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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청송 주왕산

 

경북 영천에서 편지를 전한 지 나흘 만입니다. 요며칠 마음이 어지러워 두서없이 여정을 밟았습니다. 예보대로 영천에 있던 사흘째 날엔 큰 비가 내렸는데, 우천을 뚫고 청송으로 가서 그 다음날 주왕산에 오르고, 어제(13일) 오전 의성에 와선 내내 잠을 자다 오늘은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점심 무렵 어쨌든 숙소를 나왔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 건지,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이어서 몇 걸음 옮기는데 의성전통시장이 보였습니다. 2일과 7일에 장이 서는데 해당 날이 아니라 장터 안은 한산했습니다.
 
무엇을 봐도 흥이 안 나던 참에 되레 그 휑뎅그렁함이 맘을 움직였습니다. 아무 기대없이 골목길을 따라 가니 하나둘 문을 연 가게도 있었습니다. 개중에 가난한 서민들 가슴팍 적시는 탁주집, 참기름내 진동하는 낡은 방앗간 앞에 잠시 섰습니다. 그리고 이날 처음 대화를 한 게 대여섯 아낙들 둘러 앉아 마늘을 다듬는 어느 상점에서였습니다.  
 
고단한 삶에 팔자 좋아 놀러나 다닌다 싶을 여행자가 반가울 리 없겠건만, 사진 한장 찍어도 되냐 하니 흔쾌히 "그래라" 했습니다. 잠시 잠깐 머물며 제 보고싶은 것만 보고 떠나는 여정이, 과연 바라는대로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여러날 마음을 짓누르는 물음입니다.   
 
 마늘 손질하는 아낙들

 
아주 조금 훈훈해진 마음으로 시장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는데 마침 버스 한 대가 섰습니다. 옥산면 가는 차였는데, 아침에 봤던 '갤러리에서 만나는 옥빛골 사과' 기사가 생각 나 얼른 올라 탔습니다. 옥빛골은 사과로 유명한 옥산면의 별칭인데, 이곳 농민들이 대구 모 처에서 사과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었단 내용이었습니다.  
 
시골 버스의 장점 중 하나는 요금이 후불제란 겁니다(다 그렇진 않습니다만). 충동적으로 버스를 타긴 했는데 옥산면 어디에 가냐 묻는 기사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풍경 좋은 데서 내릴거라 하니 그럼 그때 가서 알려달라 했습니다. 가는 데까지 가서 이동한 만큼의 차비를 정산하면 되니 편했습니다. 
 
시골 버스의 또다른 장점을 꼽으라면 '가족버스' 같은 훈훈함입니다(역시 다 그렇진 않습니다만).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할머니 승객 여럿이 차에 올랐는데, 이때부터 차 안은 시끌벅적한 대화의 장이 됐습니다. 대개 뉘집 숟가락이 몇 개다 할 만큼 오랜 이웃사촌인 듯 바로 어제에 이은 안부가 오갔습니다. 
 
그 사이 버스는 산길을 지나 다시금 양옆에 민가가 있는 마을로 진입했습니다. 집이 가까운 할머니들은 굳이 정류소가 아니라도 "나 저기 좀 세워줘"하고 내릴 채비를 했고, 기사는 순순히 속도를 줄여 차를 세웠습니다.  
 
할머니들 대부분 힘에 부치는 짐을 들었거나, 무릎이나 허리가 성하질 않아 하차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도시 같았음 "아, 빨리 내리세요! 뒤에 사람 안 보여요?" 같은 핀잔이 들릴 법 한데, 아들뻘 되는 기사는 연신 "조심하세요. 서둘지 말고 찬찬히 내리세요"를 반복했습니다.
 
 시골버스 안 풍경

 
네 번째던가 할머니 두 분을 따라 저도 내렸습니다. 오면서 봤던 길이 예뻐 거기서부터 다시 걸어 나가면 좋을 듯해서였습니다. 하차해서 보니 '관덕2리'란 곳이었습니다. 한낮의 시골마을은 앞서 들른 장터처럼 썰렁했습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조금 전 차에서 함께 내린 할머니 한 분을 쫓아 우측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만만한 산 아래 넓게 펼쳐진 논밭엔 작물들이 가득했습니다. 빨갛고 파란 고추가 한가득이면 그 옆엔 잎사귀 무성한 콩밭이 이어지고, 그 밭 가장자리엔 어른 키만한 옥수수가 자랐습니다. 조용하던 벼논 안에선 인기척을 느낀 참새들이 떼로 날아올라 제가 되레 움찔했습니다. 
 
누구집 담벼락 옆 대추나무엔 대추가 탐스럽게 열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따서 옷에 슥슥 닦은 뒤 입에 넣었습니다. 주름진 붉은 대추와 달리 탱글탱글한 연둣빛 대추는 약간 싱거운 사과맛이 나는데 아주 별미입니다. 남은 대추씨는 다시 나무가 되길 바라며 우거진 풀숲에 던졌습니다. 시골길 걷는 큰 즐거움입니다. 
 
 누구네 담벼락 옆 대추나무

 
다음은 담이 낮고, 혹은 대문이 아예 없는 집들 사이를 걸었습니다. 인기척 없는 시골집엔 공통된 풍경이 있었는데 대부분 처마를 덧대거나 가건물을 세워 그 천장에 마늘을 매달아둔 것입니다. 의성 하면 한우와 함께 마늘이 유명하지요. 역시나 어느 집에선 소도 볼 수 있었는데, 낯선 이의 시선이 불편한 송아지가 엄마소 옆에 바짝 붙어 경계를 했습니다.
 
마을 한 바퀴를 다 돌고 대로변으로 나오니 차 안에서 눈여겨 봤던 고택이 보였습니다. '덕천사'라는 한자로 된 비석 외엔 장소의 유래를 알 길 없었는데, 마침 옆집서 나온 할머니가 호기심을 풀어줬습니다. 그 분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이 마을 어느 열녀(烈女)를 기리는 사당임엔 틀림없다 했습니다. 열녀라니… 생각만 해도 안쓰럽기 그지 없습니다.
 
 관덕2리에 살던 어느 열녀(烈女)를 기리는 사당
 
열녀 사당을 끝으로 관덕 2리에서 나와 관덕 1리로 향했습니다. 2리와 지척인 1리지만 이곳 풍경은 사과 농장이 주를 잇습니다. 버스로 달려온 길 양옆으로 아이 주먹 만한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렸는데,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아삭 베어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상품으로 기르는 것들이니 양해 없인 안 되는 일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단순한 육체노동이 도움이 된다 하지요. 물론 사과를 먹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과수일을 도울 수 있을까 해서 어느 농장 안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제법 안쪽까지 걸어갔을 때 작업 중인 주인 부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당장 일손이 필요치 않다 했습니다.
 
남을 돕는 일도 맘만 앞서선 되질 않는다 생각하는데 아저씨가 가다 먹으라며 사과 네 개를 툭툭 따서 줬습니다. 사양을 해도 "여기선 흔한 게 이거(사과)"라며 손에 안겨 줬습니다. 그러는 중에 내내 궁금했던 사과에 대한 상식도 얻었습니다. 어째서 같이 자란 사과가 어느 것은 파랗고 어느 것은 붉은가 했더니, 연두색은 겨울에 수확하는 부사이고 붉은 것은 추석 대목에 맞춰 내놓는 홍로였습니다.
 
 파란 것은 부사, 빨간 것은 홍로

 

바로 다음 농장에서도 퇴짜를 맞고 머쓱해서 나오는데 이번엔 반대편에서 땅콩을 수확 중인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 아니지 싶어 다가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할머니는 웃는 눈으로 인사를 받으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작고 마른 몸에 할머니 상체 만한 땅콩더미를 힘차게 내리쳐 떨어진 콩들을 주워담는 작업이었습니다.

 

혼자 일을 하시냐 물었더니 "영감이 있는데, 집에서 술 먹고 잔다" 했습니다. 잠시 콧등을 찡긋했지만 그런 할머니 얼굴엔 초연함이 묻어 났습니다. "일 안 하는 할아버지, 밥도 주지 말지 그러셨어요?"했더니 "그럼 또 난리치는데… 안 건드리는 게 내가 편해"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웃는 할머니를 보며 다시금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헛헛해져 일어서 가려는데 할머니가 밭 옆에 세워둔 유모차에서 비닐을 꺼내오라 했습니다. 땅콩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봄여름 이어 가을 내내 땀흘려 키운 곡식들을 다들 어찌나 후하게 내어주시는지…. 차마 죄송해서 짐이 무겁단 핑계를 대고 끝내 마다했습니다. 그래도 "감사하다" 인사하고 자리를 뜨는데 "뭐 해준 게 있어야 감사하지"하는 미소 번진 촌로의 얼굴이 뒤따랐습니다.

 

 땅콩 수확하는 할머니
 
다시 혼자가 된 길, 문득 지나온 길을 돌아 봤습니다. 앞으로 이어진 길도 봤습니다. 그리고 여지껏 길 위에서 만난 인연과 풍경들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생각했습니다. 분명 애정과 신념을 갖고 들어선 길이지만, 지금 이 여정이 그저 자족적인 데서 그치고 있단 자괴감이 저를 괴롭힙니다. 
 
어느 때는 덧없게만 느껴지는 이 생을, 그렇다고 그저 흘려보낼 수도 없습니다. 이 고독한 운명을 진정으로 위안하는 길은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 외에 도리가 없지 싶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어찌해야 정처없이 떠도는 부평초가 아닌, 눈물겨운 삶에 뿌리박고 희망을 키우는 농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막막함에 조금 운 날이었습니다.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와 다음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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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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