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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동쪽의 땅 안동(安東), 한때 이곳을 번질나게 다녔었다. 그러기를 한참, 하회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붐비기는 매한가지지만, 부용대는 예전 알 만한 사람들만 찾아가는 비장의 여행지였다. 그 후 부용대가 각종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하나둘 찾는 이들이 늘어났고 산중 오솔길은 우마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대로가 되었다. 산길이 반들반들 윤이 날 즈음 여행자는 부용대로 가는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면 하회마을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보인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면 하회마을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보인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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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서산으로 서서히 질 무렵 영주 무섬마을을 떠났다. 굳이 이맘때가 아니더라도 하회마을과 부용대는 몰려든 인파로 북새통일 거라는 짐작에서였다. 해가 지면 그나마 한가로이 하회마을과 부용대를 거닐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러 늦게 도착할 생각이었다. 화천서원에 도착하니 시간은 다섯 시를 조금 앞두고 있었다.

부용대로 가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대개 화천서원에서 옥연정사를 지나 부용대로 올라 겸암정사에서 다시 화천서원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 하나고, 반대로 겸암정사에서 부용대, 옥연정사, 화천서원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겸암정사로 돌아오는 길이다. 나머지 하나는 하회마을에서 부용대 아래 선착장까지 운행하는 배를 타고 부용대를 돌아보고 다시 하회마을로 가는 방법이다.

서애 류성룡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지은 정자이다. 낙향한 후 그 유명한 <징비록>을 이곳에서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 옥연정사 서애 류성룡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지은 정자이다. 낙향한 후 그 유명한 <징비록>을 이곳에서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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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가 택한 길은 화천서원 앞으로 난 길을 택하여 옥연정사를 거쳐 부용대를 오른 후 겸암정사에서 다시 화천서원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이 동선이 부용대와 하회마을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길이다. 똑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어떤 동선을 잡느냐에 따라 그 감동은 달라진다. 동선을 잡을 때 가장 기본은 '점입가경'

화천서원은 음악회 준비로 분주했다. 화천서원은 겸암 류운룡을 받들기 위해 1786년에 지은 서원이다. 서원 앞으로 난 길로 접어들면 연이어 옥연정사가 나온다. 서애 류성룡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지은 정자이다. 낙향한 후 그 유명한 <징비록>을 이곳에서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옥연정사 앞 언덕에서 본 하회마을
 옥연정사 앞 언덕에서 본 하회마을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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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사를 지나니 제법 널찍한 터가 나온다. 빈터를 둘러싼 노송 사이로 붉은 저녁 햇살이 드러눕는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나루를 떠나는 사람들로 절벽 아래는 분주하다. 한 아가씨가 강변 풍경을 예쁘게 담고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은 연인은 강물을 다정하게 적시고 있었다.

하회마을의 낙동강 모래톱, 끝내 사라질까?
 하회마을의 낙동강 모래톱, 끝내 사라질까?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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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벼랑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었다. '층길'이라고 불리던 이 길은 류성룡의 옥연정사와 류운룡의 겸암정사를 잇는 길이었다. 부용대 절벽 중간의 허리 부분을 잇는 길이 지금도 보였으나 출입을 하기에는 다소 위험해 보였다. 옥연정사 옆으로 난 산길을 올랐다. 다소 가파른 길이지만 숨 한 번 크게 쉬면 이내 부용대에 이를 만큼 가까운 거리다.

하회마을과 부용대를 오가는 배
 하회마을과 부용대를 오가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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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는 이곳 또한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여행자가 보기에는 이곳이 부용대 정상보다 하회마을을 더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부용대 꼭대기에서는 탁 트인 하회마을의 전경은 좋은 데 비해 다소 평면적으로 보이는 흠이 있다. 사진으로 보면 더욱 그러하다.

황금빛에 물든 하회마을. 이맘때가 가장 아름답다.
 황금빛에 물든 하회마을. 이맘때가 가장 아름답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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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민속마을이라는 틀에 박힌 이미지보다 곡식이 알알이 영글어 가는 저 들판으로 인해 하회는 오랜 시간의 생명이 아직도 꿈틀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풍으로 붉게 그려진 풍경의 아름다움보다 면면히 이어온 들판의 생명력이 더 감동적이었다. 살아있는 하회마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건 바로 이맘때가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하회마을의 물돌이를 한없이 지켜보다 부용대 끝에 올랐다. '부용(연꽃)을 내려다보는 언덕'이라는 뜻인 부용대는 하회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하회마을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보인다.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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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한 것처럼 부용대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화천서원 옆길로 난 부용대 산길은 포장만 안 되었을 뿐이지 그야말로 큰길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풍광을 즐기는 것은 다행이지만 예전의 고요함은 찾을 수가 없었다.

원지정사
 원지정사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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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겸암정사로 향했다. 부용대에서 겸암정사까지는 100여 미터에 불과하지만 조붓한 오솔길이다. 나무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풍경이 한적하다. 벼랑 끝에 서서 하회마을을 담고 있는 사진가의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부용대 벼랑 끝에 서서 하회마을을 담고 있는 사진가
 부용대 벼랑 끝에 서서 하회마을을 담고 있는 사진가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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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 서쪽 아래에 있는 겸암정사는 중요민속자료 제89호로 지정된 곳이다. 겸암 류운룡이 1567년에 세워 도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겸암정'이라는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쓴 글씨다. 누마루에 올라서면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물과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맑고 깊은 낙동강물
사립문에 들어오려 하고
천리에 먼 배들
여기 오기 드물구나.
....
- 정임당 류길이 류성룡의 부친인 류중영의 집을 노래한 '하회도시河回圖詩' 중에서

겸암정사는 중요민속자료 제89호로 지정된 곳이다. 겸암 류운룡이 1567년에 세워 도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 겸암정사 겸암정사는 중요민속자료 제89호로 지정된 곳이다. 겸암 류운룡이 1567년에 세워 도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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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주위를 한참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숲에서 들려왔다. 부용대에서 기다리던 딸아이의 목소리였다. 해가 지고 있어요. 음악회 보러 가자고요. 탈춤 보러 간다고 했잖아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리나케 숲으로 뛰어갔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하회마을, #부용대, #겸암정사, #옥연정사, #화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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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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