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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금)

땅끝마을에서 쉬어갈 생각이었다. 30일 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이틀밖에 쉬지 못했다. 무리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제까지 하루 평균 80km 이상을 달리고 있다. 90km를 넘은 적도 여러 날이다. 기계도 고장이 날 판인데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있을까? 그래서 땅끝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쉬어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내 맘에 꼭 드는 모텔 주인을 만났다. 자전거를 방 안 현관에 들여놓는 걸 허락해 줬고, 방값을 2만 원밖에 받지 않았다. 최소 1만 원 이상을 깎아준 거다. 자전거여행자가 처한 현실을 100% 이해하는 주인이었다. 방은 호텔 부럽지 않게 깨끗하고 따뜻했다.

지금까지 30일을 밖에서 먹고 자면서 이렇게 화려한 조건을 갖춘 집은 없었다. 헛간이나 다름이 없는 여관이 2만5천 원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어느 정도 피곤이 가실 때까지 쉬고 싶었다. 내 집처럼 편안했다.

그런데 어젯밤, 방 안에 앉아 기사를 작성한 다음, 마지막으로 송고를 하려고 무선인터넷을 연결하는데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는 게 아닌가. 이건 아니야, 수긍하기 어려운 현실이라 계속 접속을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메시지는 똑같았다. 결국 오늘 아침, 눈물을 머금고 짐을 싸야만 했다.

할 수 없이 땅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땅끝 갈두선착장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해안가 산 중턱으로 도로가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길을 달려가야 한다.
 땅끝 갈두선착장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해안가 산 중턱으로 도로가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길을 달려가야 한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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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을 떠나 완도 가는 길, 남성리라는 마을을 지나가는 절벽 위 도로에서 내려다보는 바닷가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마을 앞에 포구가 있고, 포구 앞 바다에 소나무를 이고 선 작은 바위섬이 홀로 떠 있다. 당연히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진을 몇 장 찍지 않아, 카메라에 메모리 카드가 가득 찼다는 메시지가 뜬다. 아뿔사, 그 사이 이틀이나 메모리 카드를 비워 놓는 걸 잊었다. 하루 2기가 정도의 사진을 찍으니까, 4기가 용량밖에 안 되는 메모리 카드를 어제는 비워 놓았어야 했다.

할 수 없이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컴퓨터를 켜고는 메모리 카드에 있는 사진을 옮겨 담는다. 이 작업은 다행히 도로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넓은 공간이 있어 가능했다. 사진 옮겨 담는 작업을 하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새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마을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풍을 맞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할머니의 말이 '뭐하냐', '어디서 왔냐' 등으로 시작해 '힘들지 않느냐', '이제 어디로 갈 거냐'는 말로 이어진다. 한동안 참으로 느리면서도 긴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러는 사이 마을 할머니 두 분이 더 나타나더니 그때부터는 중구난방 맥락이 없는 이야기판이 벌어진다.

그 할머니들 덕에 앞바다에 떠 있는 바위섬이 '감투섬(지도에는 감토도라고 표기되어 있다)'이고, 바다를 온통 뒤덮다시피한 부표가 전복양식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복양식을 얼마나 크게 하는지, 지금은 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전복 양식에 매달리고 있고 그 바람에 마을 앞바다에서 아직도 고기가 많이 잡히는데도 고기를 잡으러 나갈 새가 없다는 말도 들었다.

헤어질 때가 돼서는 할머니들한테서 조심해서 가라는 말과 함께 힘들 텐데 잘 먹고 다니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분들의 음성과 표정이 먼 길을 떠나는 자식을 배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 역시 마치 고향마을을 떠나는 것 같은 서운한 감정에 젖는다. 이럴 때는 내 나라 내 땅에서 여행을 한다는 게 결국엔 오래전에 잊힌 내 고향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온 마을이 어릴 적 내가 살았던 고향마을인 셈이다.

남성리 가기 직전의 사구미해수욕장.
 남성리 가기 직전의 사구미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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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리 해안도로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
 남성리 해안도로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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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리 언덕을 내려오면 절벽 길도 끝이 나고 더불어 '경치좋은길'도 끝난다. 그러면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역풍이 불기 시작한다. 매우 강한 바람이다.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데도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페달을 밟아야 한다. 힘이 두 배로 든다. 이 상태로 완도까지 가는데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다. 나중에는 걸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완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달도를 지나야 한다. 달도로 들어가는 다리가 2개다. 모두 남창교다. 하나는 헌 다리, 하나는 새 다리다. 헌 다리로는 차가 다니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는 나는 당연히 헌 다리로 지나간다. 그리고 달도로 들어서 한참을 달리다 보면, 완도교와 함께 그 옆에 한창 공사를 서두르고 있는 완도대교가 나온다.

그리고 그 중간에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오래되고 낡은 다리가 보인다. 다리만 무려 3개다. 그 다리들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다리의 변천사라도 보고 있는 것 같다. 가운데 있는 다리가 1세대, 현재 통행이 가능한 완도교가 2세대, 아직도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완도대교가 3세대다. 3세대가 나타날 때까지 1세대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모습을 보는 마음이 왠지 짠하다.

완도교는 육지와 섬을 잇는, 혹은 섬과 섬을 잇는 다른 다리들과는 달리 길이가 매우 짧은 편에 속한다. 섬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라, 마치 육지의 강을 건너는 다리 같다. 그래서 그런지 완도교를 넘고 나서도 드디어 완도라는 섬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힘들다.

다리가 한꺼번에 3개나 걸쳐 있는 완도.
 다리가 한꺼번에 3개나 걸쳐 있는 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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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것도 힘이 들다니...

완도로 들어서서는 바로 바닷가 쪽으로 뱡향을 튼다. 하지만 일몰공원 부근까지는 내륙을 지나가는 77번 국도여서 바다를 볼 수는 없다. 완도에서는 추수가 거의 끝나간다. 해남을 지나올 때까지만 해도 추수를 하지 않은 논이 더 많았던 것과 비교된다. 날씨도 더 따뜻한 느낌이다. 육지에서는 더 이상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완도로 들어서면서 바람막이 점퍼를 벗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간만에 이마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몰공원을 지나면서 산허리를 감아 도는 절벽 길이 시작된다. 절벽 위를 지나가는 이 도로는 드라마 <해신> 세트장이 있는 곳까지 이어진다. 절벽을 오르내리는 길이기는 하지만, 이전의 길들과는 달리 높낮이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해신> 세트장은 정문 사진 하나만 찍고 그냥 지나친다. 경치가 남다른 데가 있기는 하지만, 바닷가 세트장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올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걸어 다니는 것마저 자전거를 타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이곳의 입장료는 성인이 5천원이다.

추수가 끝난 완도 들판
 추수가 끝난 완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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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한 해안도로
 완도의 한 해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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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로 들어선 이후로 마땅히 쉬어갈 만한 곳이 없다. 중간에 일몰공원이나 미소공원 같은 절벽 위 공원이 2군데 있기는 하지만, 오래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마침 햇빛이 역광인 데다 경치도 단조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정도리의 구계등에서 한참을 쉬어 간다. 해변에 동글동글한 돌밭이 1km 가까이 펼쳐져 있다. 해변 위로 돌밭이 9개의 계단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서 구계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실제 자갈이 크기별로 여러 개의 층을 형성하고 있다. 바닷가의 모난 돌이 오랜 세월 파도에 쓸리면서 서로 부딪혀 모가 깎여 오늘날의 구계등을 만들게 됐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 세월이면, 모난 돌이 아니라 모난 정도 둥근 정이 되었을 법하다. 세월이 지나면 세상 모든 게 다 둥글둥글해지기 마련이다. 마음도 둥글, 몸도 둥글. 구계등 둥글둥글한 해변 위로 숲 속 산책로가 놓여 있다. 마치 동굴을 뚫어놓은 것 같이 깊고 어두운 숲이다.

구계등 언덕 위, 숲 속 산책로
 구계등 언덕 위, 숲 속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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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등
 구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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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등을 나와 완도항까지 내처 달린다. 가능하면 해가 지기 전에 완도타워에 올라가야 한다. 완도타워에서 서쪽 하늘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워 정상까지 나 있는 가파른 언덕길을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는 동안에 그만 등 뒤로 해가 지고 만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완도타워에서 해가 진 완도 시내와 항구를 내려다본다. 도시가 꽤 크고 화려하다. 섬이라고 느끼기 힘든 풍경이다. 완도에 와서는 정작 완도가 섬이라는 사실을 잊고 만다. 오늘 달린 거리는 60km, 총 누적거리는 2207km다.

완도타워
 완도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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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타워 올라가는 길에 내려다본 완도항
 완도타워 올라가는 길에 내려다본 완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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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의 완도항
 해질 무렵의 완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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