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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 광장에서 바라본 연길 시가지. 연길을 상징하는 꽃이 진달래랍니다. 독립군들이 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해서 시민들도 무척 아낀다고 하더군요.
 기차역 광장에서 바라본 연길 시가지. 연길을 상징하는 꽃이 진달래랍니다. 독립군들이 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해서 시민들도 무척 아낀다고 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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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시간을 꼬박 기차에서 보냈는데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지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쉬웠다. 짐을 챙겨 대합실을 빠져나가자 인구 40만의 연길(옌지)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광장 건너편 6층 건물 간판에 적힌 '국가급 위생도시를 건설하고, 건전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향수하자'라는 글귀는 조선족자치주를 대표하는 연길시의 시정목표를 적어놓은 것 같았다. 한글 간판이 많아 새로 건설한 수도권 신도시에 온 기분이었다.

인솔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고 조금 있으니까 가을에 수확한 상수리처럼 귀엽고 암팡지게 생긴 20대 여성이 활짝 웃으며 달려오더니 인사를 했다. 연길에서 머무는 3박4일 동안 함께 움직일 가이드였다.

일행 중에 누군가가 "배고파 죽겠어요, 우선 민생고부터 해결합시다!"라고 했다. 필자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집에서부터 중국에 가면 다양한 음식을 맛봐야겠다고 다짐해서인지 때가 되면 배가 고팠고, 새로운 메뉴가 기대됐다.

'민생고 해결'의 뜻을 알아차린 가이드는 "그렇잖아도 예약해놓았습니다. 식당으로 가시지요"라며 버스로 안내했다. 버스 창으로 비치는 연길 거리에서는 한국 정서가 짙게 묻어났다. 반갑고 신기한 마음에 눈에 들어오는 한글 간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버스를 20분 가까이 타고 찾아간 식당은 간판이 '청와대'였다. 국내에서 이렇게 간판을 달아도 허가를 내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맛이 최고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시식을 해보니까 필자가 사는 마을 면사무소 식당만도 못했다.

조·중·러 국경지대에서 휴전선을 생각하다

한식당에서 중식도 아니고 한식도 아닌 정식으로 '아점'을 먹고, 휴식을 취할 여유도 없이 조·중·러 국경과 홍범도 장군 유적지가 있는 훈춘, 방천 지역으로 출발했다. 그때 시각이 오전 10시 50분이었다.

중·러 국경을 표시하는 철책. 한 민족이 왜? 누구 때문에 무기를 들고 60년 넘게 대치하고 있어야 하는지, 시원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중·러 국경을 표시하는 철책. 한 민족이 왜? 누구 때문에 무기를 들고 60년 넘게 대치하고 있어야 하는지, 시원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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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두만강과 북한 산야를 오른쪽으로 끼고 달렸다. 강 건너가 북한땅이라는 가이드 말에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탄성이 터졌다. 강폭이 좁아질 때는 당장에라도 건너갈 것 같았다. 그러나 반갑기보다는 장애를 앓는 형제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1시간쯤 달려 훈춘에 도착하자 박영희 시인은 조선족의 만주 첫 이주지가 용정과 훈춘으로 의견이 갈리는데 자신은 러시아와 근접한 훈춘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나라 때 훈춘은 버려진 공간이었는데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넘어와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관망만 하던 청나라가 이웃한 러시아를 상대로 방패 삼으려고 했던 게 훈춘을 꼽는 첫째 이유라는 것. 

지도를 놓고 두만강 하류를 보면 조·중·러 3국이 서로 견제하듯 국경이 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동해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지만, 조·러 국경에 막혀 나가지 못하고, 조선 역시 두만강을 거슬러 중국에 가지 못하고, 러시아에 입국해서 육로를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구 25만의 훈춘은 중국에서 러시아로 통하는 관문이며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도시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개발붐을 타고 부동산 값이 치솟으면서 역사의 흔적이 점차 사라지고 있단다.  

망해각에서 바라본 두만강 하류. 다리 앞 망루 아래 토자비가 서 있고, 강을 중심으로 좌측 늪지는 러시아 영토, 우측은 북한. 조·러 철교위로는 아스라이 동해가 보입니다
 망해각에서 바라본 두만강 하류. 다리 앞 망루 아래 토자비가 서 있고, 강을 중심으로 좌측 늪지는 러시아 영토, 우측은 북한. 조·러 철교위로는 아스라이 동해가 보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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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을 지나 최북단을 넘어 중국, 러시아, 조선이 만나는 국경지대에 위치한 방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사구공원과 망해각, 토자비 등 명소가 많았다. UN이 정한 '습지생태 자연보호지역'이기도 했다. 가이드는 방촌을 "닭 울음소리 3국에 들리고, 개 짖는 소리가 3국을 깨우며, 꽃향기가 사방에 풍기고 웃음소리 이웃나라에 전해지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망해각에 오르니까 3국 국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잿빛 두만강은 분단의 아픔을 잊은 듯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 위로는 북한의 두만강시와 러시아 하산을 연결하는 조·러 대교가 지나고 있었고, 그 아래에 조·중·러 국경의 꼭짓점으로 알려진 '토자비'가 서 있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니까 숲 속으로 철책이 지나갔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표시란다. 도둑이 들지 못하도록 쳐놓은 과수원 철조망 담을 연상시켰다. 중·러는 상징적이지 국경이란 개념이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이 부러웠다. 한 형제요 동포라는 사람들이 철책을 겹겹이 쳐놓고도 불안해서 곳곳에 지뢰를 묻어놓고, 그래도 믿지 못해서 반세기가 넘도록 대포와 총을 겨누고 있는 휴전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독립군 세력 커지는 계기가 된 '봉오동 전투' 유적지

도문시 인민 정부가 세운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박영희 시인이 봉오동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중국은 ‘항일’을 ‘반일’로 표기하고 있었음)
 도문시 인민 정부가 세운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박영희 시인이 봉오동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중국은 ‘항일’을 ‘반일’로 표기하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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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을 '봉오동 전투' 유적지로 돌렸다.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포문을 연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삼둔자 전투'로 시작됐다. 삼둔자는 두만강 북쪽 대안의 마을 이름이었다. 태극기 모자를 즐겨 쓰고 다녔던 홍범도 장군이 고국을 바라보며 "아! 내가 실로 몇 년 만에 고국산천을 바라보는 것이냐!"라고 탄식하던 곳이었다고.

삼둔자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대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며 봉오동 독립군 기지와 두만강가의 산(고려령)을 목표로 삼았다. 고려령을 넘으면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주둔하던 봉오골이 나오는데, 이곳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단다.

'청산리대첩'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무장독립투쟁으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독립군은 장교 1명, 병사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세력이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10월의 청산리대첩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다.

봉오저수지 전경. 여느 강처럼 본류가 있는 게 아니고, 부근 산에서 내려온 물을 저장해놓은 저수지라고 합니다.
 봉오저수지 전경. 여느 강처럼 본류가 있는 게 아니고, 부근 산에서 내려온 물을 저장해놓은 저수지라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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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유적지에는 도문시 인민정부에서 봉오동전투를 기리는 기념비(1993년 건립)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뒤편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봉오 저수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드넓게 펼쳐진 봉오골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만주를 가다> 저자 박영희 시인은 홍범도 장군과 봉오골 주민들과의 사연, 일본군의 잔인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수지가 있는 이곳은 800 고지인데, 여섯 개 마을이 있었어요. 홍범도 장군 때문에 가장 괴로웠던 사람들은 바로 이곳 주민이었지요. 그래도 파발이 와서 농사를 지으라고 하면 일하고, 몸을 피하라고 하면 피하면서 협조를 합니다. 그렇게 주민의 협조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요.

일제는 항상 마지막에 잔혹한 학살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투가 끝나고 이곳의 많은 주민이 일본군에게 희생을 당했지요. 얼굴 가죽을 벗겨버린다든가, 쇠꼬챙이로 양쪽 귀를 뚫는다든가···. 유대인 학살도 그러지는 않았어요. 전쟁은 이해하겠는데 민간인 학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려요. 그래서 일본을 용서하기가 어려워요."

안중근 의사가 3개월 동안 머물렀던 초가집. 처음엔 빈농이 사는 농가로 보였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3개월 동안 머물렀던 초가집. 처음엔 빈농이 사는 농가로 보였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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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바라본 안방. 함께 방문했던 학생은 안중근 의사가 왜 이렇게 누추한 산골짝 집에서 지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부엌에서 바라본 안방. 함께 방문했던 학생은 안중근 의사가 왜 이렇게 누추한 산골짝 집에서 지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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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기념비 앞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왜놈들과 싸우다 숨져간 항일 독립군 영령들에게 묵념을 올리고 나니까 오후 6시10분,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 훈춘시 권하촌에 있는 안중근 유적지를 들러보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려 시골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까,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가기 전 마지막 3개월을 머물렀다는 초가 한 채가 나타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락을 받은 안중근은 이번에는 꼭 처단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하얼빈으로 가던 중 이곳에서 계획을 짰다고. 

홀로 서 있는 초가는 가족이 모두 논으로 일하러 나간 시골집을 연상시켰다. 추운 지역이어서인지 안방과 마당 사이에 마루가 없었다. 좌우 문 두 개로 안방을 드나들 수 있는 부엌에는 크고 작은 가마솥 세 개가 걸려 있어 북방식 가옥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내일은 민족의 명산 백두산에 올라야 하기 때문에 오전 6시에 일어나야 한다. 해서 안중근 유적지를 둘러보고 곧장 숙소가 있는 연길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연길까지 50분쯤 소요되었다.

덧붙이는 글 | 관련 내용은 현지 가이드와 박영희 시인의 설명, '2010만주기행'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태그:#조·중·러 국경, #봉오동전투, #안중근, #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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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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