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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리영희 선생,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정리 : 김병기 뉴스게릴라본부장, 최지용 기자
사진 : 권우성 기자

간경화로 투병중인 리영희 선생과 <오마이뉴스>에 리영희 평전을 연재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대담이 지난 27일 저녁 서울 연희동 큰아들 자택에서 진행됐다.
 간경화로 투병중인 리영희 선생과 <오마이뉴스>에 리영희 평전을 연재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대담이 지난 27일 저녁 서울 연희동 큰아들 자택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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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 국치 이전의 을사보호조약 시기, 그리니까 지금의 우리나라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던, 사실상 국가를 상실한 상황과 흡사하다. 일본이 개혁이니 어쩌니 하면서 우리를 보호해준다는 형태로 실제로 조선을 지배했고 국권을 상실했던 시기다. 지금은 그 지배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경술국치 100년 되던 날을 이틀 앞둔 지난 8월 27일 리영희 선생은 서울 연희동 큰아들 자택에서 가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과의 대담에서 이같이 진단했다. 그는 또 현 시국과 관련해서 "경찰-검찰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파시즘 초기 단계를 지나가고 있다"면서 MB 정권을 성토했다.

리 선생은 특히 현 정부의 한미전작권 전환 시기 연기 등 외교정책에 대해 "뭐가 있어? 감히 미국에 대해 무엇을 말해?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노예정권"이라고 규정한 뒤 "이보다 더 심한 정권이 어디 있어?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러지 않았다, 미국에 가끔 할 소리를 했다"고 일갈했다.

뇌출혈에 이어 간경화로 투병 중인 리영희 선생의 목소리는 가끔 가늘게 떨렸다.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은 여전히 명료했다. 이날 1시간30여 분간의 대담이 진행됐지만,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비교적 또렷하게 과거의 기억을 되살렸다.

리영희는 누구인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출생. 1950년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경북 안동에서 영어교사로 근무 중에 6.25전쟁이 발발해 1950년 군에 입대한 뒤 7년간 복무.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각각 연임.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연수, 1972년부터 한양대 문리대학교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어 19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해 여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됐다가 1984년에 복직.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분단을 넘어서>(1984) <역설의 변증>(1987)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 등 다수.
신문 등 글을 꼼꼼이 챙겨보지 못할 정도로 전에 비해 건강 상태는 나빠졌지만, 그는 "저녁 9시 방송 뉴스를 보려고 거실로 나온다"면서 시사적인 뉴스에도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주기적으로 복수에 물이 차서 며칠 전에도 4시간에 걸쳐 3000cc를 빼냈다"면서 "내년 이맘때쯤에 앙코르와트에 가고 싶은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1980년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한국의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소개했다. 그렇게 평가받았던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역정에 대해 후회는 없습니까'라는 질문에 목이 메인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 개인으로서는 할 만큼 했다, 1인분이 아니라 2인분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집사람과 가족에게 너무나 많은 마음의 고통을 안겨줬다."

한편 이날 대담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오마이블로그>를 통해 연재한 '리영희 평전'의 최종회(28일, 131회)를 앞두고 진행됐다. 평전은 올 연말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이날 리 교수는 김 전 독립기념관 관장에게 여러차례에 걸쳐 고마움을 표시했으며 "병원에 있을 때도 아들이 크게 복사해준 평전 몇회를 읽어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
 리영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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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동안 복수의 물 3000cc를 빼냈다"

다음은 리영희 선생과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과의 대담 요약이다.

김삼웅(김) : "하루에 세 차례 식사는 하시고요?"
리영희(리) : "그렇게 많이 못하고 있지. 두 끼. 요즘은 소금기 빠진 반찬만 먹고 있지." 
부인 윤영자(윤) : "세끼는 해야 해요. 점심도 조금씩."

리 : "예전에는 맛을 몰랐는 데, 청국장(나토) 맛을 알았어요. 그걸 먹고 있어."
김 : "의식은 아직 또렷하신데... "
윤 : "그래도 단어는 자꾸 잊어버리세요. 그래서 말이 잘 안 나오죠."

김병기(병) : "요즘에도 손님들은 더러 오시나요?"
윤 : "많이 오시겠어요? 이렇게 더운데."

리 : "(복수에 물이 차서) 며칠 전에도 병원에 가서 4시간에 걸쳐서 3000CC를 빼냈어. 펌프로, 아주 서서히. 그걸 벌써 몇 번을 하고 있어." 
김 : "TV는 가끔 보세요?"
윤 : "5시 뉴스 보고, '동물의 왕국'보고 '세계는 지금'... 9시 뉴스 볼 때도 있고요."

김 : "뉴스를 보시고 가끔 (시사적인) 말씀을 하실 때도 있으신가요?"
리 : "뉴스나 시사나... 관심 없습니다."

김 : "편안하시게 건강관리만 하십시오. 선생께서 키워놓은 후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리 : "여하튼 나대로 했으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각기 자기의 입장에서 해줘야지요."

김 : "선생님 책을 읽은 독자들이나 제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을 생각해 두신 게 있습니까?"
리 : "그저 나의 힘 닿는 데까지 사회를 위해서 해왔어요. 그것이 얼마만큼 사회에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할 것을 다 했습니다."


김 :
"(오마이블로그를 통해) 연재한 리영희 평전의 마지막 부분에 '선생님은 4.19 혁명 때 1인분의 역할을 했다. 언론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국민으로서 1인분의 역할을 했다'고 말씀을 하신 것을 썼습니다.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지식인으로서 100인분, 1000인분의 역할을 하셨지만 선생님은 또 겸양하시게 1인분의 역할을 했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감명 깊었습니다."
리 : "1인분의 역할을 충분히... 사실 2인분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지. 청와대까지 파이프를 굴렸고 저쪽에 총을 쏘는데 파이프 뒤에 숨어서 밀고 올라갔 거든."

김 :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영암 월출산 밑에서 그 분(한학자 최준기 선생)이 '지금까지는 조광조처럼 사셨는데 이제는 퇴계 선생처럼 사시라' 해서 감명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을 조광조에 비교할 게 아니라 남명 조식 선생하고 비교하는 게 적절했을 것 같아요."
리 : "글쎄 잘 모르겠네요."

김 : "조광조는 정치인으로서의 국정을 개혁하신 분이고 남명 선생은 정부에서 아무리 불러도 자기는 권력과 정치와는 상관없다면서 왕도 비판을 하면서 지식인으로서 올곧게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퇴계 선생 밑에는 의병이 몇 명 없었는데 남명 선생 밑에는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대단히 많았습니다. 선생님 제자들이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언론개혁운동을 했던 것으로 봐서 오히려 조광조 보다 조식 선생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리 : "최준기 선생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급하게 살지 마라, 이제는 삶을 천천히 여유 있게 살라는 것이었죠. 퇴계처럼 느긋하게 사는 것을 빗대서 나처럼 뭔가 이룩하고자 다급하게 사는 것에 대해 비판도 했죠."

"내년쯤 앙코르와트 가는 게 소망인데..."

김 : "지금까지 살아오신 역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세요?"
리 :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내가 안하겠어요? 집사람과 가족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고생을 시켰고, 나 개인으로서는 할 거 다 했습니다."

김 :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하는 분들을 보면 가족이 많이 헌신을 하셨잖아요. 역사를 기록하는 분들은 본인에 대해서는 조명을 하는데 막상 그 음지에서 고난을 받았던 가족에 대해서는 다 묻어버리거든요. 그런 면에서 사모님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 있습니까."
리 : "특별히 해야지요. 너무나 할 말을 못했다는 것. 생각할수록 참 불쌍해."

김 : "건강 회복하셔서 내년쯤에는 앙코르와트를 한번 가시는 게 소망이라고 하셨는데."
윤 : "가려고 예약하려고 했어요. 그게 팔자가 안 되시려나... "
리 : "(부인이) 나하고 맺어지지 않았으면 훨씬..."
윤 : "자식들한테도 미안하다고 해요. 오붓하게 둘러앉아 이야기 하지도 못했어요. 그런 걸 많이 후회하고 미안해 하고."

김 : "선생님 것(평전)을 다 썼으니까 다음번에는 김상덕 반민특위위원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919년 2.8 독립선언 11명 중 서명을 하고 중국에 임시정부에 가서 의정원 의원을 하고 의혈단 단원을 하고 러시아에 가서 약소민족 대표단 회의 대표로 가고 만주로 가서 무장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 국회의원으로 고령에서 당선돼서 반민특위를 하다가 이승만에게 쫓겨나 북한으로 갔습니다. 제가 북한에 가니까 묘소에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연구해놓은 논문이 딱 한 편이 있습니다. 무슨 자료 한편도 없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인데...

고령에서 학교를 다닐 때 열여섯살엔가 결혼을 하고 바로 동경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만주로 갔기 때문에 부인이 고향에서 혼자 살았어요. 어찌 보면 사모님(윤)은 나은 편입니다. 중국에서 정의부 요원을 할 때 아들하나 딸 둘을 낳았는데 중경에 피난 갔을 때 못 먹어서 아들, 딸, 부인까지 죽어버렸어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한국에 살고 있는데 이승만한테 얼마나 박해를 당했는지 아들은 아직 전셋집에 삽니다. 김 선생은 독립운동하느라고 애들을 보살피지 못하니까 고아원에 보냈습니다.

내일 모레면 국치 100년인데 아직도 친일 세력들, 그 잔재가 아니라 친일세력들이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언론사의 학자로 계실 때 여러 편 글을 쓰셨지만 아직도 그런 세력들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미국의 노예정권이야"

리영희 선생.
 리영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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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 "중앙일보에 백선엽이 연재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친일파라는 얘기는 없고 빨갱이 때려잡은 공로를 이야기 할 뿐입니다. 자기가 일본사관학교 졸업생이라는 것도 없어. 그건 그거고 내가 궁금한데, 그 서해에서 미국항모가 뭐 하는 거 어떻게 됐나요."
김 : "아직은 안 왔는데 9월 중에는 예정대로 링컨함이 서해에서 훈련할 거라는 보도가... "

리 : "조지워싱턴호?"
김 : "아, 조지 워싱턴호가 훈련을 하겠다고 언론에 나오고 있습니다."

리 : "중국이 어떤 태도로 나올런지."
병 : "중국도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겠죠."
리 : "보통 불편한 게 아니지. 서해와 남해 그렇게 미국 항모가 왔다갔다 마음대로 하면 중국이라는 존재가 없어지잖아. 중국이라는 대국이 자신의 위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지."

김 : "지난 상반기에 중국의 경제력이 일본을 추월했다고 보도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조만간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나 지도자들은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조선 조선중기에 광해군이 현실노선으로 명나라 청나라 과도기에 실용주의 외교를 펼쳤는데 보수세력들이 명나라를 배반했다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게 인조반정 아닙니까. 지금도 미국에 대한 맹신주의가... 미국과 일본을 합친 무역량보다 중국과 거래하는 무역량이 더 많거든요. 그런 상황인데 미국에 너무 추종하다보니까 오히려 과거 냉전시대처럼 한국은 미일 해양세력하고 연결이 강화돼버리고 북한은 중국하고 러시아쪽하고 해서 선생님께서 늘 염려하셨던 냉전체제의 구도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갈라지는 현상이 더 심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리 :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지만 크게는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죠."

김 : "그런데 북한은 국가로서의 유지가 어려우니까 중국한테 더 매달리고, 남쪽도 그것을 좀 제지해 달라는 식으로 매달리게 되면 남북이 이제 중국에 대해서 조공외교를 해야할 판이 아닌가요? 민족적으로 참 부끄러운 현상이 전개될 것 같아요."
리 : "그런 면이 적지 않지. 하지만 이제는 내가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기가 힘들어. 자료를 읽지 못하니까. 그냥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그 정도가 고작이야."

김 : "70년대 '죽의 장벽'이라고 해서 중국을 중공이라 부르고 했을 때 선생님께서 가장 먼저 '중국'이라고 쓰셨고 그 뒤 중국과의 관계는 엄청난 속도로 변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지도세력 일부는 미국의 맹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한국과 중국이 어려워지는 관계로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리 : "한국의 일부사람들이 아니라 한국을 지배하는 거의 80~90%가 그럴 거야.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인간들이 전부 그렇고. 언젠가 보니까 친한 나라, 내가 좋아하는 나라의 70 몇 %가 미국이야. 이거 엄청난 거라고. 국가를 송두리째, 정치든 경제든 가져다 맡기는 거야."

김 : "주요 국가기관의 연구소의 99%가 미국출신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리 : "그걸 두려워 하는 거야. 뭐 조금 한다면 미국출신 박사야."

병 : "현 정부 들어서 많이 심화됐다고 볼 수 있나요?"
리 : "물론이지. 이명박 정권은 미국의 노예 정권이야. 이보다 더 심할 때가 어디 있어. 이승만 정권도 이러지 않았어. (미국에) 큰 소리 좀 쳤다고. 헛소리를 가끔 하면서도..."

"파시즘 초기 단계를 지나고 있어...지금은 한일강제병합 직전 단계"

리영희 선생.
 리영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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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
"작년 인권실천시민연대 10주년 축사에서 이명박 정부의 1년 반을 진단하시면서 '파시즘 초기 단계'라고 우려하셨는 데, 지금 상황은 어떻게 진단하시는지요."
리 : "(파시즘 초기단계를) 지나가고 있어. 검찰 경찰 하는 걸 보면 어디..."

김 : "전시 작전권 전환을 또 연장시켜준 것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리 : "나는 이제 독립국가로 생각하지 않아. (이명박 대통령 임기) 3년 정도만 한 것도 다행이지. 노예가 뭐가 있어. 자주? 아무 것도 없잖아. 감히 미국에 대해서 무엇을 말을 해?"

병 : "자칭 '보수'라고 표현하면서 자주 국방 등을 소홀히 여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보수'라고 하면 민족적이고, 자주적이면서 국방 등을 우선시하는 데 말입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보수'의 이름을 바로잡아주신다면 무엇으로 부르시겠습니까?"
리 : "이건 완전히 수구 세력이지요. 극우."

병 : "선생님께서는 지금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상황을 과거 우리 근현대사에 비교할 때 어느 시기와 흡사하다고 평가하시는지요?"
리 : "그러니까, (을사)보호조약시기. 강제병합되기 직전인 1905년, 거의 사실상 국가를 상실한 그 시기로 봐요."

김 : "어떤 면에서죠?"
리 : "일본이 개혁이니 어쩌니 하면서 우리 주권을 거의 상실하고 빼앗았습니다. 우리를 보호 해준다는 형태로 조선을 실제로 지배했으니까요."

병 : "그 당시에는 지배 주체가 일본이었지만 지금 미국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건가요?"
리 : "미국이지. 지금의 시기를 그 강제병합 직전인 1905년으로 보는 거지."

"베트남에 대한 사죄는 구체적으로 해야"

김 : "운동을 좀 하십니까."
윤 : "나가서 여기 왔다갔다 하는데 한 번 두 번 하시면 숨이 차니까."
리 : "그것도 그렇고 내 잡일을 맡아서 해줘야. 뭐 밤낮으로... 밤에는 자다가 내가 잠이 깨면 나를 또 어떻게 해줘야 하고."

김 : "그럼 식사도 (부인께서) 도와주시나요?"
리 : "식사는 왼쪽 손으로 직접하죠."

김 : "처음에 쓰러지셨을 때(2000년 뇌출혈)도 일어나셨으니까, 지금도 다시 일어나실 겁니다. 얼마전 백병원에 누워계실 때 비하면 얼굴은 초췌해지셨지만 건강해 보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빨리 털고 일어나셔서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리 : "나도 그러길 바라죠. 그래봐야 1년, 2년이겠지만."

김 : "그렇지 않습니다. 평균수명이 90이 넘습니다."
윤 : "그건 병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저는 이 상태로 1년만 더 갔으면 좋겠어요."

김 : "아직 기억력이 명료하시고. 또 이 병은 현대의학으로 다 아는 병 아닙니까."
리 : "아는 병이 아니에요. 몸에 구멍을 내서 3000CC, 그렇게 많은 물을 내야 (배가) 들어간다 이겁니다. 그런 고통을 몇번 당해요. 쉽지 않아요, 나는 쉽지 않은 일을 마치 쉬운 것처럼 자위하거나 이런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김 : "얼마 만에 한 번씩?"
윤 : "콩팥 지수를 보면서 하더라고. 간이 안 좋으니까 콩팥까지 좋지 않습니다." 

김 : "많이 좋아지셔서 내년에 앙코르와트 가실 때 같이 가겠습니다."
리 : "앙코르와트를 볼 수 있으면 참..."

김 : "베트남 건국 행사 때 베트남 대사 초청으로 베트남에 가셔서 '개인적으로라도 베트남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겠다. 우리 국민들이 베트남에 용서를 빌어야 된다', 이런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리 : "물론이죠. 장학금의 형태도 있지만 예를 들어서 병원을 하나 지어주는 거, 학교를 몇 개를 지어준다는 식의 구체적인 사죄를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인들이 많이 죽였으니까. 일본하고도 같아요. 일본이 뭐 죄송하게 됐다고 하는 데 우리는 이거 가지고 돼냐라고 묻습니다. 남의 나라의 경우는 아주 강하게 요구하고 우리가 베트남에서 한 것은 과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

김 : "그때도 선생님 쓰신 글을 보니까 베트남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에 침 한번 뱉지 않은 사람들인데, 우리가 학살했다라고 쓰신 기억이 납니다."
리 : "베트남에서 무자비하게 학살했잖아요. 미군의 쫄병이 돼가지고서. 용병.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물적으로 그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사과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병 : "작금의 상황을 1905년에 비유하셨는 데, 후배 언론인들을 보면서 갑갑하다고 느끼지는 않으셨는지요? 후배 언론인들에게 한 말씀하신다면?"
리 : "갑갑할 뿐 아니라, 제정신들을 차리고 있는가 싶어요.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 갑갑하다고도 생각 안 해요. 아주 포기했으니까. 마음을 비우고 털고,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으니까 갑갑하지는 않아. 대신 뉴스는 보지. 9시 뉴스를 보려고 여기로(거실)로 나오지."

간경화로 투병중인 리영희 선생과 <오마이뉴스>에 리영희 평전을 연재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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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리영희,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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