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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0번 버스를 타고 구룡포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호미곶까지는 11킬로미터. 차로 가면 금세지만 소박한 어촌 풍경,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좋아서 걸어 봤습니다. 달리는 버스나 지하철, 자가용 안에서 보는 바깥 세상은 그저 한데 섞여 쏜살같이 흘러갈 뿐이지만 천천히 걸어 만나는 풍경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언제나 말하지만 걷다가 지치면 멈춰서 쉬면 됩니다. 힘 나면 다시 일어서 가면 되고 정히 힘들거든 손 내밀어 도움을 청하면 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어디를 향해, 왜 뛰는지도 모른 채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달려가는 걸 볼 때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구룡포 전경
 구룡포 전경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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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 앞 구룡포 전경입니다. 제 고향 부산과는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활기가 느껴집니다. 태어나기를 그러해서인지 세월 갈수록 바다가 좋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에 순응하며 그 곁에 겸손히 터잡은 작은 마을을 보면 다행스럽고 애틋해집니다. 

호미곶까지 11킬로미터. '걸어가볼까...'
 호미곶까지 11킬로미터. '걸어가볼까...'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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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에 한 대씩 호미곶 가는 버스가 오지만 왠지 걷고 싶습니다. 바다향 가득 머금은 바람도 좋고 구석구석 숨은 풍경들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에라, 걷자.' 가다 가다 못 가면 그때 가서 대책을 강구하지요. 적당한 '무대뽀'는 정신 건강에도 좋고 때때로 풍성한 여정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바다 참 좋다'
 '바다 참 좋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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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모처럼 보는 시원스런 바다 절경입니다. 콧끝부터 가슴까지 청량함이 전해옵니다. 어제(1일) 저녁 상륙한 태풍 '곤파스'가 서해안과 중부 지방을 할퀴고 지나면서 전국 곳곳에 각종 피해가 속출했지만 태풍 경로에서 빗겨난 경북지방은 다행히 평온한 모습입니다. 

해변가 사는 개 한 마리가 길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다.
 해변가 사는 개 한 마리가 길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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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가을을 맞은 어촌엔 간간히 지난 여름의 흔적이 보이지만 대부분 갓 손님이 빠져나간 집처럼 횡합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길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앉아 귀밑을 긁고 있습니다. '비, 비켜줄래?'

견공들 반상회(?)
 견공들 반상회(?)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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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만난 흰 개가 어느새 누구네 집 평상 밑까지 달려와 있는데, 녀석 말고도 세 마리가 더 있습니다. 급하게 논의할 문제라도 생긴 건지, 아님 단풍구경 갈 계획이라도 세우는 걸까요? 견공들 반상회 분위기가 사뭇 진지합니다.

소박하고 정겨운 어촌 풍경
 소박하고 정겨운 어촌 풍경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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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록 마음 푸근해지는 풍경입니다. 하얀색 윗옷에 남생 고쟁이 입은 아낙이 촘촘하게도 가꾼 집앞 밭일이 한창입니다. 사람이 자연의 품을 빌리는 가장 양심적이고 선한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모두가 딱 이 만큼만 자연에 기대어 살면 정녕, 안 되겠습니까.

구룡포 해수욕장 백사장 위 갈매기 군단
 구룡포 해수욕장 백사장 위 갈매기 군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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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킬로미터쯤 걸었을까요. 구룡포 해수욕장입니다. 건장한 어른 팔뚝보다도 큰 갈매기 군단이 바다를 향해 일렬 횡대로 섰습니다. 인기척이 가까워오니 선두에 섰던 몇 마리가 비상을 하는데 그 모습이 늠름합니다. 두 다리로 여덟 발자국쯤 힘껏 달려 날개를 쫙 펴고 파도 위로 날아오릅니다. 

조만간 저도 한번 날아봐야 할 텐데요. 패러글라이딩이나 번지점프나... 혼자도 상관없지만 애인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같이 해보고픈 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흥분됩니다. 갈비뼈가 아프도록 꼭 껴안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고나선 숨을 헐떡이며 "사랑해!" 라고 외치는 겁니다. 아, 상상만으로도 벅차네요!

'지금 사랑 영원하시길'
 '지금 사랑 영원하시길'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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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 한 쌍이 너른 바다에서 소중한 추억을 만드는 중입니다. '두 분 사랑 영원하시길!'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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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다시 아스팔트 차도 갓길로 들어서려는데 갑작스레 무척 향긋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길가에 핀 여러 종류의 식물에 코를 대어 보니 아무래도 사진 속 저 풀의 체취인 듯한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80년대 후반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유행했던 '향기나 지우개'의 그것과 비슷했는데요. 가끔 상상력 풍부한 혹은 먹성 좋은 아이들은 예쁜 모양의 그것을 정말 먹기도 했습니다(전 '종이먹기'로 울동네 짱이었습니다).

길 위의 점심식사
 길 위의 점심식사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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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를 출발하기 전 점심을 먹을까 고민하다 그냥 왔는데 판단착오입니다. 두 시간 넘게 걸었지만 밥 사먹을 만한 식당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쉬운대로 전날 먹고 남아 배낭에 구겨 넣어온 식빵을 꺼내 길 위의 식사를 했습니다. 두 장의 식빵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시죠? 그건 바로...... 토마토 케챂 한가득입니다. 우유도 버리지 않고 물통에 부어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누런 빛을 띄는 벼밭이 바다만큼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누런 빛을 띄는 벼밭이 바다만큼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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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 뙤약볕과 해풍을 맞으며 자란 벼들이 이제 제법 누런 빛을 띄며 바다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석평리에서 만난 할아버지. 포항제철 다니는 막내아들이 있다시며 끝까지 며느리 삼자 하시는 걸 어렵사리 고사했습니다.
 석평리에서 만난 할아버지. 포항제철 다니는 막내아들이 있다시며 끝까지 며느리 삼자 하시는 걸 어렵사리 고사했습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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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분이십니다. 저의 '시아버지'가 될 뻔 하신. 삼정리 지나 석병리로 접어들었는데 마침 벼밭을 둘러보고 나오는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먼저 인사를 드리고 호미곶에 가는데 맞게 잘 가고 있냐 여쭸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때 막 걸어온 지 네 시간을 넘긴터라 할아버지 곁에 서서 숨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대뜸 어르신 왈(曰) "결혼 안 했재? 딱 보니 우리 며느리 하면 좋겠네" 하십니다. 일단 예쁘게 봐주시니 흐뭇하긴 한데 그렇다고 만난 지 3분도 안 돼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하시니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말없이 웃고 있으니 몇 발자국 더 다가와 담배에 불을 붙이곤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상견례'가 시작됐지요.

시큰둥한 척 하며 제가 알아낸 정보는 제 부군이 될 지도 모르는 남자는 현재 포항제철에 재직 중인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달라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할아버지께 펜이 없다는 이유를 대며 뒷걸음질쳐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몇 초간 '정말 인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사람 연은 어찌될 지 아무도 모른다 하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포항제철에 다니는, 석병리 사는 박씨 할아버지 막내아들 되시는 분 이 글 보시면 연락 주십시오." 

그 유명한 호미곶 '상생의 손'입니다.
 그 유명한 호미곶 '상생의 손'입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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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평리에서 나와 더는 걷기가 힘들어 버스정류장에 앉았는데 그곳 주민이라는 어느 아저씨께서 버스가 언제 올 지 모른다며 가는 데까지 태워주겠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호미곶 '상생의 손'입니다. 사진으로만 봤는데 직접 와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맞은편 육지에 반대편 손이 또하나 있음도 이날 처음 알았습니다.

호미곶과 영일만 전경
 호미곶과 영일만 전경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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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아주 오랜 옛날 일본 대륙이 한반도에서 떨어져나간 뒤 바다가 깎고 다듬어 만들어진 호미곶과 영일만의 전경입니다. 해가 저물기를 기다리며 주변의 새천년기념관과 등대박물관을 둘러보고 점심겸 저녁으로 배도 채웠습니다.

사람이 만든 가장 어리석은 장난감 중 대표격인 '애완게'
 사람이 만든 가장 어리석은 장난감 중 대표격인 '애완게'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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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새천년기념관 옆 선물가게에서 본 '애완게'입니다. 몇 년 전 어느 대형마트에서 처음 봤는데 사람이 어디까지 어리석을 수 있는 지 보여주는 대표격 '장난감'이라 하겠습니다. 바다가 고향인 게를 저 좁디좁은 곳에 넣어선 아이에게 사육하게 하려 하다니... 아이에겐 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이 품은 수많은 생명을 자신과 동등하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부모가 되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이건 아닌 듯 합니다.

동쪽을 바라보며 노을을 기다리다니...
 동쪽을 바라보며 노을을 기다리다니...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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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7시가 지나고 8시가 가까웠는데 도통 노을질 기미가 없습니다. 눈치채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해 뜨는 동쪽을 보고 노을을 기다렸으니 밤을 새고 앉아 있었던들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늘은 그냥 어두워지나보다 하고 일어섰는데 고개 돌린 서쪽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이리 어리숙한 사람입니다.

오늘밤은 근처 호미곶찜질방에서 잡니다. 내일 일출 시각은 새벽 5시 55분. 시간맞춰 일어나 이번엔 꼭 눈부신 일출의 장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편지 줄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와 다음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태그:#국내여행, #호미곶, #구룡포, #가을편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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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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