 지금도 학부 애들에게 '20대 때 뭔가에 한 번 올인해봐라. 굉장히 인생에 도움 된다'고 해요."

1975년 노동교실 농성에 참가한 이래 1981년 전두환에 의해 청계피복노조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신씨는 노조의 가장 든든한 기둥이었다.

올해 신씨는 성공회대를 졸업하고 성공회대 NGO 대학원 정치경제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학부 4학년 때 그가 여공의 시선으로 쓴 '전태일이 보지 못한 평화시장'이라는 레포트를 본 김수행 교수가 그의 삶을 논문으로 쓰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건 생리할 때였거든요. 차비도 없는데 생리대는 그림의 떡이었어요. 또 시다들이 재단사에게 당하는 일들…. 피라미드 구조로 돼 있다 보니 맨 아래 시다에게는 재단사나 미싱사도 권력이었거든요. 그런 것들을 정리를 하고 싶은데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신씨는 여전히 안타까워한다. 그 시절 뼈 빠지게 일해 가족을 먹여 살리고도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또래 노동자들과, 전태일이 죽은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어린 노동자들, 법의 보호를 못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이 천시되고 더 나은 세상에의 희망을 찾기 한층 어려워진 사회에서 열심히 싸우라고 하긴 조심스럽다고 하면서도, 이 시대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신씨는 말한다.

"전 열악할수록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핀란드엔 청소부하고 교수하고 월급이 8:10이래요. 더 놀란 건 청소해 놓은 곳에 교수가 흙발로 들어오니까 청소부가 화를 냈는데 교수가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는 거예요. 한국도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요? 전국 병원, 학교, 청소부들이 우리 청소 안 하겠다고 열흘만 해봐요. 교수들이 청소하겠어요?"

신씨는 요즘 책을 쓸 고민을 하고 있다.

"전태일씨가 바랐던 대학생들, 그리고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왔으니 책임감을 느끼면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내 얘기를 책으로 쓰고, 다음엔 지금껏 평생 미싱일 하는 친구들, 노조 열심히 한 친구들 얘기를 써 보고 싶어요."

상급학교 대신 평화시장으로 향한 민종덕씨

민종덕씨.
 민종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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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민종덕씨를 스물두 살 늦깎이 시다로 만든 건 전태일의 일기였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다 60년대 말에 상경해서 별별 일을 했죠. 원래 상급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헌책방을 돌아다니다 전태일 일기를 봤죠. 충격을 받았어요. 기왕에 노동자생활을 하는 거면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의 뜻을 이어가며 일해보자 싶어 무작정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갔죠. 그리고 엄청 경계를 받았죠.(웃음)"

청계노조 활동을 시작한 그는 상급학교 공부 대신 근로기준법과 노동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계노조는 의식적으로 연대투쟁에 힘써 왔다. '너희만 제대로 대우 받으면 되지 않냐'는 정부, 기업주의 회유와 어용노조 문제가 노동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시기, 놀라운 일이었다.

"일단 조직형태가 기업이 아닌 지역단위로 돼 있어서 그런 생각을 폭넓게 할 수 있었어요. 또 우리가 투쟁하면서 경험한 게, 한 공장을 단속해도 옆 공장이 잘못하고 있으면 도루묵이더라고요. 결국 전체를 다 해결해야 하는 거죠. 그럼 비슷한 업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보자는 의식이 싹튼 거죠. 전태일 분신 후 그런 열망을 가진 세력들도 늘어났고."

그러던 차에 77년 협신피혁에서 일하던 민씨의 형 민종진씨가 산재사고로 사망했다. 청계노조를 비롯해 경인지역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이에 항의해 노동청 점거 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연대투쟁을 선도하는 청계노조를 무너뜨리고자 정권은 노동교실을 공격했다. 결국 노동교실 실장이던 이소선 어머니가 구속되고, 조합원들의 교육, 만남, 연대, 투쟁의 공간이었던 노동교실이 폐쇄됐다. 청계노조에게도 민씨에게도 힘든 시기였다.

"이소선 어머니를 함부로 탄압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야 했어요. 누구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해결 안 된다는 생각까지 했죠."

스물다섯 살 청년은 불과 몇 달 전 죽은 형과 홀로 남을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며 괴로워하면서도 유서처럼 결사선언문을 썼다. 9·9 투쟁 도중 정말 3층에서 뛰어내렸으나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

청계노조 해산... 그러나 '부활'

80년 전두환 신군부정권은 집권하자마자 민주노조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청계노조 역시 81년 1월 사무실을 빼앗겼다. 조합원들은 그달 말 아프리 사무실 점거투쟁으로 저항했으나 무참히 진압당했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구속, 수배되고 노조는 무력해졌다. 그래도 끝이 아니었다. 남은 조합원들이 노조의 맥을 잇고자 노력했고, 82년 경 노조를 복구하기 위한 '청계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수배를 피해 인천에 숨었던 민씨는 도피 생활 중에서도 노조에서 쓰던 스미스코로나 타자기와 등사기를 꼭 챙겨 다니며 문건을 작성, 전파했다.

"나는 청계노조로 노동운동하겠다는 사람이었고, 또 그때 내가 사무장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노조가 강제해산 당한 거잖아요. 내게 엄청난 책임이 있고, 어떻게든 노조를 재건시켜야만 평생의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민주화 세력들의 씨가 마른 상태에서 돌파구를 열고자 이들은 다시 전태일로 돌아갔다. 민씨는 함께 도피생활을 했던 돌베개 출판사 편집장과 전태일 평전을 출판했다. 이어 청계모임은 재야인사들과 함께 전태일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후 투쟁을 위한 '외피'였다. 고 문익환 목사가 회장을, 민씨가 상근직을 맡았다.

1983년, 힘을 모은 '청계모임'은 전태일 13주기를 맞아 추도위원회를 만들어 공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투쟁들을 거치며 마침내 1984년 4월, 청계피복노조가 부활했다. 민 씨가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곧 서노련 위원장을 맡으며 구속되고 말지만, 힘든 기억보다는 벅찬 기억들이 더 많았다고 그는 말한다.

"80년 퇴직금 투쟁을 할 때, 사용주나 정부 당국에선 상여금을 더 줄 테니 퇴직금 부분을 양보하라고 했었어요. 우리 조합원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전체 영세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이니 거부했어요. 또 전두환 정권의 폭력에도 끝까지 저항해야 이후에 우리가 다시 살아날 불씨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싸웠고 그 결과 노조를 복구했죠. 이러한 투쟁 후 민주노조들이 더 만들어지고 연대투쟁을 한 게 이후 구로동맹파업이고, 이게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고 또 전노협으로,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거죠. 모든 게 전태일로부터 시작되는 거죠."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과 오체투지 한 이유

출감 후 민씨는 전태일 기념사업에 전념했다. 전태일과 청계노조의 역사가 빛을 보는 데는 그의 공헌이 컸다.

"수배 중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자료 모으고 기록하는 거더라고요. 그런 게 좀 바탕이 됐죠. 기념관 건물 마련한 후엔 기념사업 제대로 해보자 해서 주로 한 게 전태일 노동학교였어요. 87년도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밀려오는 노동운동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키고 올바르게 교육해 민주노조 운동의 기반이 될 수 있게끔 하자는 거였죠. 연구소, 연수원 만들 생각도 했어요. 청계노조의 전태일에서 전국 노동자의 전태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한 발 더 나아가 전 국민에 전태일을 알리고자 제안한 것이 영화와 전태일 문학상이었다.

"전태일씨의 일기장 보면 문학적 소질이 상당했잖아요. 또 그가 일기를 안 썼으면 죽음의 의미가 훨씬 반감되었을 거예요. 그런 진실한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로 인한 감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문학이 주로 유산계급의 언어유희로 여겨지던 시기라 비난도 만만찮았지만 설득할 수 있었다.

"문학상 제정한다니까 무지무지하게 소년처럼 좋아했던 사람이 문 목사님이셨어요. 말씀드린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 돌려서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하셨죠."

전태일 노동상도 제정했다. 전태일을 닮으려는 노동운동이 이어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그 취지가 실현되고 있는지에 그는 회의적이다. 지난달 그가 전태일 동상 앞에서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과 함께 오체투지 1천 배를 올린 이유기도 하다.

"집단에서는 노동해방 외치고 집에 와서는 내 자식 과외 보내고 마누라 착취하지 않았냐, 또 전태일이 나를 버린다고 했는데 정작 우리는 나와 내 조직만 살려고 하지 않았냐. 그런 걸 나부터 돌아보고 싶었어요. 또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이 삼성인데 거기 노조가 없어요. 그건 노동운동의 무능이죠. 특히 지금 청년들이 겪는 실업 문제 등은 우리 기성세대들에게 책임이 많아요. 전태일 앞에서 부끄럽게 생각해야죠."

이어 그는 앞으로 전태일을 이야기할 사람은 청년이라고 말했다.

"우리 같은 옛날 사람들이 계속 끌어안고 무용담이나 얘기하고 있으면 전태일도 노인이 돼요. 옛날에 했던 건 그냥 정신적 유산인 거고 오늘의 문제는 오늘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전태일의 마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거죠."

덧붙여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가장 미래를 낙관하고 세상을 바꾸려 한 전태일의 희망을, 지금 절망하는 청년들이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탄압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인터뷰 후 민씨는 청계모임과 원풍 등 70년대 민주노조 관계자들과 만날 약속을 잡아놓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내린 결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다. 지난 6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청계노조를 비롯한 70년대 민주노조 11개가 국가권력으로부터 노동기본권 및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판결하고, 정부에게 사과 및 명예회복과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민씨는 이에 대해 세 가지 원칙을 세우고 있다. 과거 청산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로써 바라보고 대응할 것, 역사적 평가를 명확히 하고 자존심을 회복할 것, 그 다음에 정당한 배상을 받아내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지금도 탄압받고 있잖아요. 올바른 대응을 하고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야만 지금 탄압당하는 이들에게 방패막이 돼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동세상1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참고서적 : <청계, 내 청춘>, 안재성, 돌베개



태그:#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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