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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박용만은 독립운동사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언론사에서도 큰 별이다. 그의 어휘 선택은 감각적이다. 1백 년 전 신문을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다. '굿바이 신한국보, 헬로우 국민보. 신문 이름을 고치는 이유...' 이것은 1913년 8월 13일자 '국민보'에 나오는 머리기사 제목이다.

 '국민보'라고 개제한 후 첫 번째 신문. 기사읽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도록 바뀌었다.
 '국민보'라고 개제한 후 첫 번째 신문. 기사읽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도록 바뀌었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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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XX, 헬로우 YY'라는 표현은 미국서 아직도 친숙하다. 'Goobye Summer, Hello Fall(안녕 여름, 환영 가을)'이라든가 'Goodbye Obama, Hello Palin(꺼져 오바마, 방가 페일린)'이라는 댓글 제목으로도 쓰인다. 오바마는 민주당 현직 대통령이고 페일린은 공화당 차기 대선 후보로 꼽히고 있으니 이 댓글은 공화당원이 달았을 게다.

박용만이 하와이로 온 건 '신한국보'의 주필로 초빙 받았기 때문이다. 말이 신문사이지 그 형편은 곤궁했다. 그동안 논의됐던 신문의 제호를 '신한국보'에서 '국민보'로 바꾼 건 1913년 8월 13일. 그는 감각적인 문체로 그 정황을 긴 논설로 썼다.

"서산에 달이 떨어짐이여 동천에 해가 돋도다. 신한국보의 늙은 얼굴이 변함이여 국민보의 새 이름이 생겼도다. 청컨대 동포들은 달이 떨어지는 것을 한하지 말라. 태양의 빛이 더욱 밝으리라. 신한국보는 이제 250호에 그치고 국민보는 다시 1호로 좇아 시작하나니 이는 우리 신문계에 한 번 새 시대를 만드는 것이라. 오늘은 이것이 과연 당신들의 신문이요, 당신들의 기관이라. 그러므로 국민보는 오늘부터 일반국민과 국민공회에 대해 동일하게 충성을 다하며 동일하게 이익을 도모코자 하노라.(하략)"

'신한국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와 이름이 비슷해서 혼동을 주었다. 하와이 초창기에는 신민회니 친목회니 혈성단이니 이런저런 단체들이 많았다. 단체 통합운동이 일어나 1907년 9월 한인합성협회가 조직됐고 다시 미주와 합동해서 1909년 2월 1일 국민회가 결성됐다. '국민보'는 '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이기 때문에 제호도 그렇게 바꾼 것이다.

신문을 박아내는 건 피눈물 나는 일이었다. 낡은 인쇄기는 걸핏하면 고장이 났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를 찾아 가려면 얼굴에 철판부터 덮어야 했다. 원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부르짖는 주제에 원수의 신세를 져야 했던 것이다. 박용만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일본 영감은 돈을 받고 박아주면서도 자주 개골(성)을 내고 괄시가 심해 차라리 백정질을 할지언정 국민보 일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10월 4일자 신문에 박용만은 그의 심사를 이렇게 적는다. 직원들은 7월부터 월급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국민보의 붓을 용만이 맡은 후에 용만은 스스로 원하고 결심하기를 우리는 비록 천척갱참에 빠질지라도 비관적 생각은 마음에 두지 말고 백척간두에 당할지라도 겁내는 태도는 얼굴에 보이지 말고 오직 비참한 가운데서라도 노래로 화답하며 위태한 위에서라도 화기를 유지하여 이 주의를 우리가 없어지는 날까지 지키자 하던 바라. 그러하나 오늘은 국민보의 형세와 국민보 사원들의 정형이 백척간두에 끝까지 다 올라왔고 천척갱참 밑까지 다 내려와 이제는 한 걸음도 더 나갈 곳이 없고 한 치도 더 들어갈 곳이 없느니 오호라 어느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광명한 빛을 보내며 어느 부처님이 우리를 위해 자비한 손을 들어주리오. 이것을 능히 할 자는 오직 국민보와 고락을 같이 하고 화복을 함께 하는 하와이 동포 5천 명 뿐이나, 국민보가 스스로 아는 바에 우리 동포의 힘이 원래 박약하고 우리 동포의 남을 돕는 것이 또한 번다하여 오늘은 비록 눈동자같이 사랑하고 어금니같이 아끼는 국민보의 생명이 위태하다 하여도 능히 도울 수 없는 바에 어찌 하리오.(하략)"
        
박용만의 언술에서 느끼는 건 문장과 어휘가 물 흐르듯 거침이 없고 가슴에 즉각 와 닿는다는 점이다. 박용만은 차츰 '국민보'의 난경을 극복하고 신문을 업그레이드했다. 주1회 발행을 2회 내지 3회로 늘리고 지면 수도 늘려 문화와 교양, 스포츠 등 내용도 다양하게 꾸몄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국민보'는 발행을 계속, 1945년 광복의 감격도 맛보았고 1963년까지 장구한 생명을 이어갔다.

 김옥균(1851-1894)
 김옥균(1851-1894)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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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10월 22일은 이전 제호의 신문을 포함 '국민보'의 6주년 기념일이었다. 박용만은 논설에서 그의 언론관을 늘어 놓았다. 조선 국문으로 신문이 처음 발행된 건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행하고서부터였다. 박용만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을 개화의 선각자로 보았다.

김옥균은 5천년 흑암천지에서 유신사상을 고동하였고 박영효는 5백년 정치제도를 변경해 일반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와 인민의 의무 권리를 분간하게 했다. 서재필은 미국의 자유사상과 독립사상을 수입해 독립협회로 인민의 창자를 흔들고 독립신문으로 인민의 이목을 한번 들어 전국을 움직이매 다 그 풍조에 밀려 새 정신을 받게 했다.

                 
 서재필(1864-1951)
 서재필(1864-1951)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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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에 대해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은 1898년 1월 1일 '협성회보' 발간에 참여했고, 이어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발행에 동참했다.

협성회보나 제국신문이나 순전한 조선국어로 발행해 이승만의 거대한 공업은 천지가 없어지는 날까지 잊을 수가 없다고 썼다. 그러나 러시아가 부산 절영도에 석탄고 짓는 것을 반대한다는 논설 외에는 이승만의 논설들은 별로 뚜렷한 게 없다. 논설들의 수와 질에 있어 박용만은 이승만을 압도한다.

신한민보에 쓴 '조선민족의 기회가 오늘이냐 내일이냐(1911.03.29)' '정치적 조직의 계획(1911.05.17, 24, 31)', '국민적 상식을 비하라(1911.09.20)' 등과 국민보에 쓴 여러 논설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주옥같은 글들이었다. 그 논설들은 방황하는 독립운동에 방향을 제시하고 이념적 틀을 제공했다.

 박영효(1861-1939)
 박영효(1861-1939)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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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를 전후해서 국내외에서 발행되던 모든 신문들은 소멸됐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오는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만 살아남았다. 그 암울한 시기에 박용만은 두 신문의 주필로서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100년이 훌쩍 지난 오늘에도 표현력이 신선하고 논리가 정연한 수많은 논설들을 읽으면 한국 언론사에서 박용만의 위상을 다시 가늠케 된다. 종이는 삭고 글자는 희미해졌지만 큰 별의 광채는 아직도 스러지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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